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기독교연구원 니버읽기 2강_도덕적 인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전통적인 신학의 틀을 벗어나 정치적 윤리학의 관점에서 집필된 파격적인 사회비평서다. 니버는 삼위일체나 성육신 같은 교리적 주제 대신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의 역학 관계를 낱낱이 파헤친다. 리처드 니버가 지적했듯이 이 책은 전형적인 신학자의 저술이라기보다 현실 정치의 실체를 분석한 사회학적 통찰에 가깝다. 니버는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산상설교의 예수 윤리나 바울의 성화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독특한 행보를 보인다. 이는 기독교 윤리학이 가졌던 관념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실질적인 사회 작동 원리를 규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쩌면 미국신학의 특징인 '현실과 조우하는 신학'의 면모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모습이 이러한 접근법에서도 드러난다.
니버의 사상적 여정은 정치적 윤리학에서
출발하여 점차 신학적 정치윤리로
심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신학이 어떻게 현실 정치와 치열하게 조우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는데, 이 부분이 니체를 읽으면서 얻게 되는 묘미이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존경하는 교수님이 '정치학'공부를 시작할 때 니버가 쓴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을 읽고 마음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생각한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이제와서 니버를 공부해보니 과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학으로서 니버의 신학과 윤리학은 매우 중요한 도전이자 방향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니버는 도덕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이 가졌던 소박한 낙관주의를 거부하고 인간 실존의 어두운 면을 직시한다. 결과적으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일반적인 기독교인이 평범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교체하려는 비평적 시도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니버의 책은 기독교가 세상을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사회 전략을 제시하는 선언문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으로서 '세계관 운동'과 니버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니버는 기독교 세계관이 흔히 주장하는 '문화 변혁론'이나 '사회 개혁론'이 지나치게 관념적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동대학교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구호가 현실에서 얼마나 허공에 메아리치는 외침이 되기 쉬운지를 냉철하게 지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교수님은 한동대학교에서 국제정치를 가르치셨고 결국 국회의원이 되셨다.
니버의 저작을 읽다보면 한국 교회가 외쳤던 수많은 변혁의 구호들이 실제로는 세상을 바꾸기보다 교회를 세속화시켰다는 사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니버는 또한 제임스 헌터의 논의를 빌려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가 마주한 아이러니와 비극적 상황을 깊이 있게 통찰한다. 니버는 사회적 진보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유지하지만 결코 신앙적 도피주의나 정적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사회의 내적 작동 원리를 해명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사이의 복잡한 대립과 갈등을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낙관주의적 진보관이 가진 허구성을 폭로하고 인간 본성에 내재된 이기심의 위력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니버는 기독교적 현실주의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며 독자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부여하기 때문에 아프게 읽고, 깨어나면서 읽기를 해야 한다. 오늘은 조금 더 니버의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니버는 개인의 도덕적 능력과 사회 집단의 이기적 본성이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를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 개인 차원에서는 양심과 이타주의가 작동할 수 있지만 집단이라는 틀 안에서는 이기심이 지배적인 동력이 된다. 그는 개인을 도덕적 존재로, 사회를 비도덕적 집단으로 대조시키는 도식을 통해 정치적 현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비록 니버 스스로 훗날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에 대해 후회하기도 했으나 그 핵심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집단 속에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집단적 자아는 개인보다 훨씬 무자비해진다. 국가나 계급 같은 집단은 개인을 능가하는 거만함과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
개인 사이의 관계는 어느 정도 도덕적 원리가 통용될 수 있으나 집단 간의 관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이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이기심이 집단적 힘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니버는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 집단에서 복잡한 요인들과 결합하여 강력한 구조적 악을 형성한다고 본다. 결국 개인의 도덕적 수양만으로는 거대 집단의 비윤리적 행동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분석은 사회를 단순히 개인의 총합으로 보는 기능주의적 관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기능주의 사회관은 개개인이 선해지면 사회 전체도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니버는 사회가 개인을 초월하여 작동하는 '초인격적 구조(super-personal structure)'임을 강조한다. 사회 시스템은 개별 인격체의 선한 의지를 압도하며 독자적인 힘의 체계를 가지고 움직이는 실체다.
도덕적인 개인이 사회의 각 영역에서
활동하더라도 사회의 고착화된 시스템은
쉽게 변화되지 않는 법이다.
