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시대의 철학자, 박치우

처음읽는한국현대철학자_7강

by 낭만민네이션

처음읽는 한국현대철학의 목차이지만 한 구절 한구절 읽어가면서 새롭게 덧붙이거나 변경했다. 철학적으로 접근하니 좋긴한데 너무 길어져서 문제다. 나이오트와 함께하는 철학산책이 벌써 시즌6이다. 오늘은 시즌6에서도 7번째 철학자 박치우의 사상을 돌아본다.


0. 들어가기

1. 빨치산이 된 서양철학 1세대

2. 실천으로서의 철학

3. 파시즘에 대한 비판, 비판의 무기로서의 변증법

4. 근로인민민주주의와 주체

5. 해방이후의 활동과 최후

0. 나오기




0. 들어가기


과도기에는 언제나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서 과도기에 탄생해서 세월의 풍랑을 겪은 문학가나 철학자들의 사상은 위기의 순간이 도래하면 항상 다시 찾게 된다. 우리의 기억은 위기의 순간에 더 많은 정보와 의미를 함축한다. 어쩌면 다시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더 빠르게 대처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위기를 어떻게 파악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위기는 모면하는 것을 넘어서 해결할 수 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역사를 들춰보며 철학자들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도 같다. 오늘 우리가 알아볼 박치우가 바로 위기의 순간 하면 떠오르는 철학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난 시간에 알아본 신남철에게 우리가 배웠던 '인간다움'과 '변증법'을 배웠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위해 르네상스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 신남철과 달리 위기에 직면하는 철학자 박치우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오늘 우리는 '위기와 실천'에 대해서 알아볼 텐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가끔 하는 생각이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도망가는 것이 '죽음' 밖에 없다면 결국 해결을 해야 한다. 위기에 직면하여 정면이든 측면이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 이것을 '실천'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순간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기의 철학자 박치우, 실천의 철학자 박치우, 총을 든 철학자 박치우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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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치산이 된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는 1909년에 함경북도 성진에서 출생했다. 서양철학 1세대라고 하면 신남철, 박종홍 그리고 박치우를 손꼽는다. 서양철학을 배울 수 있는 경로는 일본을 통해 배우는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스승은 모두 일본 철학자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서 니시아마네에 의해서 번역된 언어로 정리된 '철학'을 분과학문에 맞게 배우면서 제국을 익혔던 철학자들을 1세대 서양철학자들이고 한다. 정중현의 '제국대학의 조센징'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일본이 세운 제국대학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1000여명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 중에 3분 1은 친일파가 되어서 조선이나 일본에서 관리직에 종사했고, 3분의 1은 반대로 독립운동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분 1이 강단에서 철학이나 과학을 가르치면서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신남철이나 박치우는 강단철학자였다가 각각 공산주의자가 된다. 이들이 시작한 학문은 마르크스주였지만 이윽고 거슬러 올라가 헤겔의 정신현식학과 변증법까지 이른다. 변증법은 원래 헤겔이 자체적으로 발명했다기 보다는 17세기 초의 독일낭만주의자 그룹에서 향유하고 있던 관념론이다. 현실의 문제과 변화를 품고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관념론.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양철학사에는 유명한 하이네나 노발리스 같은 철학자들이 낭만주의자였다. 물질과 생기로부터 올라오는 실제의 변화를 생각과 이성의 질서로 연결하여 상승하는 철학을 만든 사람들이 낭만주의자였다. 이들의 이름처럼 과거를 향수한다고 하여 '낭만'이라는 한자로 붙였지만 원래는 Romantist니깐 로마시대의 '신입합일론' 전통을 불러온 르네상스의 후예들을 말한다.


그리스로마시대에 나오는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인 켄타우르스나 인간과 같이 시기와 질투를 하는 감정적인 신들의 모습은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양가감정을 가지고 이쪽 저쪽 두리번 거리는 인간의 본질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러니 17세기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후예인 헤겔은 이러한 그리스로마시대의 양가감정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신에서 현상으로, 현상에서 다시 정신으로 상승하는 방법을 찾았다. 물론 철학사에는 이렇게 수평운동을 하다가 상승하는 모델 말고 위와 아래가 만나는 방식이나 포함관계로 통합하는 방식도 있다. 어디서 출발하든지 상관은 없지만 '방법의 차이'는 실천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맞다.


