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독교연구원_라인홀트 니버 3강
수능공부를 하면서 배웠던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를 다시 보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으로 태어나지만, 사회 속으로 들어가면 이기적이 된다는 정도만 배우게 된다. 그런데 오늘 라인홀트 니버의 제자인 존베넷은 오히려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인간이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죄로 인해서 원래 악했고, 그 악한 인간들이 모이니깐 더 악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니버는 니체랑 비슷하게 인간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러한 인간의 부정적인 부분에서 출발점을 찾는 니버는 말그대로 ’기독교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악’을 인정하고 기독교가 어떻게 현실정치에 뛰어 들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바로 니버이다. 니버는 명백하게 자유주의적 낙관주의를 배격한다.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봐야 결국 죄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 부분을 더 알아보려고 한다. 쉽다고 생각했는데, 고민할 지점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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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베넷에 따르면 니버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자유주의 기독교 내의 낙관적 이상주의와 사회과학자들의 이성적 낙관론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었다. 1932년 당시 미국은 대공황을 겪고 있었고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등 역사의 어두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도덕적 설득과 교육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진보에 대한 신앙에 빠져 있었다. 니버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간 자아의 구조 속에 스며든 집단적 악의 뿌리와 자아의 유한성, 불안성에서 나오는 수세적 경향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애국심이 개인의 희생 정신을 국가적인 이기심으로 변화시키는 역설에 주목하며 집단적 악의 실체를 폭로하고자 했다.
이 책의 제목은 실제로는 '비도덕적인 인간과 좀 더 비도덕적인 사회'에 관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개인으로서도 이미 죄성을 지닌 존재임을 시사했다. 니버는 교육과 기술적 정복이 늘어나면 도덕적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이상주의적 생각을 거부하며 신정통주의적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신학을 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그의 현실주의는 지나친 도덕주의나 이상주의를 비판하면서 태동한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니버가 말하는 현실주의는 사회의 변화와 갈등을 분석할 때 그 원인이 되는 정치적, 경제적 힘과 이해관계라는 사실적인 요인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현실주의의 이면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배경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그는 근대의 관념론과 낭만주의가 각각 인간 본성의 한 측면만을 과도하게 강조했다고 보았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관념론은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자연적 충동을 과소평가한 반면, 낭만주의는 생명력을 강조하며 도덕적 책임의 차원을 약화시켰다. 니버는 이 두 조류가 모두 도덕적 낙관론에 빠져 인간 본성에 내재한 '죄성'이라는 강력한 현실적 요소를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 인간론에 근거하여 인간 내면의 이기심이 사회적 갈등의 핵심적인 원인임을 강조하며 이상주의자들의 낙관적 사고를 강렬하게 비판했다. 결국 니버의 현실주의는 도덕적 감상주의와 냉소주의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고, 인간의 한계를 성찰하는 데서 출발한 지적 경로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니버의 책을 볼 때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먼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존재론부터 시작해서, 인간론으로 그리고 사회론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후반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의 관념론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를 이성으로 보았다고 앞서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인간은 이성으로 자연적 충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 이후 관념론 철학에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성은 자기초월 능력과 반성적 사고를 지니고 있어 자연의 생명력을 질서와 형식으로 변환시키는 원천이 된다고 인식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이성을 자연 질서의 참된 원리로 보았으나, 결과적으로 인간의 충동과 감정 요소를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성이 이끄는 대로만 행동하면 도덕적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당시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버는 이러한 합리주의적 접근이 인간의 실제적인 본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성은 때로 자아의 이기심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으며, 결코 독립적인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성은 분석의 힘을 가질 뿐이며, 도덕적 동력을 유발하는 것은 이성보다 깊은 층위의 종교적 차원이다. 니버는 이성을 과신하는 이상주의적 태도가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경고하였다. 결국 관념론이 강조한 이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도구에 불과하다. 반면 낭만주의는 인간 창조성의 원천을 이성이 아닌 자연적 본성과 생명력(vitality)에서 찾으려 노력하였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며 본능과 충동, 욕망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에게 이성은 오히려 인간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창조적 활동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낭만주의가 과도하게 자연성을 강조한 결과, 인간의 반성적 측면과 도덕적 책임에 대한 인식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니버는 관념론과 낭만주의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연주의적 특징을 띠며 도덕적 낙관론에 귀결되었다고 분석했다.
