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독교연구원_ 니버의 기독교윤리 해석_니버읽기 시리즈 2
인간은 죄를 지었다. 그리고 그 죄는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되었다고 믿지 않는 사람만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욕망과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치열한 토론과 합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힘을 가지면 누구나 지배하려고 하고, 인간 사이에 법이 없다면 인간은 스스로 타락하는 문명에서 왕으로 군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관점이 아니라 니버의 말이다. 이를 기독교 현실주의라고 한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이렇듯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등장하는 문제들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가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물론 반대로 기독교 이상주의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선함이 최선으로 끌어져 나올 때 인간이 살아가는 공동체와 사회는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때로는 섬김으로 때로는 이해와 용서로. 이렇게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끌어 안으려 할 때, 기독교현실주의자인 니버는 가로막는다. “그러다가 다 죽어!”라고.
오늘부터는 니버의 기본적인 이해를 넘어서 니버의 기독교윤리에 대한 해석으로 넘어간다. 이 책에서 니버는 현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주의적 사회복음주의가 가지고 있는 인간본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이기심을 간과한 체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신념윤리일지는 몰라도 책임윤리는 될 수 없다는 것이 니버의 주장이다. 물론 이게 니버의 사상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정치학계에서는 끊임없이 두 진영으로 나누어져서 싸우고 있는 자유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니버의 이야기는 귀가 솔깃하기도 하고, 문제시 되기도 한다. 오늘부터는 이제 기독교현실주의에서 더 들어가서 기독교윤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니버의 생각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항상 고민이지만 현대기독교연구원을 가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를 악물고 신림동 산고개를 올라간다. 어느순간 때가 왔을 때 내 마음 속에서 유진피터슨과 니버가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럼에도 니버는 결국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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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버는 독일사람이다. 루터의 신학적 전통을 ‘이신칭의‘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루터가 마주친 현실에 대한 이해가 깊다. 모든 것들은 ‘의로움’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더욱이 루터가 이야기한 ‘오직 믿음으로’라는 단어도 사실 루터가 살던 시기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이 서로 절충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맥락을 모르면 루터가 이야기한 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여서 어떤 순간이든 ’의로움’이나 ‘도덕적인 행동‘만 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가갛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순진한 것이다. 이신칭의를 이야기했던 루터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는데, 전해지지 않은 맥락을 가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그 텍스트만, 그 구호만 붙들고서는 도덕주의로 빠져 버린다. 더욱이 인간이 가진 ’이기심’이 이신칭의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이기심은 계속해서 남아서 인간이 맞닥드린 현실에서 계속해서 물고 늘어진다.
니버는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미국 기독교를 지배하던 사회복음주의를 비판한다.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이기심 특히 interest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나 흥미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 하면 ’자신의 주장과 자신의 선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일 수 있지만 그 도덕적이 인간이 놓여진 현실 속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국가 안에 국민이거나, 민족 속에서 인종이거나 강남의 100억짜리 아파트의 주민이라면 도덕적인 인간은 더 이상 없다. 오히려 그와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함께 만든 윤리를 그대로 따를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그룹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들의 선택을 예측할 수 있다.
사랑은 물론 인간이 가진 최고의 동기이지만 갈등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사랑보다는 오히려 정의가 먼저 시작된다. 온갖 갈등과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실 속에서 정의가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서로 싸우는 세력들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고 더욱이 인간의 이기심을 억제하기 위해서 바로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니버의 다른 책 ’Love and Justice‘에 잘 나와있다. 물론 월터스토프가 쓴 ’사랑과 정의’ 역시도 사랑을 실행하려는 사람은 그 사랑이 실행되기 전 ’정의’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원인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어떤 사람을 용서하려면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내면에서는 자연적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성격인 정의와 이기심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사실 한국사회에서는 80년대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에 대해서 복음주의 진영이 행했던 비판과 비슷하기도 하다. 과연 언제까지 평화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미로슬라브볼프나 하워드 요더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월터라우센부시나 칼바르트 같은 자유주의자?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성격: 현실론 vs 제자도
니버 (기독교 현실주의): 윤리의 핵심을 '책임'에 둔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악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때로 '덜 나쁜 악(차악)'을 선택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정치적 권력 투쟁과 강제력 사용에 참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요더 (근원적 평화주의): 윤리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에 둔다. 윤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효율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십자가를 따르는 것에 기초해야 한다. 세상의 정치적 책임보다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국가와 폭력에 대한 입장
니버: 국가의 폭력은 질서를 유지하고 더 큰 악(독재 등)을 막기 위한 '필요악'이다. 그는 정의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정당 전쟁'의 논리를 수용하며, 평화주의를 현실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이상주의라고 비판한다.
