처음읽는 중국현대철학_리쩌허우의 미학사상과 서체중용론
처음읽는 중국현대철학의 마지막 시간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대표자인 리쩌허우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리쩌허우의 사상적 여정은 중국 현대사의 가장 격렬했던 시기, 즉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를 관통하며 형성되었다. 그의 철학은 급진주의적 혁명이 가져온 파괴와 혼란에 대한 처절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반성의 결과, 그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유물론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폭력적 수단 대신 점진적 개량을 선택하는 독특한 현대화 노선을 구축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중국의 고질적인 봉건성과 현대성의 모순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해결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사상 편력은 초기 미학 재정립부터 후기 고별혁명 선언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로 명확히 구분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구 문명의 핵심을 중국의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서체중용론을 제시하며 혁신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그의 사상은 경제 발전 우선의 실용주의적 선택을 하면서, 당시 중국 사회가 당면했던 계층 양극화나 민주화 지연 등의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비판적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게 되었다. 결국 그의 철학은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자 했던 치열한 지식인의 고뇌와 실용주의적 타협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정립과 초기 명성 (1930년 ~ 1978년)
리쩌허우의 초기 생애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에 기반한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고, 격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관철시키려 노력했던 시기다.
탄생과 초기 사상 형성: 1930년 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난 리쩌허우는 베이징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사회과학원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며 유물론적 성향을 확립했다.
미학 논쟁의 중심: 1950년대 후반에 발생한 중국 미학 논쟁에 참여하여 실천미학이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의 본질을 인간의 '실천 활동'을 통한 '자연의 인간화'에서 찾았다.
문화대혁명의 시련: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사상적 입장이 비판받으며 침묵을 강요받는 시련을 겪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급진적 폭력 혁명에 대한 깊은 회의를 심어주었고, 후기 사상인 개량주의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체성 철학의 모색: 문화대혁명 이후인 1970년대 중반, 그는 칸트의 철학을 흡수하여 마르크스주의 실천론과 결합한 ‘발생적 주체성’ 개념을 제시하며, 후기 사상 전개의 발판을 마련했다.
문화열의 중심과 서체중용론의 전성기 (1979년 ~ 1989년)
이 시기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과 함께 중국 사회가 사상적으로 가장 활발했던 '문화열(文化熱)'의 시대이며, 리쩌허우가 지성계의 사상적 지도자로 떠올랐던 전성기다.
자유주의 사상의 수용: 1980년대 초반, 자유로운 학술 분위기 속에서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국 사회의 근대화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서체중용론의 완성: 이 시기에 그는 중국의 고질적인 봉건성과 현대성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사유 속에서 서체중용(西體中用) 이론을 수립했다. 이는 서구의 근대적 생산 양식과 과학기술을 '체(體)'로 삼고, 이를 중국의 현실에 '용(用)'하는 것을 강조한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문화열의 구심점: 그의 서체중용론은 당시 중국 사회에 만연했던 전반서화와 중체서용이라는 양극단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는 미학적 해방감과 개혁적 담론을 통해 전근대성을 탈피하려는 젊은 세대의 사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천안문 사태의 충격: 1989년 천안문 사태는 리쩌허우의 생애에 다시 한번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 사건을 겪으며 다시 한번 급진적인 정치 혁명의 위험성을 절감했고, 그의 사상은 개량주의로의 완전한 전환을 준비하게 되었다.
고별혁명과 개량주의로의 전환 (1990년 ~ 사망)
천안문 사태 이후 해외로 망명한 리쩌허우는 문화 급진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중국의 현실에 가장 적합한 점진적 개량주의 노선을 완성하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고별혁명 선언: 1997년 그는 저서 '고별혁명(告別革命)'을 통해 중국의 폭력적 혁명 전통과 결별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캉유웨이가 시도했던 영국식 개량주의 방식을 높이 평가하며, 안정 속에서 점진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화적 창조와 4단계론: 그는 개량의 방법론으로 '전화적 창조'를 제시하며, 낡은 형식을 이용해 점진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지난한 과정을 역설했다. 또한 중국의 현대화 경로를 ① 경제 발전 ② 개인주의 ③ 사회 정의 ④ 정치 민주의 4단계론으로 설정했다.
