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독교연구원_니버 읽기_기독교윤리의 해석
벌써 20년도 넘었다! 니버를 읽게된 처음 시간이 말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현실주의 국제정치에서 니버의 입장을 배웠다. 국가를 단일행위자로 본자는 것과 힘의 균형 그리고 세력전이이론으로 국가산업이 전쟁 때 가장 많이 발전한다는 것 정도. 그런데 이번에 현대기독연구원에서 진행하는 니버 스터디에 참여하면서 다시 니버를 읽는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인 사회가 나오고 3년이 지난 후 출간된 기독교 윤리의 해석은 자신이 쓴 저서에 대한 주석에 가깝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가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윤리의 기본은 인간론이하는 것과 인간의 이기심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무엇을 선택해야하는지 등등. 이제와서 보니 정말 굵직한 질문들이 넘쳐난다. 오늘은 조금 더 정리를 해보았다. 마지막에는 나의 고민도 닮아보았다.
니버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윤리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완전히 다른 견해를 취한다. 예수님의 윤리는 예언자적 종교의 완벽한 결실이라고 본다. 니버는 계속해서 번역한다. (The ethic of Jesus is the perfect fruit of prophet religion) 예수님의 윤리는 사랑의 이상(ideal of love)이다. 예언적 종교의 하나님이 이 세상과 관계 맺듯이 예수의 윤리가 내세우는 사랑의 이상은 인간 경험의 사실들 및 필수 요소들과 관계 맺는다. 예수의 윤리는 모든 도덕적 경험을 근거로 삼으며 그것들과 관계된다. (Its ideal of love has the same relation to the facts and necessities of human experience as the God of prophetic faith has to the world. It is drawn from, and relation to, every moral experience.) 그 사랑의 이상은 예언자적 신앙의 하나님이 세상과 맺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인간 경험의 사실과 필연성에 대해 동일한 관계를 맺는다. 그것(예수윤리)은 모든 도덕적 경험에서 비롯되며, 모든 도덕적 경험과 관계를 맺는다.
니버가 볼 때, 예수의 윤리가 모든 자연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윤리와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이기심의 파괴력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예수의 윤리는 모든 인간의 삶이 지닌 즉자적인 도덕적 문제들(immediate moral problem)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서로 갈등하는 다양한 파벌들(various contending factions)과 힘들 간에 일종의 휴전 협정을 이끌어내는 문제들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현실주의가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과 같다. “예수의 윤리는 모든 인간 삶의 당면 과제인 도덕적 문제, 즉 서로 대립하는 여러 파벌과 세력 간의 휴전 협정을 마련하는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니버는 '예수님의 윤리는 비타협적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기독교현실주의가 존 하워드 요더와 같은 메노나이트를 비판할 때 쓰는 논리와도 동일하다.
예수님의 윤리는 휴전 협정을 이끌어내는 문제들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정치는 타협, 세력균형, 협상, 힘의 조정을 통해 갈등하는 세력간의 휴전 협정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예수의 윤리에는 ‘힘의 조절’이나 ‘이익의 배분’이나 ‘타협을 통한 질서 유지’를 말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 등 사랑 완전주의(love perfectionism)와 비타협적 급진적 사랑의 윤리를 말한다. 예수의 윤리는 이기심이 예정조화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무해하다고 간주하지 않으며 이성이 이기심의 혼란을 더 높은 차원의 조화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이기심은 무력하다고 간주하지 않고 이기심이 인간 실존의 기본 현실이라고 간주하지도 않는다. 이는 토마스홉스나 아담스미스의 이론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다.
예수의 윤리는 이기심이 예정조화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무해하다는 것은 사실 아담 스미스의 지론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기심이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스미스는 각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해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예정조화설에 의해) 사회 전체에 조화가 이루어진다. 라이프니츠는 보이지 않는 창없는 단자(monade)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은 그런 조화가 예정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신정론의 대답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이 세계는 신의 최선의 모습이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이를 경제학적으로 사용하여 보이지 않은 손을 말하게 된 것이다. 반면, 공리주의는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이성적 계산을 통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기심은 있지만 이성이 그것을 통제해 더 높은 조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말함으로써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 싸우는 이기적인 존재다. 이기심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나 예수의 윤리는 이 모든 지론을 거부한다.