요더: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한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음으로써 승리했듯이, 기독교인도 '비폭력적 저항'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폭력에 가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본다.
죄와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
니버: 인간의 집단적 죄성을 강조한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권력 투쟁의 연속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이 타락한 역사 속에서 가능한 최선의 정의를 찾아야 한다.
요더: 역사의 주관자는 인간의 정치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기독교인은 역사를 통제하려고 애쓰기보다(Constantinianism, 콘스탄틴주의 비판),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가실 것을 신뢰하며 '남은 자'로서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한다.
니버는 성경에 나오는 복음서의 윤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정치 윤리 사이에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거리처럼 서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고 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복음서의 윤리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요구한다. 현실에 대한 타협이 없고, 오로지 완전한 초월한 사랑을 요청한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로 현실에서는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현실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어떻게 될까? 아주 쉬운 방법은 ‘배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분리주의를 기반으로 ‘영혼 구원’에만 집중하게된 이유이다. 반대로 사회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화‘와 ’안정’을 찾아낸다. 따라서 사회복음주의자들은 타협이 기본이고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 바로 니버가 두 가지 모두를 비판하면서 다른 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니버는 기독굦거인 사랑을 현실에서 물론 완전히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목표로 삼아서 현실의 정의를 끊임없이 갱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윤리의 차원에서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 맞는 사랑을 찾아내는 것이다. 포기하거나 배제하거나 그냥 초월해버리면서 무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불가능한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방식의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회복되고 변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타락한 인간이 회복되고 돌아오고 서로 연결되고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바로 니버가 던진 ‘기독교 윤리 해석‘의 옳은 방향이다. 이미 정해진 답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실 속에서 두 발을 딛고 불어오는 바람과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에 맞게 계속 보법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정말로 현실적이다. 현실주의이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그대로 두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될 수 있도록 정치적인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니버가 말하는 핵심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니버와 하워드 요더의 평화주의를 가르고 더욱이 폴 램지의 정의전쟁론과 선을 긋는다. 니버는 기독교현실주의 입장에서 책임의 윤리를 말한다. 인간은 집단적으로 이기적이지만 현실에서 정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균형을 맞추고, 필요하다면 차악’으로서 무력을 사요하더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 반대로 평화주의자인 하워드 요더는 제자도와 순종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윤리는 세상의 효율성이나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거부하면서 교회는 세상을 바꾸려하기 보다, 그 자체로 폭력이 없는 대안공동체로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폴 램지는 사랑에 근거한 규칙을 만들기는 하지만 니버의 현실주의를 일부 계승하면서도 다양한 원칙들을 만든다. 전쟁을 하더라도 민간은은 절대로 공격하지 말아야 하며, 피해가 이익보다 더 커야 한다는 비례성을 지켜야 한다. 현실의 입장에서 실제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니버 아니면 폴 램지 사이에서 결정할 것이다. 하워드 요더의 평화주의는 낄 자리가 없을 것이다.
폴램지와 니버의 차이
니버와 램지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력 사용의 근거와 도덕적 통제 방식에 있다. 니버는 인간의 집단적 이기심과 죄성을 직시하며, 정의를 지키기 위해 무력이라는 '차악'을 선택하는 정치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상대적인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권력의 균형을 맞추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반면, 램지는 니버의 현실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아가페(사랑)'의 법으로 체계화했다.
램지에게 무력 사용은 단순히 어쩔 수 없는 악이 아니라, 부당하게 고통받는 이웃을 보호하기 위한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식이다.
또한 두 사람은 윤리적 규범의 절대성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니버는 구체적인 규칙보다는 상황 속에서의 책임과 결과를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램지는 무력 사용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적 원칙(비전투원 면제, 비례성 등)을 명확히 규정했다.
니버가 죄 많은 세상에서 '더 큰 악'을 막기 위한 역설적인 투쟁에 주목했다면, 램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인이 반드시 지켜야 할 '보편적인 도덕적 경계선'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정당전쟁의 두 가지 핵심 원칙
램지는 전쟁이 '사랑의 도구'가 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도덕적 기준을 제시했다.
비전투원 면제의 원칙 (Non-combatant Immunity) : 무력 사용은 오직 공격을 수행하는 세력에게만 한정되어야 한다. 전쟁과 상관없는 민간인(어린이, 노인 등)을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차별성의 원칙'이라고도 불린다.