박치우와 신남철은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서 3.1운동을 경험하고 분담까지 경험했다. 과도기다. 국가가 멸명하고 임시정부가 세워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땅은 빼앗긴 상태. 바라는 상태는 있지만 아직은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 없었다. 노예처럼 친일파가 되거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현실에 문 닫고 살거나, 반대로 맞서서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그렇지만 철학자이면서 학자이던 이들은 총을 들 수가 없어기에 대부분 전향한 철학자가 되거나 친일파가 되었다. 드러나는 형태야 어떻든지 과도기적 자기분열 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는 박치우는 자신의 나이 40을 넘어서는 위기를 정면으로 맞서며 총을 들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박치우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한한다. 1928년 조선일보의 장학금도 받은 터라 당시 사람들에게는 기대감이 컸을 것이다. 3년만에 철학공부를 마치고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 연구로 졸업논문을 쓴다. 신남철이나 박치우이나 그의 철학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박사논문에서 다룬 주제들을 상기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렇게 하지 않고 철학자들이 보여준 현상으로 그들의 마음 속의 형상을 유추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 박치우 읽기에서 하르트만의 사상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절대로 그 철학의 진가를 알 수 없다. 먼저 하르트만의 철학에 대해서 살펴보자.




하르트만은 윤리학에서 '시야의 협소함'이 철학이 가진 협소함이라고 비판한다. 우리가 많이 들어면 '~이즘'들은 이러한 협소함의 증거이다. 합리론, 경험론, 유물론, 인식론과 같은 '~론'들은 다양한 현상을 다양하게 인식하지 않고 자신들이 정해 놓은 하나의 '방식'으로만 본다. 그러니 다양성은 무너지고 모든 것들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처럼 해석해 버린다. 이러한 부분은 박치우에게 와서는 서양의 자랑하는 '자유주의'가 1:1 등가교환으로서 개인과 자유를, 개인과 사회를, 국가 대 국가를 상정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르트만은 말한다. '낮은 층위는 높은 층위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그러면 '낮은 층위에서는 항상 높은 층위의 일부분을 전체로 보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방식을 공유하는 사회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날마다 다양한 뿌리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각자의 시간에 맞게 현상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태양의 나이와 들판의 꽃들의 나이가 다르고 존재의 층위가 다르지만 모든 것은 동일한 시간대 안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존재론적 현상학이다. 현상 안에서 모두가 같은 시점에서 만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층위에서 존재들은 얽히고 설켜 있다. 인간이 한번에 인식할 수 있는 존재들으니 기껏해야 20가지 정도이기 때문에 한시적이다. 더욱이 존재들은 하르트만에 의하면 4가지의 층위로 나누어 진다. 물리적인 층위가 가장 아래에, 생물적인 층위가 그 다음이고 그 위에 심리적인 층위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신적인 층위가 있다.


'~이즘'은 이러한 층위를 종합하지 못하고 한 가지만으로 정리해버린다. 그래서 시야가 편협해져 버린다. 유물론은 그 자체로 '물질적 층위'만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편협해져 버린다. 그럼 박치우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자연스럽게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발전한다. 하나하나 버리지 않고 서로 종합하면서 물질과 생물학적 층에서 심리적 층위로 그래서 결국 정신이 종합하는 형식을 갖는다. 이렇게 현상 자체를 보고 그 층위의 구조를 정리하고 나면 이제 시야에 들어오는 '위기'는 그 자체로는 위기라고 부르지만 수 많은 가능성 위에 놓인다. 특히 내가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영향을 미치면 위기는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그러나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서는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가만 놓아두면 현실은 모순 투성이의 위기의 시대로 끝날테니 말이다.


하르트만의 존재의 층위

무기적 층 (Inorganic Level): 물리적, 화학적 법칙이 지배하는 사물의 영역이다.

유기적 층 (Organic Level): 생명 현상과 생물학적 법칙이 작용하는 영역이다.

심리적 층 (Psychic Level): 개인의 의식, 감정, 지각 등 내면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정신적 층 (Spiritual Level): 언어, 역사, 법, 예술, 도덕 등 인간 사회와 문화가 형성하는 객관적 정신의 영역이다.

아래에서 위로는 '의존성'의 법칙이, 위로부터 아래로는 '자율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상위의 층위는 아래로부터 의존하지만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자율성이 있다.



2. 실천으로서의 철학


1934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박치우는 '위기의 철학'을 발표한다. 박치우가 생각한 위기란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어서 마침내 우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라는 객관적인 현실 속에 존재하던 모순이 개인의 주관적인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위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사회 속의 문제들이 모순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먼 미래의 것 혹은 다른 사람들이 처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의 삶에 들어와서 나의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 바로 위기이다. 구조적으로 나의 삶 속에서 내가 주관적이고 주체적으로 경험하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외부의 요청이나 도움이 아니게 된다. 결국 주체적인 실천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위기를 말하는 순간 실천이 바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 박치우가 깔안놓은 길이다.