예수의 윤리는 이기심을 정당화하지도, 합리화하지도, 체념하지도 않는다.
예수 윤리는 인간의 이기심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급진적 사랑의 윤리다.
“예수의 사랑의 윤리는 정치적, 사회적 윤리의 수평적인 지점들과 접점(연결점)을 이루지 않으며(성립시키지 않으며), 실용주의적인 개인 윤리(prudential individual ethic)가 도덕적 이성과 주어진 상황의 현실들 사이에 그리는 사선(斜線)(대각선)과도 접점(연결점)을 이루지 않는다. 예수의 윤리에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사이의 수직적 차원만이 있을 뿐이다” (It(Jesus’ love ethic) does not establish a connection with the horizontal points of a political or social ethic or with the diagonals which a prudential individual ethic draws between the moral ideal and the facts of a given situation. It has only a vertical dimension between the loving will of God and the will of man) 예수의 (절대 사랑의) 윤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 사이의 수직적 차원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수평적인 연결고리(connection)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절대적 이상의 윤리, 초월의 윤리와 수평적 차원의 상황적 사실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판단하는 윤리가 필요하다.
니버는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윤리를 찾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 이상적이과 완전하다. 그리고 그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시기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윤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점에서는 가능하다. 반대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윤리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 존재자체로 이미 신이면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 속에서는 윤리와 도덕이 이미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는 하나님을 아예 알지도 못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사회에서는 '정의'라는 가치가 '사랑'이라는 가치보다 우선한다. 정치에서는 '옳음'보다는 다수의 '좋음'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기도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들은 니버가 보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야기한 윤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할까? 여기에서 기독교현실주의가 시작된다.
여기서 한가지 원문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니버는 prudential individual ethic을 “도덕적 이상(moral ideal)과 주어진 상황의 사실들 사이에서 대각선을 설정하는 윤리”를 말한다. 예수 윤리가 강조하는 도덕적 이상은 완전한 절대주의 사랑윤리라면, 현실에서의 사회, 정치윤리는 이기적인 인간, 권력간의 갈등이라는 주어진 사실(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prudental 윤리는 여기서 우리는 수직적 차원의 예수의 윤리와 수평적 차원의 현실상황(제도, 권력, 이기심) 사이에서 어디까지 타협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판단하는 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윤리와 예수님의 윤리를 현실에서 적절히 조정하는 것에서 prudential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러니깐 '실용적이어야 윤리다'가 아니라 '조정하는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게 지난시간에 알아본 '책임윤리'와도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니버는 또한 예수님이 제시하는 윤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인간'을 전제로 한다고 해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인간이라면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들은 예수님의 윤리를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낸 윤리가 자연스럽게 비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인간'을 전제한 예수님의 윤리를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가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니버는 현실에서 조정하고 시대와 상황, 사람들 간의 사이에서 적절한 제안으로서의 윤리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 니버의 주장이다. 어느정도 이해가 되고, 일정부분은 수긍이 되는 부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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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는 가족, 공동체, 계급, 그리고 국가에 대한 상대적인 주장들을 반드시 계속해서 따져 보아야 하는(저울질해야 하는-평가해 보아야 하는) 사회도덕의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구체적인 지침(specific guidance)을 줄 수 있는 윤리는 아니다. (Surely this is not an ethic which can give us specific guidance in the detailed problem of social morality, where the relative claims of family, community, class,and nation must be constantly weighed.) 중요한 것은 니버가 (구약윤리는 커녕) 신약의 예수 윤리조차도 현대사회에 적용 불가능한 윤리로 말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예수의 윤리를 ”현대사회의 문제들에 적용할 수도 없고, 그 어떤 사회에 대해서 도 적용할 수 없다”는 칼 바르트의 말에 동의하고 싶다“ 또한 “본성의 세계가 곧 죄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the world of nature is also a world of sin)라고도 하고 “예수 윤리는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이 죄의 세계를 어떻게 억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언도 주지 않는다.