비례성의 원칙 (Proportionality) : 전쟁으로 얻는 선(정의의 회복)이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악(파괴와 인명 피해)보다 커야 한다.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그 수단이 과도하여 수많은 생명을 헛되이 앗아간다면 그 전쟁은 정당성을 잃는다.
월터윙크의 논리
사탄적 체제와 권세의 입체적 이해 : 월터 윙크는 성경에 등장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Powers)'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그는 권세를 단순히 영적인 존재나 물리적인 구조 중 하나로만 보지 않고, '외적인 구조'와 '내적인 정신'이 결합된 총체로 보았다.
체제의 영(The Spirit of Institutions): 국가, 기업, 교회와 같은 모든 조직은 고유한 영적 분위기나 집단적 정신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 체제가 인간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르면, 그것이 곧 '사탄적 권세'가 된다.
폭력의 신화: 윙크는 현대 사회가 "폭력만이 질서를 회복하고 악을 이길 수 있다"는 '폭력의 신화'에 중독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는 니버가 무력을 필요악(정의의 도구)으로 본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비판이다.
제3의 길: 예수의 비폭력적 저항. 윙크는 산상수훈의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무조건적인 굴종이 아닌, 적극적인 '비폭력적 저항 전략'으로 해석했다.
수치심을 통한 폭로: 당시 문화에서 오른손 등으로 오른뺨을 치는 것은 상전이 하인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이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나를 대등한 인간으로 대우하라"는 당당한 거부이며, 공격자의 폭력성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도덕적 전술이다.
니버와 요더 사이의 가교: 윙크는 요더처럼 비폭력을 주장하지만, 니버처럼 사회 구조적 변혁에 매우 적극적이다. 그는 비폭력이 단순한 평화주의를 넘어,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는 '제3의 길'임을 강조했다.
니버의 철학은 자칫하면 기독교 극우주의처럼 볼 수도 있는 면이 있다. 모든 것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학이 맞다고 하는 것 같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니버의 신학을 자세하게 드러내보면 현대인을 비판하면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니버는 현대인들이 현대성의 이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심취하여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 거하실 공간을 닫아 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임하실 초월의 공간을 시멘트로 발라 버리고, 이제 모든 것들을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세부적으로 알아보면 정통 기독교나 자유주의 문화 그리고 부르주아 정신이 서로 다르게 현대성을 실천하고 있다. 먼저 정통 기독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을 단순히 고대 사회의 도덕규범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에 맞는 현실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하면 세대주의가 되거나 반대로 보수주의가 된다.
조금 결을 달리하여 니버는 자유주의나 혹은 현대문화는 그리스도를 ‘갈리리의 선한 도덕실천가‘로 바꾸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이로 인해 인간의 한계와 죄성에 대해서 인식이 사라지고 오로지 도덕적인 자만심만 남아 버렸다는 것이다. 앞에서 계속해서 살펴보았지만 니버가 해석하는 기독교윤리는 바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임하신다면 수 많은 이기심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신념에 이른다. 어떤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거하시고 인간의 이기심에 완전히 기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하나님의 임하심을 인간의 자유로 제거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 역사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하나님이 성경에만 있거나, 아니면 아예 하늘에만 있거나 하지 않고 니버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생각한다. 니버의 기독교현실주의는 그래서 예전에 많이 나왔던 이미지 중에 예수님이 비지니스맨인 사람과 같이 거래처 사장과 악수하는 장면이 된다. 기독교 현실주의와 기독교성경주의의 차이 그리고 아예 다른 차원의 자유주의적 접근이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바꾼다. 현실에서 우리가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방향과 선택을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은 꾸깃꾸깃한 역사 속에서 직선을 그어 가신다
니버는 더불어서 부르주아 정신도 비판한다. 계몽주의가 만든 과학적 신화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현실에서 일하시는 것보다 ‘합리성’과 ‘예측성’의 세계관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구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러한 과학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유주의적인 태도까지 가지게 된 계층이 있었으니 바로 부르주아 계층이다. 부르주아들은 중세의 가을이 지나가고 자유의 정신이 찾아온 근대에서야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살 수 있었다. 부가 증가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기만족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서 신앙은 부수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실의 선택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이기심과 자신의 관심대로 이루어진다. 니버는 이러한 태도를 비판한다. 계속해서 우리가 바라본 것처럼 인간의 타락과 이기심이 만든 자기만족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초월성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니버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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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윤리의 역사는 근대적 주체성과 자율성이 등장하면서 더욱 강조되었다. 초기에 책임윤리는 칸트에게서 나타났다. 칸트는 책임윤리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신념윤리나 의무론적인 윤리를 이야기하면서 ‘정언명령‘처럼 상징적인 윤리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러다보니 인간은 칸트가 이야기하는대로 윤리적인 삶을 살기가 힘들었고, ’그것은 오로지 칸트만 가능하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막스베버는 1919년 강단에서 칸트에 대한 대안을 외친다. 