박치우는 객관적으로 드러는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3단계로 실천의 방향성을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름하여 조금 어렵게 느껴지지만 '교섭적 파악', '모순적 파악', '실천적 파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 하나하나 알아보자. 먼저 '교섭적 파악'은 대상과 내가 교섭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대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대상을 변화시키고, 그 과저에서 대상이 나에게 반작용으로 주는 동태적인 파악이다. 박치우는 "대상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해보지 않고는 그 대상의 본질을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 문제속으로 들어가서 파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교섭이라는 말 속에는 그래서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실천적 변증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지점은 마르크스주의를 오마주한 것 같다는 것이다. 1845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의 스승격인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인간의 사유가 객관적 진리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실천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앞에서 살펴본 하르트만은 존재론의 층위를 해석하고 조망했는데 오히려 박치우는 교섭적 파악에 이르러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순 속으로 들어가서 변혁을 하려는 것이다. 마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진리를 알려준 스승을 넘어서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모순적 파악이다. 모순적 파악은 모순들의 대립을 읽어내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모순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고 다른 모순들과 함께 발생한다. 사회 속에서는 여러가지의 모순이 여러 층위에서 존재한다.



사회 속의 모순들은 그 자체로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모순들과 서로 추돌하여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모순들의 대립 속에서 어떤 지점에 있다. 평형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움직인다는 것은 어떤 모순이 더 커지기 때문에 그 모순이 끌고 나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순과 대립되거나 다른 방향의 모순이 존재한다. 사물이 가만히 있을 때는 그 안에서 소리없이 존재하는 대립물들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위기를 바라볼 때 그 내면에 어떤 모순들이 서로 물고 뜯고 엉키는지를 살펴야 한다.


마지막은 실천적 파악이다. 실천적 파악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해서 전략적으로 기획된 행위를 말한다. 다시 이야기하면 로고스라는 논리와 파토스라는 고통과 열정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에서 모순이 발생했다면 그 모순이 나에게 다가와서 주체적인 행동을 요구하게 된다. 박치우는 파토스가 없는 로고스는 가짜라고 보았다. 관념에 머무르는 로고스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박치우에겐 경성제대에서 배운 서구철학은 로고스였고, 해방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혼란과 사회적인 문제들은 그를 총을 든 철학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파악을 하게 되면 사실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이 위기이기 때문에 3가지의 파악을 수시때때로 해야 한다. 그러니깐 당면한 사회모순에 대하여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어 가는 것이다. 에토스는 로고스와 파토스가 만나서 실천적 파악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결단으로 말이다. 이로써 박치우의 '실천'은 지성과 감정 그리고 실행주체들의 의지로서 정리가 된다.


실천의 방법이 '당파성'이다.
모든 사람의 실천은 다 다르므로 당파성은 모두 다르다.

박치우가 말하는 실천은 관조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하는 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1946년 발표한 '민주주의의 철학적 해명'에서 박치우는 '시민계급'을 특권계급으로 표현하면서 다수의 노동자 근로인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민주주의를 외친다. 앞에서 살펴본 모순이 노동자 자신들의 삶 속에서 교섭적이고 모순적으로 파악되면서 마침내 실천을 위한 모순으로 발전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철학은 인식을 하는 주체가 실천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니깐 철학은 실천의 방향성 즉 당파성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관념론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르트만의 이야기처럼 단지 하나의 층위에서의 실천이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의 실천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3가지로 나누었다. 이론적 탐구를 의미하는 테오리아theoria인 관조와 정치적이고윤리적인 실천을 하는 프락시스praxis, 그리고 생산 및 예술활동인 poiesis인 제작이 바로 그것이다. '철학의 당파성-테오리아와 이즘'에서 박치우는 모든 철학은 처음에는 이론인 테오리아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실천의 차원이 연결되면서 이데올로기인 '사상'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드시 실천이 있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라캉의 방식으로 보자면 '상상계'와 '상징계'의 결합이고 이것이 '실재계'의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박치우에게 이렇게 드러나는 실천의 방향인 '당파성'은 철학의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당파성이 기본적으로 탑재된다는 이야기이다.