니버의 자유주의적 현실주의 liberal realism : 정의를 달성하는 일은 이상주의자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이익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냉소주의자에 의하여서도 이룩될 수 없다. 정의실현은 국가는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이기적일 것이라고 이해하면서도 우리가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우리 누구나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현실주의자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니버가 보기에 생명력이 그 자체로 발휘되기만 하면 완전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은 죄의 현실을 무시한 처사였다. 인간의 죄성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력 안에는 창조성뿐만 아니라 타자를 파괴하려는 강력한 권력욕이 공존하고 있다. 니버가 볼 때 이러한 생명력의 무절제한 분출은 사회적 갈등과 무질서의 핵심적인 원인이 된다. 낭만주의적 낙관론 또한 이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해결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니버는 기독교 인간론에 근거하여 인간 본성 깊숙이 자리 잡은 '죄성'(sinful nature)을 현실주의의 핵심 요인으로 천명했다. 인간은 자기초월적 이성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유한한 자연적 존재라는 긴장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유한성에서 비롯된 불안과 염려는 자아를 보호하려는 이기심과 권력욕으로 발현된다.
죄란 단순히 지성의 결핍이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가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다. 니버는 인간이 개인으로는 도덕적으로 출발할 수 있어도 문명과 집단 속에서 부패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원죄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을 인정하고, 자력으로 완벽한 사회를 건설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이기심은 인간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역사 전체를 관통하여 강력하게 작용하는 현실이다. 니버는 이러한 죄성을 간과하는 모든 형태의 도덕적 감상주의를 비판하며 현실주의의 기반을 다졌다. 따라서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죄를 인식하는 것은 사회 분석의 첫걸음이자 필수적인 요소이다.
니버가 강조한 현실주의 관점에서 비판했던 개념들
이상주의utopianism : 도덕적 이상주의(사회복음주의, 평화주의), 정치적 이상주의(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도덕주의moralism : 도덕적 인간이 되면 사회의 진보와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개념이며 교육주의자는 이런 측면에서 지성의 계몽을 말한다.
평화주의pacifism : 평화주의는 예수님의 완전한 윤리적 이상이자, 초월적인 사랑의 윤리가 현실에서 실현가능하다고 믿는 입장을 가진다. 여기에서 도덕적 완전주의가 있다.
사회복음 감상주의 : 니버가 보기에 도덕적 가르침으로 인간들이 계몽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회복음은 감상주의에 빠져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냉소주의 : 프롤레탈리아트의 혁명적 윤리는 냉소주의에 빠져 있다.
니버는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의 도덕성 사이에는 본질적이고도 극복하기 어려운 격차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거나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집단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 집단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비도덕적 속성을 지닌다. 집단 내부의 개인들이 가진 선한 의지는 집단의 이름으로 모일 때 종종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된다. 니버는 특히 애국심이 개인의 헌신을 국가적 차원의 이기적 욕망으로 바꾸어 놓는 역설적인 과정을 폭로했다. 집단은 개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충동과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제할 이성적 능력은 부족하다. 집단적 수준에서의 이기심은 조직화된 힘을 통해 타 집단을 억압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쓰인다. 이러한 집단의 비도덕적 실체는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요인이다. 니버는 이러한 집단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도덕주의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라고 보았다.