현실주의적 논쟁: 그의 4단계론은 경제 개발을 최우선하고 정치 민주화를 최후로 미룸으로써 당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과 궤를 같이 했다. 이로 인해 그는 90년대 중국 지성계의 신좌파 및 신자유주의자들과 논쟁하며 현실주의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남겨진 유산: 비록 그의 사상이 사회 불공정이나 민주화 지연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회피했다는 한계를 남겼지만, 봉건성과 현대성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고뇌했던 그의 학문 정신은 오늘날 중국의 사상적 논의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리쩌허우의 사상적 편력은 중국 현대사의 재앙적 사건들을 마주하며 혁명 대신 개량을, 정치민주화 대신 경제개발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시기에서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중국의 미학사상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1단계 과정을 거쳤다. 이 초기 단계는 그의 유물론적 성향을 바탕으로 미학적 토대를 구축하려는 학문적 시도였으며, 후기 사상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1980년대의 자유로운 학술 분위기 속에서는 한편으로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적 현실의 적용을 강조하는 서체중용의 이론을 수립하는 2단계로 발전했다. 이 시기는 중국이 문화열이라는 이름 아래 서구의 사상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던 개혁개방 초기에 해당한다.
리쩌허우의 사상 편력의 마지막 3단계는 1990년대 이후, 문화 급진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며 전화적 창조로서의 개량주의를 강조하는 시기였다. 그는 ‘고별혁명’이라는 저작을 통해 자신의 사상적 전환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으며, 급진주의와의 단절을 명확히 했다. 그는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생활의 진보를 믿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적 성향을 평생에 걸쳐 꾸준히 견지했으며, 이는 그의 사상이 서구의 근대적 생산 양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변천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이 천명된 이후로 전개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노선과 궤적을 같이 하였다"고 평가되는데, 이는 그가 현실 권력의 정책 기조와 궤를 같이하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했음을 의미한다.
리쩌허우는 고전적인 학문에만 몰두하는 학자가 아니라, 중국의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사유의 촉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사유하는 치열한 사상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라는 중국 현대사의 재앙적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사상의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사건은 그에게 폭력 혁명의 무용성과 위험성을 깨닫게 했으며, 안정 속의 점진적 개혁만이 중국을 위한 길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는 중국의 봉건성과 현대성의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했으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유 속에서 서체중용의 모델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당시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의 사유의 진정성은 인정받았다.
그의 사상적 궤적은 혁명보다는 개량을, 계획경제보다는 시장경제를, 정치민주화보다는 경제개발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그가 폭력적인 정치 격변 대신 사회의 질서와 안정 속에서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그가 1999년 저작 ‘기묘오설’에서 제시한 4단계론의 핵심적인 전제가 되었다. 비록 그의 사상이 시대의 변화에 호응하면서 변천을 거듭하는 가운데 이론적 한계와 모순을 노출시키기도 하였지만,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자 했던 그의 학문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지성계에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철학은 격변의 시대 속에서 지식인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 태도의 모범이자, 동시에 비판적 성찰이 필요한 지점이었다.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중국에서는 미학논쟁이 일어난다. 1956년 중국이 사회주의로의 토지개혁을 완성하면서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상부구조를 지탱하는 하부구조인 경제가 제대로 된 기반을 가지게 되면 그에 맞게 상부구조를 가는다고 한다. 그러니깐 경제라는 토대 위에서 법과 정치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원래 이데올로기는 라캉의 RSI로 따르면 Reality인 실재가 아닌 상상과 상징의 연결을 말한다. 그러니깐 이데올로기는 실재에 의해서 만들어진 상상의 산물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전까지의 이데올로기에서 '미학'은 자본주의를 떠 받치는 자본가들의 미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경제적 토대 위의 잘 연결된 상층부로써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미학논쟁의 서막을 알린 것이다. 그럼 어떤 것이 마르크스 미학이 되어야 하는가?
그럼 어떤 것이 마르크스 미학이
되어야 하는가?