사회는 계급과 계층 사이, 그리고 조직과 조직 사이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힘의 갈등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진정한 사회 변화는 개인의 내면적 변화를 넘어 구조적 악을 제거하고 시스템을 혁신하는 데서 온다. 교회 성장이 사회의 도덕적 개선으로 곧장 연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니버가 보기에 일종의 환상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관통하는 지배적 권력의 실체를 분석하고 이를 구조적으로 견제하는 정치적 지혜를 가져야 한다. 사회는 개인들의 기능적 조화로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권력 관계의 긴장 속에서 지탱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전통적인 교회의 사회 전략은 주로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 복음화라는 기능주의적 논리에 의존해 왔다. 복음 전도가 최상의 사회 변화 수단이라는 믿음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있어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다.
니버는 개인의 도덕적 노력이 사회 집단의 도덕적 선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지적한다. 그는 사랑의 윤리가 사회 정의라는 도구를 통하지 않고는 현실 속에서 육화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해질 수 있지만 정의 없는 사랑은 힘의 세계에서 무기력한 감상주의로 전락하기 쉽다. 니버는 개인적 도덕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결코 비관주의로 침잠하는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오히려 이는 인간의 죄성을 직시함으로써 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정의의 해법을 모색하려는 태도다. 사회 집단 간의 관계는 윤리적 설득보다는 정치적 투쟁과 권력의 균형을 통해 조율되는 영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도덕적 순결주의에만 머물지 말고 복잡한 정치적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책임을 다해야 한다. 결국 개인과 사회의 긴장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사회 윤리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 되는 셈이다.
니버는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교육가들과 자유주의적 종교인들의 낙관적 사고가 지닌 맹점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이성의 힘과 교육의 효과를 지나치게 신뢰하여 사회 문제를 단순히 무지의 소산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인간 집단의 도덕적 무능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뿌리 깊은 이기심에 기인한다. 중산층 문화는 현대 사회의 갈등 구조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채 비현실적인 해결책만을 내놓고 있다.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사회적 갈등이 선의의 증가만으로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집단 간의 관계는 도덕적 훈계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계산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사회적 각성이 갈등의 야만성을 다소 완화할 수는 있겠으나 갈등의 뿌리 자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니버는 인간 집단의 행동이 가진 야수적 성격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힘을 직시할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이해관계의 노예가 된 인간들에게는 때로 힘에 대해 힘으로 맞서는 현실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냉철한 분석이야말로 위선적인 도덕주의를 걷어내고 진정한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기독교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완전주의(perfectionism)' 논리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많은 신앙인은 하나님의 절대적 정의와 예수의 완전한 사랑을 현실 정치에 그대로 대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절대주의적 태도는 상대적 가치들이 충돌하는 현실 세계에서 배타적이고 이원론적인 도식을 낳는다. 선과 악, 빛과 어둠으로 세상을 극단적으로 나누는 방식은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니버는 도덕적 순결주의에 집착하는 윤리를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관념적인 '이상주의'라고 규정한다. 현실주의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힘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태도다. 이는 도덕적 규범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이익과 권력욕을 분석의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하는 것이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천상의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지상의 흙탕물 묻은 정치적 결단을 회피하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개인적 명령이 국가 간의 외교나 정책 결정에서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이상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실질적인 책임 의식을 고취한다. 니버가 현실주의를 강조하는 근본적인 배경에는 인간 사회에서 도덕적 이상이 온전히 실현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완전한 사랑의 실천은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고귀한 목표가 되지만 집단 간의 갈등 속에서는 무력한 경우가 많다. 현실 사회에서는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때로는 폭력이 불가피하거나 강제력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니버를 비관주의자로 보이게 할 수 있지만 이는 사실 가장 치열한 책임론이다. 그는 사회 정의와 진보에 대해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적 정의' 혹은 '근사치의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
완전한 정의가 도래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의 불의를 방치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 현실주의는 도덕과 정치, 사랑과 정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최선의 길을 모색한다. 정치적 결단은 언제나 타협을 수반하며 그 과정에서 도덕적 순수성을 잃을 위험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니버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더 나은 정책과 제도를 선택하는 것이 신앙의 의무라고 본다. 결국 현실주의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신앙적 결단으로 메우려는 적극적인 참여의 윤리인 것이다. 니버의 현실주의를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은 이상주의와 도덕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적 관점이다. 그는 관념적인 이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구체적인 정치적 현장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도덕적 현실주의 (Moral Realism)
도덕적 현실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한계와 이기심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태도다.
니버는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일 수 있지만, 집단 속에서는 자기 보존 본능과 이기심이 증폭된다고 보았다.