니버가 분석한 사회의 핵심적인 실체는 이해관계와 이기심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라는 조직적 집단이다. 국가는 단순히 가치 중립적인 법적 기구가 아니라, 자아를 보존하려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생동적인 실체이다. 니버는 국가를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로 내달리는 활력적인 움직임으로 파악하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국가라는 집단 안에서 권력욕과 교만은 가장 근본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며 모든 종류의 악을 산출한다. 그는 사회악의 출처를 단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계층, 권력, 경제적 이해관계와 같은 구체적 실체에서 찾았다. 국가는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현실주의의 핵심이다. 니버는 월터 윙크처럼 구조악을 영적인 '정사와 권세'로만 보지 않고 사회 정치적 대상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국가 간의 관계는 도덕적 호소보다는 권력의 균형과 견제를 통해 조율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국가는 개인의 무책임에 비하면 거대한 선일 수 있으나, 동시에 언제든 악으로 변할 수 있는 힘이다.
사회의 구조적 불의는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선의나 도덕적 교육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완고한 것이다. 니버는 사회가 이기심과 이해관계, 힘의 작용에 의해 움직이므로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억압받는 계층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악에 맞서 자기주장을 펼치고 실질적인 저항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저항은 때로 강압을 필요로 하며,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폭력조차 수반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집단은 그들의 특권에 대한 보상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니버는 자유와 평등, 질서 사이의 균형을 확립하기 위해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도덕적 설득은 개인 간에는 유효할지 몰라도 집단 간의 거대한 이권 다툼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구조악은 사회 속에 내재하여 영속적으로 유지되려는 경향을 가지기에 이를 타파하기 위한 힘이 요구된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사회의 비도덕적 실체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실효적인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은 현실의 완악한 불순종을 고려한 비극적 책임의 영역이다.
니버는 당시 기독교계를 지배하던 사회복음주의가 인간의 이기심을 과소평가하는 '감상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순진하게 실천하면 미국의 불의한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들은 도덕적 교훈과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정의롭게 계몽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오류를 범했다. 니버는 산업 현장에서의 목회 경험을 통해 사회복음이 말하는 평화로운 개혁의 피상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성은 단지 분석의 도구일 뿐이며, 거대한 사회적 악을 제어할 도덕적 힘을 직접 창출하지 못한다. 사회복음은 인간 본성의 깊은 죄성과 집단 이기주의의 위력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이상에만 몰두했다.
니버는 이러한 이상주의가 오히려 현실의 악을 방치하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사회복음이 추구하는 역사적 진보가 실제로는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사회복음주의의 낙관론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평화주의 또한 니버가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이상주의의 한 형태였으며, 그는 이를 '가장 위험한 유형'으로 불렀다. 평화주의자들은 예수의 완전한 사랑 윤리가 현실 정치 사회에서 즉각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 오류를 범한다. 이들은 세상을 죄로 물든 부패한 곳이 아니라 선남선녀와 성자들의 공간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톨스토이적 절대 평화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음으로써 악에 대한 저항 책임을 회피한다.
니버가 비판한 평화주의
톨스토이적 절대 평화주의 : 레프 톨스토이, 기독교 무정부주의자, 급진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이다. 산상수훈의 문자적 해석을 한다. 국가, 법, 군대, 폭력을 악으로 간주하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절대 평화주의를 말한다. 니버는 이에 대해서 역사적이고 권력, 집단 이기심을 과소평가했다고 본다. 폭력을 거부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존 권력질서의 폭력에 무임승차라고 생각한다. 악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바로 톨스토이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개신교의 도덕적 평화주의 : 사회복음의 평화주의자들, 미국 자유주의 개신교, 국제연맹에 낙관적 기대를 걸던 신학자들을 말한다. 이러한 평화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진보를 낙관한다. 교육이나 도덕개혁, 국제기구를 통해 전쟁 예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 종식을 믿는 것을 말한다. 이는 ‘도덕적 인간‘에서 가장 비판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니버가 보기에 가장 위험한 평화주의자이다. 개인의 도덕성을 집단의 도덕성으로 직접 확장한 사람들이다. 권력, 이해관계, 집단적 자기기만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들은 현실의 악을 도덕 설교로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제도적, 법적, 평화주의 : 국제연맹 이상주의자, 국제접 만능주의자들을 말한다. 집단안보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전쟁은 제도적 미비의 결과이고 법과 국제기구가 강화되면 전쟁은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제도는 권력에 의해 지탱된다. 강제력 없는 법은 도덕적 권력에 불과하다. 그러나 니버가 보기에 악한 권력은 제도를 악용하거나 무력화시킨다.