미학논쟁에 등장한 학자들은 크게 3명으로 대표되었다. 주광첸의 주객통일론과 차이이의 절대객관론, 그리고 리쩌허우의 객관사회론이 바로 그것이다. 원래 미학은 칸트에 의하면 판단력의 영역에서 존재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성은 양, 질, 관계, 양상에 따라서 개념없이 보편적인 만족을 주며, 존재와 무관하게 관조형식이며, 목적없이 만족감을 주며 필연적이다. 그러니깐 미는 학습이나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디서 보더라도 아름답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실천이성이나 순수이성의 여역이 아니라 '취미'에 의해서 정해지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영역은 직관으로 바로 알 수 있는 영역이다. 리쩌허우는 실천을 기반으로 한 '사회성'을 획득한 미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미학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주광첸은 1956년 '문예보'에 기존에 자신이 주장하던 주관유심론적 미학 이론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주객관에 반대해서 개인의 주관을, 유물에 반대해서 마음의 작용인 유심을 결합한 주관유심론이 물질세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주객통이론은 '문예'라는 것은 현실의 반영이며 사회현상이고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이라는 의식과 객관이라는 사물의 성질이 서로 교헙하면서 하나로 만들어지는 것이 '미'라고 본 것이다. 사물과 의식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미'의 작용은 흡사 변증법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주광첸의 주객통일론을 차이이는 공격하면서 절대객관론을 주장한다. 차이이는 사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의 의식이나 마음에 있지 않고 사물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물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물의 아름다움이 인간의 의식에 반영되어서 작용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미감의 근원은 사물 자체라고 주장한다. 이는 칸트의 미학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보편성은 인간에게 나오지 않고 사물 자체에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인간의 의식을 제외한 미의 개념은 기계론적 유물론으로 비판을 받았고 '주체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철학에 있어서는 유물론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주광첸은 주관적인 인간의 의식과 마음에 여전히 사로 잡혀있었고, 차이이는 지나치게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리쩌허우는 여기서 '미의 사회성'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미학사상을 진행한다. 리쩌허우는 '미'와 '미감'을 구분한다. '미' 자체는 사회적으로 생겨나서 보편성을 가지게 되며, '미감'은 그것을 받아들인 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깐 자연 자체가 미가 아니라 자연을 받아들인 사회에서 규정한 미가 미의 본질인 것이다. 미의 사회성이 핵심이다. 그러면 미의 사회성은 어떻게 생기는가?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경제철학수고'에서 썼던 '사회'의 발현이 '실천'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니깐 미는 사회적인 실천을 통해서 생긴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실천을 보는 사람들은 일정한 '미감'이 발생하게 된다.
'미의 역정'을 통해서 미와 미감의 예시를 살펴보자. 리쩌허우의 사회적 존재로써 미를 농경사회에서 찾아보자. 밭고랑의 곡선과 물이 흐르는 곡선 그리고 질그릇의 형태와 같은 부분은 농경생활 속에서 발생한다. 인간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서 발달된 이러한 곡선은 자연과 마주하여 인간의 실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미감'은 곡선형태를 볼 때 느껴지는 '안정감과 풍요로움, 풍요에 대한 기대'와 같은 것들이다. 미감은 개인의 의식에서 발생하지만 그 근원은 인간이 살아온 수천년간의 농경사회에서 실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집단 무의식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사회적 실천이 쌓여 있는 사물의 형태와 내용은 그 자체로 이미 '미'가 사회적으로 실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깐 '자연의 인간화'란 의식화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개조하는 실천활동이다.
실천을 통해 외재 자연에 인간의 본질 역량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을 미적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외재적 자연의 인간화'라고 할 수 있다. 실천이 만든 자연의 인간화가 미의 본질이자 근원이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1870년대가 되면 리쩌허우는 칸트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칸트가 선험성이라고 하는 보편성을 주장하는데 반해 리쩌허우는 발생적 주체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가진 주체성이란 가지고 태어나는게 아니라 그 사람이 태어난 특정 사회가 공유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실천의 산물인 미의 사회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비판적을 수용을 통해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킨 리쩌허우는 1980년대 '정감본체'론을 주장하면서 미의 사회성이 드러나는 실제는 '감정과 감각'이라고 주장했다. 시대마다 쌓인 감정과 감각은 개인의 삶 속에서 미의 사회성을 실천하는 기반이 된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는 집단주체성에서 개체주체성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잡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문화열의 시작이 된다.
리쩌허우의 사상의 역사
리쩌허우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시기부터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중국의 미학사상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사상적 1단계를 구축했다. 이 시기,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적 성향을 바탕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미학관을 혁신하려 시도했다. 그의 초기 미학 이론은 미의 본질을 인간의 실천 활동과 '자연의 인간화'에서 찾는 실천미학의 관점을 형성했다. 이는 당시 중국 공산당 정권이 필요로 했던 계급적 성격을 넘어선 이데올로기적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미학 논쟁에 참여하여 중국의 미학 이론을 사회주의 체제에 부합하면서도 학문적 깊이를 지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의 자유로운 학술 분위기 속에서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수용하며 서체중용의 이론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학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시기, 그는 미학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의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억압되었던 개인의 감성과 정서적 해방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학적 영역에서 개인주의의 가치를 탐색하고, 이를 서구적 가치와 중국적 현실의 절충을 시도하는 서체중용론의 틀 안에 통합시키려 했다. 이러한 그의 미학적 탐구는 단순히 예술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 사회의 근대화와 인간 해방의 문제를 연결시키는 철학적 실천으로 기능했다.