예수의 윤리는 당면한 현실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사회윤리(prudential social ethic)에 대해 소중한 통찰들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들을 제공할지는 모르겠으나 이처럼 순수한 종교적인 윤리로부터 당면한 현실들을 다루는 사회윤리를 직접적으로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but no such social ethic can be directly from a pure religious ethic). 이 지점이 요더와 하우어워스와 명확히 대치되는 점이다. 예수윤리는 정치적, 사회윤리의 모델이고, 예수를 본받는 교회가 사회윤리다. “예수의 윤리는 실용주의 윤리(prudential ethic)라면 관심을 둘 수 밖에 없는 도덕적 행동의 결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The ethic demands an absolute obedience to the will of God without consideration of those consequence of moral action which must be the concern of any prudential ethic) prudential ethic는 도덕적 행동의 결과를 고려한다 – 이 윤리는 도덕적 행동이 초래하는 사회적, 정치적 결과를 신중하게 계산하는 윤리다. 그러나 예수 윤리는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 윤리다.
이러한 점은 예수의 윤리와 사회적, 실용적 윤리 사이의 연관성을 성립시킨다. (This note in the teaching of Jesus brings it into a position of relevance with a social and prudential ethic) 니버의 기독교현실주의는 정치, 사회영역에서 타당성은 적실해 보인다. 이해관계에 따른 타협과 조정.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자연본성의 악함, 즉 이기심의 작동을 심각하게 인지하면서 설정하는 윤리이다. 니버에게 예수 윤리에 와서 성서적 본문과 현실성 사이의 타협과 조정은 자칫 말씀의 타협의 위험, 특히 이 윤리를 불가능한 윤리로 규정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질문들도 할 수 있다. 니버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사회 속에서,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윤리를 찾기 위한 매일매일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윤리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떤 것이 기준이 되어야할까? 어떻게 보면 자유시장에 풀어놓은 윤리라는 선수는 이제 어떻게 경기를 뛰어야 하는가? 어떤 규칙을 따르면서 뛰어야하는가? 이런 문제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니버는 인간은 원죄를 가진 이기심의 존재이기 때문에 '최선'보다는 '최적'을 찾아야 하고 '절대악'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너무 크게 본 것 같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정치인들이 니버의 이론을 좋아했다. 특히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 정치이론이 말하는 'realism'의 핵심은 힘의 균형 즉 balance of power이다. 국제정치에서는 더욱 더 개인의 힘이 작동할 수 없고 단일행위자로서 국가의 이익들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니버가 제시한 윤리의 적실성은 빛이 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현실주의는 다음의 내용들을 기반으로 '조정'을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냉철한 인식 (원죄)
기독교 현실주의의 가장 첫 번째 기준은 인간은 이기적이며 권력욕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국가, 인종, 계급)의 일원이 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따라서 "모두가 착해지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론을 버리고, 인간의 이기심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
힘의 균형 (Balance of Power)
사랑만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없기에, 현실주의는 '힘에는 힘으로' 맞서는 힘의 균형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다.
악한 세력이 힘을 독점하면 반드시 폭정이 일어난다. 따라서 권력을 분산시키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민주주의적 구조나 국제적 세력 균형을 도덕적인 대안으로 본다.
니버의 유명한 말, "인간의 정의에 대한 의지는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불의에 대한 경향은 민주주의를 필요하게 만든다"는 바로 이 기준을 잘 보여준다.
상대적 정의 (Relative Justice)
절대적인 선(Good)을 이룰 수 없다면, '덜 나쁜 쪽(Lesser Evil)' 혹은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쪽'을 선택하는 것이 기준이다.
기독교 윤리가 현실에서 문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어떤 정책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계산한다.
이때 기준은 '완벽한 평화'가 아니라 '갈등을 최소화하는 정의'가 된다.
책임의 윤리
현실주의자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결백함'보다, 불의를 막기 위해 기꺼이 책임을 지는 '참여'를 중시한다.
예를 들어, 전쟁이 악이라는 이유로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침략자를 방치하는 것은 더 큰 악을 불러온다고 본다.
따라서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강제력(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기독교적 책임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니버는 개별 인간이 지닌 도덕적 잠재력과 집단이 지닌 본성적 한계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개인은 이성적 성찰을 통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종교적 감화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기꺼이 포기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부분적으로나마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 모여 형성된 국가나 민족과 같은 집단은 구성원들의 이기심이 하나로 결집되는 통로가 되며, 오직 집단의 생존과 확장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한다. 이러한 집단 내부의 연대감은 겉보기에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응집력은 필연적으로 외부 집단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결국 집단은 개인보다 이성이 부족하고 충동적이며, 타인의 권익을 존중하는 도덕적 자제력을 발휘하기가 구조적으로 매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니버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자기 부정의 윤리를 집단에 그대로 요구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비극적 실상을 오해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도덕적 선함이 반드시 사회적 정의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는 서로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하므로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니버의 핵심 주장이다.