이것이 바로 ’책임윤리‘이다. 막스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행위의 동기나 원칙의 순수성만을 중시하는 신념윤리에 대해서 책임윤리를 주장한다. 책임윤리는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예측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책임윤리를 주장한다. 막스베버의 주장은 근대적 행위자가 단순히 도덕적 규칙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사회와 역사 속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관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막스베버에게 소명으로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책임을 지는 자세와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라인홀트 니버는 신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 영역에서 책임윤리를 발전시킨다. 더욱이 본회퍼는 나치 치하에서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구체적인 책임과 대가를 치르는 신앙을 강조했다. 한스요나스는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기술의 우위시대에 미래세대를 책임지는 ‘책임의 원칙‘을 정립한다. 이를 더 나아가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를 ‘청지기’로서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웃들을 위해서 현실 속에서 귀를 닫지 않고, 손을 씻지 않고 그 구정물 속으로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타협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버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유이다. 누군가는 이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럼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무책임하고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인가?
빛의 자식들, 어둠의 자식들
니버의 저서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은 민주주의를 옹호하면서도 그 근저에 깔린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주의를 비판하며,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한 토대를 제안한다.
니버는 인간을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로 구분한다. 빛의 자식들은 이성과 도덕적 원칙을 믿으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익을 절제할 줄 아는 민주주의자들이다. 반면 어둠의 자식들은 오직 자신의 이기심과 권력만을 추구하며 도덕적 제약을 무시하는 냉소주의자들이다. 니버의 역설은 빛의 자식들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이지만 인간 내면의 이기심과 악의 힘을 과소평가하여 어둠의 자식들에게 쉽게 패배하거나 이용당한다는 데 있다.
니버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으로 '현실주의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그는 유명한 명제인 "정의에 대한 인간의 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지만, 불의에 대한 인간의 경향은 민주주의를 필요하게 만든다"를 통해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즉, 인간의 선한 면은 민주주의를 운영할 힘이 되지만, 동시에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권력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민주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빛의 자식들이 지닌 '소박함'에 대한 경고와 책임 있는 정치를 강조한다. 니버는 자유주의적 빛의 자식들이 가진 낙관주의적 오류를 지적하며, 그들이 어둠의 자식들처럼 이기심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선한 의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 세력들 사이에서 정의를 지키기 위해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고 이를 책임 있게 다루는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뱀 같은 지혜'를 갖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니버를 알고 지냈다. 은사님께서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을 자신의 인생책이라고 설명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니버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리차드니버의 기독교와 문화에 댛나 이야기로 확장되었고, 문화 중심의 변화를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라인홀트 니버를 읽으면서 다시 정치적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설득되었다. 입버릇처럼 꾸겨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직선을 그어간다는 말을 좋아했는데 그게 이제 보니 니버의 기독교현실주의의 한 측면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책임윤리의 중요성이 너무나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최근들어 친하게 지내던 사람에게 ‘무책임에 실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그냥 넘길수도 있는데 오랜만에 들은 ‘무책임‘이라는 말에 항상 가던길을 세우고 곰곰히 생각나게 만든다.
나는 왜 그렇게 무책임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때 나는 오늘 강의로 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역량이 높지도 않았다. 더욱이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다양한 말들로 합리화시키기에 바빴는지도 모른다. 역량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끝까지 매달려서 무엇인가 결과를 내야 했었나? 싶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고 결국 나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은 어쩌면 평생 ’무책임한 사람’으로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역량을 높이고 사람들의 요청에 반응하면서 책임감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지 않았을까? 일처리를 하는데 있어서 여행중이기도 했고, 그렇게 붙잡고 해결할 만큼 마음의 깊이가 있지도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니버를 읽으면서 다시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바로 잡는다. 현실 속에서, 시대 속에서 굴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내려면 책임을 져야 한다. 끝까지 현실 속에서 발을 딛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