그의 후기 사상인 4단계론에서 '개인주의'가 경제 발전 다음의 두 번째 단계로 설정된 것은 이러한 미학적 성찰의 결과였다. 리쩌허우는 경제적 토대가 마련된 이후에는 무엇보다 개인의 가치와 자유가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폭력적인 집단주의적 혁명 노선이 개인의 인권을 짓밟았던 과거에 대한 반성이며, 궁극적으로는 서구 자유주의의 핵심인 개인주의적 가치를 중국 사회에 이식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중국의 봉건적인 심층문화 심리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러한 문화를 개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인의 주체성 확립을 강조했다.
리쩌허우는 서구의 선진적 문명을 흡수하고 동화하여 전화적 창조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미학사상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서구의 미학 이론과 예술관을 수용하여 중국 전통 미학의 병폐를 보충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는 "수천 년간 중국을 견인해 온 봉건적 전통의 실체를 직시"했으며, "수준 높은 이론으로 끌어올려 이러한 문화를 재해석하고 병폐를 보충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는 그의 미학적 사유가 단순한 예술론이 아니라, 중국의 심층 문화 심리를 분석하고 개조하려는 사회 철학적 작업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준다.
칸트의 미적 판단력의 네 가지 계기 (Quartette)
양(量)의 계기: 보편적인 만족. 미는 개념 없이(without concept)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대상이다. 미적 쾌감은 사적(私的) 감각이 아닌, 주관의 인식 능력이 조화롭게 작용할 때 발생하는 쾌감이므로, 누구나 느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주관적 보편타당성을 갖는다.
질(質)의 계기: 무관심한 만족 (Mitleloses Wohlgefallen). 미는 대상의 존재(Existenz)와는 무관하게(Disinterested), 오직 그 대상을 관조하는 형식 자체에 대해 만족을 준다. 이 '무관심한 만족'은 실용적인 이해관계나 감각적 쾌락(예: 맛있는 음식), 도덕적 선(善)과는 전혀 관계없는 순수한 관조(Contemplation)에서 비롯된다. 미는 어떠한 관심 없이 만족을 주는 대상이다.
관계(關係)의 계기: 목적 없는 합목적성 (Zweckmäßigkeit ohne Zweck). 미는 그 대상이 마치 어떤 목적(Zweck)을 가지고 우리에게 딱 맞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특정한 목적이 없다는 만족을 준다. 대상의 형식(Form)이 인간의 인식 능력(상상력과 오성)과 조화롭게 합치되어 마치 의도를 가진 듯 느껴진다. 미는 목적의 표상 없이 합목적성의 형식(형태)을 가진 대상이다.
양상(樣相)의 계기: 필연적 만족. 판단의 특징: 미적 판단은 개념 없이 보편적이고, 무관심하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갖추었기에, 그 만족이 필연적(Necessary)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필연성은 객관적 규칙이 아닌,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공통 감각'에 근거한다. 모든 인간의 인식 능력 구조가 같기 때문에,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미적 쾌감 또한 동일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미는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필연적인 만족의 대상이다.
헤겔의 예술의 역사 구분
헤겔 미학의 핵심은 '이념(Idee, Idea)'과 '감성적 현현(sinnliches Scheinen, 감각적 드러남)'의 조화를 통해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이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예술을 정의한 데 있다.
예술의 정의: 예술은 이념(Idea)을 감성적인 형식(감각적 형태)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즉, 정신적인 내용(이념)이 물질적인 외양(감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미학의 대상: 헤겔 미학은 자연미(自然美)가 아닌, 오직 예술미(藝術美)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자연미는 '정신'의 산물이 아니므로, 헤겔의 예술철학 대상에서 제외된다. 예술미는 '정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에 자연미보다 우월하다고 본다.
예술의 한계: 예술은 정신을 감성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이지만, 결국 감성적 형태에 매여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따라서 예술은 궁극적으로 종교와 철학에 의해 극복된다.