3. 파시즘에 대한 비판, 비판의 무기로서의 변증법


박치우는 근대 시민사회의 철학적 토대인 형식논리가 역설적으로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논리적 기반이 된다고 분석했다. 근대 시민사회는 '개인(in-dividual)'을 최소 단위로 설정하고, 이를 '구성원리'이자 '기초논리'로 삼는 형식논리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는다고 설명한다. 형식논리는 모든 인식의 대상을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때까지 개별화시키고,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일 대 일의 논리로 파악하려는 특성을 지닌다. 그런데 박치우가 보기에 이 논리는 봉건체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근대주체를 설정하기 위해 자유를 독자적인 한 사람으로서 설정된 '개인의 권리와 욕망'을 '이념적이며 형식적이고 추상적'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러한 형식논리의 폐단은 자유주의가 약점 전체주의나 파시즘 체제로 변질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박치우는 '시민적 자유주의'(1936), '전체주의의 논리적 기초'(1941), '형식논리의 패퇴—분유논리의 부활?'(1939) 등 일련의 글을 통해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파시즘이 형식논리의 '분유논리'(部分이 全體의 일부로만 존재)에 기반한 신비적 유기체설로 작동한다고 비판했다. 파시즘의 철학적 뿌리를 명확히 드러내는 이 분석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통찰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박치우는 파시즘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로 변증법을 제시했다. 그에게 변증법은 형식논리에 대응하는 단순한 논리적 수단이 아니라, 모순을 인식하는 탁월한 방법이자 현실 변화를 설명하는 기본 원리였다. 서양철학의 합리성과 변증법이 결합하여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원리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그는 변증법을 통해 철학의 실천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파시즘이 현실존재를 대상으로 모순과 투쟁을 긍정하는 계기인 동시에 통합과 화합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원리이기 때문에, 변증법은 이를 논리적으로 무력화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파시즘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변증법에 내재한 '운동성으로서의 자기부정성',
즉 끊임없이 내부의 통합에 균열을 가하며 변화와 운동을 불러오는 속성이었다.


당시 일본의 몇몇 철학자들도 변증법을 고수한다고 주장했지만, 박치우가 보기에 그들은 변증법을 회피한 채 전체주의적 지배논리에 포섭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변증법을 말하면서 '투쟁의 논리'를 배제한 채 모순에 대한 성찰 없이 형식적으로 화합과 합류를 강조하는 것은 '화합(和合)론의 논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변증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런 상황에서 개체들이 전체 속에서 화합할 때 만약 행복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민사불공(民社不公)'과 같은 논리를 발달하게 만드는 것이 박치우가 식민지 시절부터 파악한 파시즘 체제의 논리적 귀결점이다. 그러니까 제국주의에서 '주의'는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인민들을 줄세우는 강제였다. 형식을 정하면 그 형식에서 벗어난 '이상치'를 모두 제국 바깥으로 몰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자신의 논리와 기준이 강하면 쉽게 다른 사람들의 논리를 부정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박치우의 파시즘 비판은 해방 이후에도 일관되게 이어졌다. 그는 해방 이듬해 발표한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에서, 나치스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의 타도만으로 세계에서의 파시즘의 종식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낙관주의라고 경고했다. 파시즘은 민족국가가 존속되는 한 민중과 그들에게 깃들어 있던 욕망을 내세우는 권력자를 통해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히틀러, 무솔리니, 도조 히데키에게서 볼 수 있듯이 파시스트들은 이 애국자라는 이름을 걸고 등장해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매국노로 몰아붙인다. 그 광기 어린 분위기에 편승해 국민이 지배권력에 스스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낼 때 파시즘의 싹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박치우가 진정 우려한 것은 파시즘 체제가 언제 어떤 정치공동체에서든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당시 한국적 맥락에서 해방 직후 국내에도 크게 대두된 맹목적 민족주의의 국수주의가 파시즘 감정에 호소하는 지배권력과 만날 때 해방된 조선에 파시즘의 극복 체제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변증법에 기반한 한 사회에서는 진정한 해방의 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면서, 자유주의와 파시즘을 서구 근대에 내재한 모순이 민주공동체를 파괴하고 인민의 생명과 권리를 말살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라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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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로인민민주주의와 주체