도덕적 현실주의자는 인간이 항상 선한 의도로만 행동할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를 거부한다. 대신 인간 본성에 내재된 '죄'의 영향력을 인정하며, 도덕적 이상이 현실에서 왜곡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이는 도덕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의 악성을 계산에 넣는 지혜를 의미한다.
결국 도덕적 현실주의는 이상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인간 실존의 모순을 드러내는 기초가 된다.
정치적 현실주의 (Political Realism)
정치적 현실주의는 사회적 정의가 도덕적 훈계가 아닌 '권력의 균형'을 통해 실현된다고 믿는 입장이다.
니버는 집단 간의 갈등은 결코 순수한 이성이나 사랑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힘의 역관계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현실주의자는 사회 구조 속에 숨겨진 지배 권력의 실체를 분석하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강제력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는 단순한 권력 정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정의를 세우기 위해 '최선' 대신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정치의 비극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는 도덕주의자들이 정치를 단순화하는 것을 비판하며,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전략적 사고를 강조한다.
따라서 정치적 현실주의는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고 이를 정의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책임 윤리로 귀결된다.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
기독교 현실주의는 위의 두 관점을 신앙적 차원에서 통합하여 역사와 정치에 참여하는 태도다.
기독교 현실주의자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Agape)을 궁극적 기준으로 삼되, 그것이 역사 속에서는 항상 정의(Justice)라는 형태로 굴절되어 나타남을 인정한다.
니버는 기독교인들이 흔히 빠지는 '완전주의'나 '도피주의'를 경계하며, 죄 많은 세상 속에서 '근사치의 정의'를 실현할 것을 촉구한다.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기독교 현실주의는 자신의 의로움을 절대화하지 않는 겸손함을 본질로 한다.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와 비극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십자가의 초월적 소망을 품으며 현실의 책임을 다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현실주의는 하늘의 소망을 두되 땅의 진흙탕 싸움을 피하지 않는 역동적인 신앙의 실천이다.
이상주의자들이 보편적 규범에만 집착할 때 현실주의자는 그 규범에 저항하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힘을 고려한다. 도덕주의는 개인의 인격이 성숙해지면 사회 문제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안일한 사고에 머물러 있다. 니버는 이러한 태도가 사회 구조 속에 숨겨진 거대한 악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낭만주의나 평화주의 역시 인간 사회의 갈등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완전주의적 태도는 도덕적 순결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사회적 불의를 막아내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 니버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통해 권력의 균형이 정의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버팀목임을 역설한다. 인간은 도덕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권력을 지향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참된 정치가 시작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기독교인이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는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니버의 현실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교만을
꺾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겸허히 서게 만드는 장치다.
인간은 자신이 역사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니버는 자신의 저작 '기독교 현실주의와 정치 문제'를 통해 정치적 결단의 비극성과 책임을 동시에 강조했다. 그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제약 조건들을 명확히 계산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요구한다. 사회 정의의 실현은 단순한 설교나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며 기독교인의 사명이다. 니버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로워야 함'을 현실주의적 언어로 풀어냈다.
그는 순진한 낙관주의가 가져올 참혹한 실패를 경계하며 동시에 냉소적인 운명론으로 흐르는 것도 거부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할 자리를 마련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신앙적 회의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신앙적 성찰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지혜다.
니버의 역사관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아이러니(irony)'는 인간 행위의 결과가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나는 역설을 뜻한다. 인간은 대개 선한 의도와 도덕적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할 때가 많다. 이는 인간이 죄의 본성으로 인해 자신의 도덕적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지가 가져온 파괴적 결과를 통제하지 못한다. 이 부분을 들으니 조금 지났지만 슬라보예 지젝이 한국에 와서 강연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위험할까? 아니면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아는 것이 위험할까? 지젝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는 것을 진정으로 위험한 것으로 본다. 자신이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할 수 있다고 보는 것들이 실은 절대로 책임질 수 없는 것들인 것이다. 인간은 지금도 그 수 많은 핵무기들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남은 재료를 재처리하는 것도 잘 관리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환경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인간은 서로 소유할 수 없다, 이렇듯 수 많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수록 인간의 한계와 죄성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자신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니버는 아이러니를 말하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인간의 영적 교만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파멸로 드러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자유와 정의를 외치던 현대 국가들이 결과적으로 권력의 횡포를 부리는 모습은 대표적인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니버는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해 이러한 인간적 한계가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분석했다. 선한 의지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역사는 인간의 뜻대로 흘러가는 순탄한 과정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반전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확신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니버가 말하는 기독교 현실주의는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조건을 이해하고 섣불리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을 멈추고, 현실적인 결정이 어떤 영향력을 만들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 말이다.