상징적 예술(Symbolic Art) : 동양 예술(이집트, 인도, 초기 그리스 등). 내용(이념)이 형식(감성)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막연하여 형식에 제대로 담기지 못한다. 이념과 형식의 관계: 불균형(不均衡) 또는 불일치의 단계이다. 예술가가 표현하려는 거대한 정신(예: 무한한 신성)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명확하게 표현되지 못하고, 신비롭고 난해한 상징으로만 남아있다. 이집트 피라미드, 스핑크스와 같이 거대하고 웅장하지만 정신의 내용이 형태에 완전히 스며들지 못한 건축물.
고전적 예술(Classical Art) : 고대 그리스 예술(BC 5세기) 내용(이념)과 형식(감성)이 완벽하게 조화와 통일을 이룬 최고의 단계이다. 이념이 감성에 의해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된다. 균형(均衡) 또는 완전한 일치의 단계이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신체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정신과 육체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조각(Sculpture)이다. 조각은 인간의 신체를 통해 정신적 이상(Ideal)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다. 헤겔은 그리스 조각을 예술사의 정점이라고 칭송했다.
낭만적 예술 (Romantic Art) : 기독교 이후의 서양 예술(중세~근대) 내용(이념)이 형식(감성)을 뛰어넘어 다시 압도적이 되는 단계이다. 절대정신이 내면(內面)으로 깊숙이 들어와, 감각적인 외형은 그 깊은 정신을 담아내는 데 부족함을 드러낸다. 이념과 형식의 관계: 재분열(再分裂) 또는 불균형의 단계이다. 그리스 신과 달리 기독교의 신은 무한하고 비물질적인 존재이기에, 감각적인 형태로 완벽하게 표현될 수 없다. 내용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회화, 음악, 시(詩)이다. 특히 시는 감각적 형태가 가장 약하고 정신적 내용이 가장 강한 예술 형식으로, 낭만적 예술의 정점이다.
리쩌허우의 실천미학 feat. 민네이션
칸트의 미학도 아니고 헤겔의 미학도 아닌 실천미학은 변증법을 이해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 체계 안에서 이미 '아프리오리'된 미라는 보편감각을 발현하는 것이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 미판에서의 '미'의 개념이라면, 헤겔은 오히려 이념과 감성의 정반을 통해서 합에 이르는 절대정신으로서의 미의 개념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의 미학은 칸트의 방식을 일단 미리 부정하는 유물론이지만, 헤겔의 방식으로 '절대정신'에서의 미학도 부정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으로 미의 개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헤겔은 인륜성에 기초한 '정'의 개념 그러니깐 '미에 대한 이념'이 '반'에 해당하는 현실과 만나서 '미에 대한 감각'이 생기는 것을 바탕으로 미의 개념을 정의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거기서 멈춰선다. 오히려 '반'에서 시작해서 '합'으로 가지 않고 '정'으로 간다.
그러니깐 변증법에서 상승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수평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 미학의 핵심이다. 현실에서의 실천을 통해서 자연과 만나고 자연을 변화시켜서 미를 만든다. 또한 그 과정에서 경험한 미의 감각은 인간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보편적인 감각을 만든다.
실천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경험'이고, 집단경험을 통해서 그 사회가 공유하는 미학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유물론도 아니고 관념론도 아닌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라는 실천미학이다. 실제로 북한에는 이러한 미학개념 때문에 추상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실천의 현장에서 변화된 자연과 인간의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1980년대는 리쩌허우가 자유로운 학술 분위기 속에서 한편으로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적 현실의 적용을 강조하는 서체중용의 이론을 수립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 이전의 경직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학문적 활력이 넘쳤던 '문화열'의 시대였다. 리쩌허우는 미학 분야에서의 선구적 업적과 함께, 서구의 근대성을 중국에 어떻게 이식할 것인가에 대한 명쾌하고 급진적인 답변을 제시하며 젊은 지식인들의 사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의 강연과 저작들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중국의 현대화 논의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렇나 문화열을 이끄는 4가지의 학파가 있었는데 유학부흥론, 비판계승론, 철저재건론, 서체중용론이 바로 그것이다. 유학부흥론은 유학을 부흥시켜서 문화대혁명에 받은 치욕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유가사상의 독착성과 우수성을 알리자는 의미에서 '신유가'를 주장한 펑유란이나 량수밍이 활약했고, 공자기금회와 중국문화서원, 현대신유가연구회등이 활동하였다. 마오쩌둥 이후에 폄훼되었던 유가를 회복시켜서 중국의 특수성을 세계의 보편성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들을 진행한 것이다. 특히 문화혁명으로 사라진 전통성에 대한 복권을 꿈꾸며 타이완과 홍콩에서 활양하고 있던 철학자들이 대거 등장했다.