재세례파 평화주의 : 사실 니버가 타켓팅한 사람은 존 하워드 요더였다. 예수의 정치학 말이다. 재세례파는 하나님 나라와 세속 질서의 급격한 분리를 주장하면서 교회는 폭력과 무관해야 하며 세상 정치에 거리두기가 핵심이다. 니버는 이에 대해서 신앙의 순수함은 인정하지만 역사적 책임은 회피한다고 본다. 불의한 권력을 사실상 방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 간디는 샤트야그라하라는 진리의 힘과 아힘사를 믿는다. 개인적이고 집단적 자기희생을 통해 상대의 도덕적 각성을 촉발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 니버는 마냥 비판하지만은 않는다. 비폭력의 도덕적 힘과 정치적 효과는 인정했지만 상대가 도덕적 양심이 없는 경우에는 효과가 떨어진다. 그래서 비판적으로 힌두교의 종교적 금욕전통이므로 파시즘과 나치즘같은 모든 상황에 일반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간디의 비폭력은 영웅적이지만, 역사 전체에 적용될 보편적 정치윤리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니버가 보기에 이러한 태도는 기존 권력 질서의 폭력에 무임승차하며 불의를 방조하는 무책임한 결과로 이어진다. 간디의 비폭력은 개인적 차원에서 영웅적인 도덕성을 보여주지만, 파시즘 같은 보편적 정치 악에 대항하는 윤리가 되기엔 부족하다. 평화주의는 인간 본성의 죄성을 간과한 채 천사들의 세상에서나 통용될 법한 윤리를 역사에 강요한다. 정의가 담보되지 않은 평화는 단지 현상 유지를 위한 환상에 불과하며, 진정한 평화는 힘의 균형 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기독교 윤리의 비판적 기준으로 남아야지, 정치적 행동의 유일한 지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니버는 정치를 순수 윤리의 영역이 아닌 '비극적 책임 윤리'의 영역으로 정의하며 현실주의적 대안을 제시했다. 현실 정치는 절대적인 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자리이다. 인간은 역사의 비극을 피할 수 없으며, 모든 결정에는 죄의 대가가 따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의 산상설교 가르침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황금률이지만, 죄로 물든 세상에서 문자 그대로 실현하기는 불가능하다. 만약 산상수훈을 정치 프로그램으로 만든다면, 이는 악한 권력 앞에 선한 이들을 무방비로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도덕적 이상주의는 인간의 한계를 망각한 채 지상 낙원을 꿈꾸다 결국 도덕적 무력감이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니버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완악함을 고려하여 정의의 '근사치'를 달성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현실주의자는 자신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의 이기심을 견제하며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자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초월적 이상과 비극적 현실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며 역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감상주의와 냉소주의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고 사회 갈등의 사실적 요인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는 단순히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죄성과 집단적 한계를 인정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신학적 태도이다. 현실주의는 역사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경제적, 정치적 힘의 형태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데 주력한다. 니버는 모든 인간이 권력욕과 교만이라는 근본적인 죄를 공유하고 있음을 전제로 정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상주의자가 꿈꾸는 완전한 우애는 역사의 끝에서나 가능하며, 현실에서는 오직 정의의 실현만이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현실주의자는 국가의 이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가능한 최선의 선을 도출해내려는 책임을 가진다. 또한 도덕적 감상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도덕적 무정부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는 균형을 유지한다. 현실주의는 인간의 비도덕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참된 도덕적 실천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이는 지상에서 실현 불가능한 이상 대신 실효성 있는 정의를 선택하는 결단이다.