사회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개인의 사랑이 아닌 집단 간의 정의이며, 이 정의는 오직 힘의 역관계 속에서만 유지된다. 기득권을 가진 집단은 순수한 호소나 도덕적 설득만으로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사회적 정의가 오직 힘과 힘의 팽팽한 균형을 통해서만 성취되어 왔음을 끊임없이 증명해 왔다. 니버는 불의한 세력을 타파하기 위해 법적 규제, 경제적 압박, 정치적 투쟁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하는 것을 기독교인의 피할 수 없는 의무로 간주했다. 비록 이러한 수단들이 예수의 산상수훈이 가르치는 비폭력 정신과 표면적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현실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악의 무한한 확장을 막고 사회적 약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때로 덜 나쁜 악을 선택해야 하는 도덕적 결단이 요구된다. 강제력이 배제된 사랑은 사회적 무정부 상태나 강자의 폭정을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더 큰 비극을 낳을 뿐이다.
예수의 사랑 윤리는 역사 내에서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이상이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적 정의를 끊임없이 심판하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
인간이 이룩한 그 어떤 뛰어난 사회적 정의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는 항상 불완전하고 오만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실현 가능한 상대적 정의에만 매몰되어 만족한다면, 그 사회는 곧 자기 합리화에 빠진 타락한 권력의 장으로 변질될 것이다. 반대로 실현 불가능한 절대적 사랑에만 집착하여 현실 정치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눈앞의 악을 방치하는 무책임한 태도와 다름없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예수의 윤리를 북극성 삼아 자신의 방향을 수정하되, 발은 현실의 진흙탕 속에 딛고 서서 최선의 정의를 고민해야 한다. 절대적 이상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위치하면서도, 우리가 세운 상대적 가치들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정화한다.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겸손한 태도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도덕적 동력을 얻게 된다.
개인의 윤리: '이타성'의 가능성
니버는 개별적인 인간 관계에서는 예수의 윤리인 '자기희생적 사랑(Agape)'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공감과 양심: 개인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고, 이성적 판단을 통해 자기 이익을 양보하거나 희생할 수 있는 도덕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적용 범위: 가족, 친구, 작은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과 헌신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된다.
사회의 윤리는 '이기성'의 필연성을 적용한다
반면, 국가나 인종, 계급과 같은 집단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니버는 사회 윤리 차원에서 예수의 사랑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집단 이기주의: 집단은 개인보다 훨씬 이기적이다. 집단 내의 개인들이 제아무리 도덕적이라 해도, 집단은 그 구성원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기에 이타적이기 어렵다.
책임의 분산: 집단 속에 숨은 개인은 도덕적 책임감을 덜 느끼며, 집단의 생존과 승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게 된다.
권력의 충돌: 사회적 갈등은 '사랑의 호소'가 아니라 '힘의 불균형'에서 오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강제력과 권력의 재분배가 필요하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충돌
니버가 보기에 사회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마음 수양'이나 '종교적 교육'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고 순진한 생각이다.
윤리적 이원론: 개인에게는 '이타성'이 최고의 도덕적 기준이지만, 사회에게는 '정의(Justice)'가 최고의 도덕적 기준이다.
정의의 도구: 사회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때로 비도덕적으로 보이는 도구들(법적 강제력, 파업, 정치적 압력, 심지어 전쟁)을 사용해야만 한다. 니버는 이를 '선한 목적을 위한 악의 도구 활용'이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이해한다.
지금까지 착각한 것들이 있다. 기독교현실주의가 현실의 세세한 것들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오늘 스터디를 하면서 반대였다는 것을 알았다. 기독교현실주의는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판단력과 그 상황에서의 효과성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현실주의의 적실성을 감안하면서도 이게 전부라고 믿고 싶지 않다. 현실에 따라서 그 기준이 계속 차악을 찾아 가는 것이라면 그 현실을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해본다. 현실에 맞추는 기획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구조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나는 이로써 기독교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는 것을 더욱 깊이 알게되었다. 사회와 시대의 문제가 해결된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실을 하나하나 바꾸어나가는 현실주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