비판계승론은 중국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알맹이와 찌꺼기를 구분하자는 운동이었다. 중국적 특성을 지닌 사회주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종합해서 사회주의 신문화를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이것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직면한 경제개혁의 현실을 반영하여 전통을 살리되 서구문화 가운데 과학과 민주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전통을 살리자는 취지였다. 철저재건론은 반정통입장에서 중국의 낡은 제도와 문화를 버리고 서양의 과학적 방법론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이론을 가져와서 전근대적인 문화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ㅓ한 과정에서 리쩌허우의 서체중용론이 등장한다.
리쩌허우는 이 시기에 "중국의 봉건성과 현대성의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사유 속에서 서체중용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는 단순한 전통 옹호나 서구 모방을 넘어, 중국의 낡은 형식을 이용하면서도 서구의 선진적인 체계를 '체(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겪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의 사상은 중국의 봉건적 심층 문화 심리를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근대화에 완전하게 진입하지 못한 중국의 무수한 백성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실체로 규정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모두를 서양학문을 기반으로 만들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을 중국의 방식으로 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학문에만 몰두하는 학자가 아니라, 중국의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사유의 촉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사유하는 치열한 사상가의 모습을 보이며 문화열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낡은 형식을 잘 이용하고 돌다리를 두드리면서 강을 건너는 것과 같이" 점진적이지만 확실한 변화를 추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러한 실용적이고 점진적인 태도는 급진적인 혁명에 지쳐 있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조건 서양이 좋다고 몽땅 가져다가 베끼는 전반서화의 길로 기울지도 않게" 하면서, 동시에 "단지 전통을 묵묵히 고수하여 제자리에서 맴돌고 마는 행태"인 중체서용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했다.
리쩌허우는 전화적 창조의 과정이 "일원성과 다원성의 조화, 과거와 현대의 접목, 중국과 서구의 절충 등의 요소를 함께 내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형식의 구현은 "매우 지난하고 모순된 과정을 통과해야 하며, 급진적인 혁명을 기대하는 자들의 신속성과 파격성을 방어하면서 사안을 점진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그가 문화열의 급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안정과 점진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제시한 전화적 창조는 이후 4단계 현대화론으로 구체화되며 중국 현대화의 경로에 대한 그의 확고한 입장을 제시하는 기초가 되었다.
리쩌허우에게 중체서용론은 봉건성을 뜻했다.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결과적으로 체제의 안정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체서용을 외쳤던 태평천국운동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전개된 초기 중국 사회주의 운동에까지 중체서용이 가진 문제는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중체가 바뀌지 않아서 서용하려고 하는 민주주의나 과학적 방법론이 봉건성에 묻혀 버린 것이다. 또한 '전반서화'론 역시도 문제가 있었다. 전반서화의 경우 중국의 근대에서 현대까지 단순한 모방을 추구하여 중국의 현실 속에서 성공에 이를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후스나 오쯔후이와 같은 학자들이 서양을 모방하자고 하면서 전체적인 서양화를 추구했지만 이것을 알고 따르는 사람이 적어서 실패했다. 리쩌허우가 보기에 중체서용파나 전반서화파 모두 근대시기의 봉겅제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서체중용론에서는 "신문화운동 이래로 캉유웨이, 옌푸, 천두슈, 후스 등의 서구화론자는 보편성을 강조해왔고, 장타이옌에서 량수밍에 이르는 국수파는 특수성을 강조해왔다. 일파는 전반서화를 추구했고, 다른 일파는 중체서용을 강조했다. 두 파가 각기 지니고 있는 일면성을 제거해야만 진리는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서체중용이다"라고 주장했다. 서체중용이란 전반서화의 보편성과 중체성의 특수성을 창조적으로 결합한 것이었고, 전반서화와 중체서용이 지니고 있는 일면서을 제거하는데 의미가 있었다. 한마디로 서체중용이란 중국의 체제가 아니라 서양의 체제인 과학과 민주주의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체이고 이것을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용인데, 용을 중국식으로 하자고 하는 제안이었다.