아이러니와 더불어 니버가 강조하는 '비극(tragedy)'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선과 선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의미한다.
인간 사회에서 도덕적 가치들은 서로 충돌하며 어떤 선택을 하든 일정한 책임과 파괴를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 결단은 순수한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언제나 차악(次惡)을 선택해야 하는 비극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무죄를 증명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다. 정치는 타협과 강제력의 사용을 전제로 하기에 완전한 도덕적 순수성을 유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은 인간이 역사와 정치 속에서 마주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니버는 인간의 죄와 유한성이 선한 선택조차 죄의 그림자 아래 놓이게 한다고 분석한다. 그는 이러한 비극적 현실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니버가 보기에 역사의 비극은 인간의 힘으로 온전히 해결될 수 없으며 오직 초월적인 소망 안에서만 견뎌낼 수 있다. 정치의 영역에서 완전한 의인이 되고자 하는 시도는 오히려 더 큰 독재와 불의를 낳는 비극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물론 이 부분은 내가 좋아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관점과 많이 다르다. 변혁주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니버가 바라보는 ’현실주의’가 오히려 현실의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게 재단하는 것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
니버는 아이러니와 비극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심도 있게 고찰한 사상가다. 그의 저작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는 인간의 유한성이 어떻게 역사적 아이러니를 초래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지만 동시에 피조물로서 죄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 지위는 필연적으로 역사 속에서 긴장과 모순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정치적 선택의 비극성은 우리가 최선이라고 믿었던 가치가 다른 가치를 훼손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니버는 이러한 비극적 현실을 무시한 채 낙관주의적 진보만을 외치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했다. 그는 아이러니와 비극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이유를 신앙적 소망에서 찾는다. 십자가는 역사의 모든 비극과 아이러니가 집약된 사건이자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 희망의 상징이다. 그리스도인은 비극적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구하며 상대적인 정의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역사의 끝에서 이루어질 온전한 화해를 소망하며 현실의 고통스러운 결단을 묵묵히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 니버가 말하는 아이러니와 비극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에 있어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선한 사업이 항상 선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순진한 낙관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대신에 우리의 행위 뒤에 숨어 있는 이기심과 교만의 흔적을 끊임없이 살피는 영적 민감함이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아이러니는 인간이 결코 신의 자리에 앉을 수 없음을 가르쳐주는 경고의 메시지다. 비극적인 선택의 순간에도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가장 덜 나쁜 길을 찾아야 한다. 니버는 이러한 역사 인식을 통해 기독교인이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고 오히려 더 진지한 참여를 독려한다. 역사의 모순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과오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자신에 대해 엄격해질 수 있다. 아이러니와 비극을 통과한 신앙은 훨씬 더 단단하고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여 세상을 견디게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보이는 세상의 불의와 싸우는 자들의 숙명적인 삶의 방식이다. 니버의 역사관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복잡한 정치적 지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니버의 사회윤리에서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는 윤리적 주체인 '행위자'와 그를 둘러싼 '사회 구조' 중 무엇이 더 결정적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개인을 양심과 성찰 능력을 갖춘 존재로 보지만 사회 집단은 권력과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실체로 규정한다. 개인은 자기 초월과 이타주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있지만 국가는 계급 같은 집단은 자기 보존 본능이 우선시된다. 따라서 니버에 의하면 사회악은 단순히 개인들의 도덕적 결함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화된 힘의 논리에 의해 개인의 선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경향이 어디서나 발생하게 되어 있다. 계급이나 경제 시스템, 그리고 제국주의 같은 구조는 그 자체로 강력한 자기 강화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왕’을 세우도록 허락할 때 이미 예정된 제도와 시스템의 영속적인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도덕적인 설교나 개인의 회심만으로 거대한 구조적 악을 제거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 부분에서 한국교회는 대응책이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니버는 개인의 도덕성이 비도덕적 구조를 자동으로 정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렇기에 그는 사회 복음 운동가들의 낙관론을 비판하며 구조적 변혁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인간이 처한 사회적 여건과 권력 관계가 윤리적 실천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한다.