현실의 정치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기심이 충돌하는 장이므로, 절대적인 해결책보다는 '균형'과 '타협'이 핵심적인 가치가 된다. 니버는 자유와 평등, 질서와 가치 사이에서 효과적인 균형 상태를 확립하는 것이 정치의 위대한 과업이라고 보았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원칙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는 절충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집단 간의 이해관계는 결코 순수 도덕만으로 조율될 수 없으며, 힘의 작용에 의한 상호 견제가 필수적이다. 니버는 역사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일은 때로 불의한 악에 맞선 자기주장과 저항을 수반한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저항은 비타협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수 있으나, 불의한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한 책임의 발로이다. 정치는 깨끗한 손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가능성을 짊어지고 행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의 연속이다. 현실주의자는 완전한 선을 고집하다 정의를 놓치기보다, 불완전한 정의를 선택하여 더 큰 악을 막는 길을 택한다. 결국 균형과 타협은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자들만이 행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지혜이다.
기독교 현실주의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지상에서 정의의 '근사치'를
달성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는 것이다.
니버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이상이 역사 안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완전한 사랑이나 무조건적인 비폭력은 개별적인 인간 관계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집단 간의 관계에서는 정의로 치환되어야 한다. 정의는 죄로 물든 세상에서 사랑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형식이며, 이를 위해 법과 제도가 동원되어야 한다. 니버는 역사가 진보할수록 악의 위력도 커질 수 있음을 경고하며, 항상 깨어 있는 현실주의적 통찰을 요구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을 인정하는 죄론이 역설적으로 인간을 오만에서 해방시켜 참된 책임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현실주의 신학은 이상에 치우쳐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실에 매몰되어 이상을 잃어버리는 양극단을 거부한다. 우리는 어중간한 타협주의자들이 권세를 잡는 역사 속에서도 악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결국 기독교 현실주의는 역사의 불완전함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끈질긴 윤리적 분투라 할 수 있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현대 사회의 공공성과 진보를 논하는 이들에게 냉철한 관찰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우리는 사회적 적폐가 청산되고 역사가 선한 방향으로 진전되기를 희망하지만, 국가와 계층은 항상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진보 기독교나 공공신학이 추구하는 낙관론은 자칫 세상의 문화와 기독교적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공유함으로써 복음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할 위험이 있다. 역사는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낭만적 기대와 달리 종종 악이 승리하거나 어중간한 타협주의자들이 권세를 잡는 비극을 보여주기도 한다. 니버가 폭로한 중산층의 도덕적 신념 배후에 도사린 이기심과 재산권 보호 욕구는 오늘날의 사회 갈등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내면과 사회 구조에 광범위하게 지배하는 이기심의 위력을 직시하며 막연한 희망을 유보해야 한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움직여 갈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보다는 권력 관계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견제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니버의 사상은 우리가 선한 의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정의의 토대를 닦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니버는 우리에게 완전한 도덕적 실현이 불가능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비극적 책임을 요구한다. 인간 본성의 죄성을 강조하는 것이 도덕적 실천 의지의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지만, 이는 오히려 인간의 오만을 꺾고 겸허하게 정의에 헌신하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
우리는 평화주의를 기독교 윤리의 비판적 기준으로 삼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실에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힘의 균형이라는 정치적 수단이 필수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한 이상주의 공동체들이 역사 속에서 명멸해 갔으나 집단적 이기주의를 완전히 극복한 사례는 드물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니버의 사상은 오늘날 부조리한 정치 현실과 악한 지도자의 등장 앞에서도 우리가 절망하거나 냉소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정의의 근사치를 향해 나아가도록 독려한다. 역사는 언제나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예언자적 종교의 힘으로 불의에 맞서는 책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기독교 현실주의는 역사의 불완전함을 수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윤리적 분투를 의미한다. 나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이다. 이상은 하나님나라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바꿔가는 노력을 끊이지 않고 추구한다. 니버가 이야기하는 조언도 잘 들어보면서 세상에 좋은 제도를 만들고 즐거운 문화를 만들면서, 미래세대를 일으키는 일을 해야 한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을 넘어가는 일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