리쩌허우가 보기에는 중국에 근대화가 필요했고, 근대화는 사회본체, 소생산의 경제기초, 생산양식을 변혁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봉건성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체를 기준으로 중체를 바꾸어야 했다. 그것은 사상적 이데올리기를 포함해서 근본적인 경제기초와 생산양식도 모두 서체로 바꾸는 것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는 현대의 대공업생산 발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서체의 근본적인 틀을 이루는 것은 서구로부터 시작되고 유래된 현대적 대공업의 생산양식과 과학기술 그리고 경영제도였다. 따라서 "서체의 근본토태인 현대공업과 과학기술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자아의식과 심리본체는 서체의 물질적 토대를 유지하고 추진하고 유발하기도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서체가 이런 방식으로 경제구조와 공업생산구조 위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생산되는 것이라면 이제 '중용'은 중국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했다. 리쩌허우는 캉유웨이로 대표되는 개량주의를 '전화적 창조(轉化的 創造)'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했는데, 이는 그의 서체중용의 방법이 중국 현실에서 더욱 구체화되어 드러난 결과였다. 전화적 창조는 과거의 형식 위에서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점차 새로운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헌 병에 새 술을 담고, 과거에 기대 새것을 세우고, 진부한 것을 미루어 새것을 도출하고, 낡은 형식을 점차적으로 새로운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로 설명되었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체'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서구의 '용'을 활용하여 새로운 '체'를 창조하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전화적 창조과정
이 전화적 창조의 과정은 곧 서체중용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론의 핵심을 이룬다. 이는 "낡은 형식을 잘 이용하고 돌다리를 두드리면서 강을 건너는 것과 같이 낡은 몸에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는 것을 말한다." 리쩌허우는 중국의 봉건적인 심층 문화 심리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음을 인정하고, 이 낡은 몸을 무시하고서는 새로운 근대적 체계를 이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서체중용은 "낡은 형식을 점차적으로 새로운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통해 점진적으로 근대화의 목표에 도달하려 했다. 이는 급진주의자들이 원하는 신속성과 파격성을 경계하며, 사회의 안정과 조화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노선이었다.
이러한 전화적 창조의 방법 덕분에 서체중용은 두 가지 극단적인 사조를 피할 수 있었다. 첫째, 서체중용은 "중체서용과 같이 단지 전통을 묵묵히 고수하여 제자리에서 맴돌고 마는 행태에 빠지지 않았다." 중체서용은 서구 문물을 기술적으로만 도입하려 했을 뿐, 중국 봉건 사회의 본질적인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리쩌허우는 보았다. 둘째, 서체중용은 "무조건 서양이 좋다고 몽땅 가져다가 베끼는 전반서화의 길로 기울지도 않게 된다." 전반서화는 중국의 현실과 전통을 무시하고 서구적 가치를 기계적으로 모방하여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체중용은 일원성과 다원성의 조화, 과거와 현대의 접목, 중국과 서구의 절충 등의 요소를 함께 내포하는 복합적인 방법론이었다. 그는 "수천 년간 중국을 견인해 온 봉건적 전통의 실체를 직시"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러한 문화를 명확히 인식하고 "수준 높은 이론으로 끌어올려 이러한 문화를 재해석하고 병폐를 보충하는 일"이 전화적 창조의 토대를 마련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이로써 리쩌허우는 중국의 근대화가 서구의 선진적 문명을 흡수하면서도 중국 특유의 심층적인 문화를 개조하고 보완하는 지난한 과정임을 명확히 제시했다.
리쩌허우는 청년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고 중년 시절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점차 중국의 혁명을 고취하는 문화급진주의 자체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그는 문화 급진주의가 "빠른 시간 내에 모든 것을 혁명의 방식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신앙 체계"였으며, 그 경로가 "문화적 선동주의와 대중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이 중국의 현실"이었음을 통찰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1997년 ‘고별혁명’을 펴내며 문화 급진주의와 결별하는 사상적 노선을 공식화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폭력 혁명의 무용성을 역설하고, 안정 속 개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고별혁명’에서 "문화대혁명 이후로 나는 캉유웨이를 점점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자신의 개량주의적 관점을 밝혔다. 그는 "캉유웨이가 선택한 것은 영국식 개량주의의 방식이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폭력혁명을 피하고 사회에 상대적인 안정과 조화를 유지해 줌으로써 대규모의 파괴와 심한 기복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리쩌허우는 급진적인 혁명 대신 안정과 점진적 변화를 통해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확고한 의지를 피력했다. 이 개량주의는 곧 서체중용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인 전화적 창조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전화적 창조의 방법에 입각하여, 그는 중국의 현대화를 4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 4단계론은 경제발전-개인주의-사회정의-정치민주로 대표되는 사회발전론이다. 그는 1999년의 저작 ‘기묘오설’에서 이 네 가지 측면을 "역사적 단계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경중과 완급, 선후와 순서로 나눌 수 있는 과제이자 작업이며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명확히 밝혔다. 즉, 4단계론은 기계적인 역사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현실에서 무엇이 가장 시급하고 무거운 주제인가를 논하는 방법론적 우선순위를 제시한 것이다.