나는 그래서 결국 정치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브라함카이퍼가 생각했던 영역주권론의 관점에서 국가리더십과 사회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설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버를 단순한 '구조 결정론자'로 치부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절반만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는 구조의 위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투쟁하고 선택하는 행위자의 정치적 전략을 배제하지 않는다. 비도덕적인 경향이 강한 사회 집단 속에서도 인간은 권력의 균형을 맞추고 상대적 정의를 증진할 수 있다. 니버는 이성의 만능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사회 구조를 분석하고 조정하는 이성의 기능과 역할을 긍정한다. 사회의 개선은 완전한 도덕적 실현은 아닐지라도 현실적인 전략과 정치적 투쟁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구조에 갇힌 인간이 아니라 구조를 관통하며 그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행위자의 윤리를 말한다. 사랑의 윤리가 사회 정의라는 구조적 틀 안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윤리는 행위자의 결단과 구조의 변혁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해야 함을 보여준다. 사회악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행위자에게 더 정교하고 전략적인 정치적 지혜를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결국 니버의 사상은 개인의 내면적 덕성과 사회 시스템의 공의가 만나는 지점에서 그 빛을 발한다.
니버는 사회 집단 간의 관계가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다.
곧,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정의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사회 정의는 강자가 약자를 동정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실현된다. 도덕적 행위자가 구조적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조직된 힘과 정치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니버는 기독교인들이 정치를 도덕의 하위 범주로만 보지 말고 독자적인 힘의 영역으로 인정할 것을 촉구한다. 구조적 악에 대항하는 행위자의 윤리는 때로 거칠고 타협적인 정치적 결단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는 자유주의적 도덕주의자들이 흔히 범하는 '정치에 대한 도덕적 단순화'를 가장 경계했던 학자다. 사회 구조는 권력의 역학 관계에 의해 형성되기에 이를 변화시키려면 권력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자는 자신의 도덕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보다 구조적 정의를 위해 기꺼이 손을 더럽히는 책임을 져야 한다. 니버가 주장하는 사회윤리는 이처럼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인 채 구조와 행위자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 진정한 정의는 이러한 역동적인 정치적 과정 속에서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니버의 사회윤리는 인간 사회의 비도덕적인 경향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가능한 최선의 선을 추구한다. 그는 구조적 악이 가진 거대한 파괴력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소박한 낙관주의에서 깨어나게 한다. 동시에 행위자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여 우리가 냉소적인 방관자로 남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집단적 이기주의를 완전히 이길 수는 없지만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은 된다. 사회 구조를 변혁하려는 노력은 개인의 윤리적 결단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된 결과여야 한다. 니버는 사랑과 정의, 이성과 힘, 개인과 집단 사이의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를 치열하게 사유했다. 그의 윤리학은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의 정의를 일궈내려는 실천적 의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구조 속에 있으나 구조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며 이 땅의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 이러한 행위자 중심의 구조적 변혁론이야말로 니버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유산이다. 사회는 비도덕적일지라도 그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현실주의적 지혜로 무장하여 정의를 향한 행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니버의 현실주의 관점은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상의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 지극히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우리는 그동안 아이러니와 비극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읽어내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제임스 헌터의 '신실한 현존'이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니버적 긴장감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단순히 세상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 구조를 직시하며 그 안에서 신앙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외치는 수많은 구호가 실제로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종교적으로 포장한 것은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한다. 개인은 도덕적일지라도 교단이나 교회라는 집단은 얼마든지 비도덕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니버는 우리에게 도덕적 교만을 버리고 역사의 복잡성 앞에서 겸손해질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이는 무책임한 회피가 아니라 현실의 한계 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물이다. 십자가의 신앙은 역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통과하면서도 부활의 초월적 소망을 놓지 않는 용기를 주는 힘이다. 결론적으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보이는 세상의 정의를 일구라고 명령한다. 완전한 정의가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박한 낙관론을 버리고 '근사치의 정의'를 위해 매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영성 훈련이 사회적 정의 실현과 분리되지 않도록 구조적 안목을 기르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랑이 정의를 통해 육화되고 정의가 사랑에 의해
견제받는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니버의 통찰은 우리가 마주한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이고도 깊이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이제 우리는 냉소주의나 낙관주의라는 양극단을 피하고 기독교 현실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와 비극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정의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는 여전히 비도덕적인 경향을 띠겠지만 그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이 있기에 소망은 있다. 니버가 던진 이 무거운 질문들을 가슴에 품고 현실의 현장에서 책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아가려고 한다. 니버의 말과 카이퍼의 말을 적절히 섞어 가면서 이상을 실현하는 구조와 개인의 행위를 모두 바꾸는 낭만주의자로 말이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럼 해보는 거다. 그게 니버가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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