리쩌허우는 이 4단계론에서 경제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정치민주화를 최후의 과제로 설정했다. 이러한 설정은 90년대 당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 그중에서도 남순강화 이후 유지된 경제발전 우선 정책과 정치민주화에 대한 침묵 기조와 흐름을 같이 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적 설정이 사회정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던 신좌파이론이나, 정치민주화와 시장경제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던 신자유주의와 구별된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는 덩샤오핑이 제창했던 선부론(先富論)마저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상이 중국 현 정부의 정책 기조와 거의 유사한 메시지를 풍기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다.
리쩌허우의 4단계론은 90년대 당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 특히 남순강화 이후 유지된 경제발전 우선 정책과 정치민주화에 대한 침묵 기조와 흐름을 같이하면서, 당시 중국 사회가 당면했던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남겼다. 90년대 주요 담론은 "인문정신 담론... 신좌파 담론과 신자유주의 담론으로 파생되어갔다." 인문정신 담론은 시장경제와 대중문화의 타락을 고발했고, 신좌파는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지적했으며, 신자유주의는 자유와 민주의 결여 현상을 끊임없이 조명했다. 이에 반해 리쩌허우의 사상은 "주로 문화급진주의에 대한 반성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그의 방법적 설정은 사회정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던 신좌파이론과 구별되고, 정치민주화와 시장경제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던 신자유주의와도 거리를 두었다. 그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정치민주화를 가장 나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의 사상에는 몇 가지 이론적 한계와 모순이 남았다. 그는 "경제발전 우선정책이 가져오는 여러 부정적 현상들, 예를 들면 계층의 양극화, 지역 간의 격차, 정신문화의 황폐 등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 리쩌허우는 "정치민주화를 늦춤으로써 나타나는 사회 전반의 병리현상과 개인자유에 대한 현실적 퇴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논의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그가 비판받을 수 있는 대목들이다." 그의 이론은 한층 더 나아가 덩샤오핑이 제창했던 선부론마저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90년대 이후 중국 현 정부의 정책기조와 거의 유사한 메시지를 풍기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내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는 그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보다 현실 참여적인 실용주의를 우선했음을 시사한다.
비록 그의 사상이 시대의 변화에 호응하면서 변천을 거듭하는 가운데 이론적 한계와 모순을 노출시키기도 하였지만,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자 했던 그의 학문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는 중국의 봉건성과 현대성의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했으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사유 속에서 서체중용의 모델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기계적인 역사법칙을 거부하고 중국의 현실에 기반한 점진적 현대화의 경로를 탐색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리쩌허우의 사상적 편력은 중국 근현대사 100년의 지적 고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유물론적 토대 위에서 서구의 근대 문명을 중국의 본체로 삼으려 했던 서체중용론을 제시함으로써, 중국의 근대화 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은 급진적인 혁명 대신 안정적인 개량의 길을 통해 국민의 생활과 국가의 발전을 이루고자 한 지식인의 절박한 염원을 담고 있다. 그가 남긴 4단계 현대화론은 경제 발전 우선의 실용주의적 관점을 취하면서,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을 소홀히 했다는 숙제를 남겼다. 특히 사회 정의와 정치 민주화를 뒤로 미루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중국의 전통과 근대,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화해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의 철학적 유산은 중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오늘날까지도 중국적 특수성 속의 보편적 가치를 논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속에서 만들어진 미와 개인의 주관에서 만들어진 미감 사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하는지를 알려준다. 오늘 살펴본 리쩌허우의 철학의 핵심은 결국 미의 생성이 어디서부터인가라는 것이다. 이미 가지고 태어나는가 아니면 태어나서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반대되는 것은 사회가 인간의 고유성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유주의가 된다. 이 부분이 미학에서 부딪히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이면서도 사회제도와 정치 그리고 경제적인 영역도 함께 맞물려 가는 부분이다. 이렇게 해서 11주간의 중국현대철학이 끝을 맺었다. 개인적으로 정말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제 캉유웨이부터 시작해서 리쩌허우까지 그들의 철학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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