박치우는 해방 후 조선에서 실현되어야 할 민주주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철학적으로 탐구했다.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논리적 한계를 비판하며, 해방조선의 민주주의는 반드시 '근로인민민주주의'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이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강조한 핵심은 민주주의의 주체를 '시민(市民)'이 아닌 '근로인민(勤勞人民)'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시민'은 재산을 가진 소수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념으로, 절대 다수의 노동하는 인민을 사실상 배제해왔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에서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삶을 이끌어가는 '근로인민'이 사회의 중심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민주주의의 철학적 해명'(1946)에서 그는 '인민'을 "역사 사회적 자각을 가진 다수 피지배계급"으로 규정하며 그 개념을 구체화했다. 이 근로인민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주체가 될 때, 비로소 해방조선에서 진정한 공평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박치우가 추구한 근로인민민주주의의 이념적 성격은 복합적이었다. 우선 그의 민주주의는 당시의 비합리주의적 대안에 대해 이성적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일관되게 비판한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이론적 배경에는 비합리주의적 요소와 신비주의가 가득했다. 그러므로 만약 민족이나 국가를 중심에 놓고 인민의 자유를 말살하고 다른 민족의 인민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나치의 파시즘이 대표적이라면, 그런 면에서 민족이나 국가를 중심 놓고 인민의 자유를 말살하고 다른 인민을 억압하는 조류는 모두 '민주주의의 적'이다.


또한 그의 민주주의는 형식논리가 아닌 변증법적 논리에 근거한다. 부르주아의 형식논리에 기초해 모든 개인을 균질화시킨 사회적 평등을 이념적으로 도출했다면, 변증법은 그것을 현실적으로 실천하고 공평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민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민주주의는 한때 인류보편의 권리 회복을 명분으로 내건 역사적 과제였지만, 시민적 자유가 소수를 위한 것이라면 이제 민주주의의 특권적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의미에서 박치우의 근로인민민주주의는 북유럽에서 발달한 사회민주주의나 오늘날의 절차적 민주주의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이며 원칙적인 민주주의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치우가 꿈꾼 세상은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여건을 보장해주는 곳이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으로 인한 소외와 계급사회의 대립이 사라지는 곳이어야 했으며, 그러한 토대 위에서 근로인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치우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민주주의는 인민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인주주의(人主主義)'의 토대가 민주주의였다. 한편 박치우는 해방 이후에 사회적으로 힘을 얻었던 국수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나라에 필요한 민주주의는 민족이나 국가 자체를 절대화시키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근로인민을 중심에 두는 민주주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치우에게 인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식민지경험으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길이었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성숙한 정치공동체를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그늘 아래 걸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아가 박치우는 근대 민주주의와 독재가 공존할 수 없는 사회가 되기 위해 제도와 법 규정으로 정착화되어 이제 혁신이 필요 없어 보이는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에서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잠재된 위협 요소가 늘 도사리고 있음을 경계했다. 박치우는 민주주의가 형식이 아닌 실질로 작동하기 위해, 근로하는 인민이 그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만약 박치우의 생각이 남한이든 북한이든 실현되었다면 어땠을까? 통일이 된 한반도를 그려보노라면 이러한 철학자들이 꿈꾸던 세상을 만나게 된다.



5. 해방이후의 활동과 최후


해방 이후 박치우는 언론인이자 철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현대일보' 편집장을 맡아 파시즘·국수주의 비판과 민주주의 계몽 논설을 활발히 발표했으며, 1946년은 그에게 특별히 격동적인 해였다. 가장 활발히 문필활동을 전개한 해이면서도 동시에 한 권의 저작와 함께 남녀에서의 활동을 마감하는 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5개월여 밖에 지속되지 못했던 일요일에도 발간되던 창간 최고의 신문인 '현대일보'의 주필이었던 그는, 사설을 통해 당면한 사안에 대한 좌의의 생각을 대변하며 대중을 설득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사무실을 수색하는 날 박치우는 잠적하고 신문사는 장간 처분을 받게 된다.


그 후 박치우는 남한에서 비밀활동을 이어가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을 계기로 지명수배되었다. 제포를 피하기 위해 그해 겨울 그는 월북을 선택했다. 그렇게 그의 남한 활동은 막을 내렸으며, 월북은 남한의 좌익활동 탄압으로 그에게 강요된 것이며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월북 이후 박치우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며 남로당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투쟁했다. 월북한 남로당 청년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던 강동정치학원에서 박치우는 당시 '동학당의 난'으로 불리던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전쟁'으로 규정하고, 3·1운동의 인민투쟁적 성격과 역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등 대원들을 조선의 주체적 혁명투사가 되도록 지도했다. 원래 남로당은 1925년 설립된 조선공산당을 모태로, 1946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이자 미군정이 허가한 합법단체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였는데, 남쪽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여러 조직이 연합해 남조선로동당을 새로 건립했으며, 박치우가 빨치산으로 남파되기 얼마 전인 1949년 6월에 조선로동당으로 이름을 바꿔 통합하지만, 실권은 완전히 소련군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처럼 남로당파가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1949년 9월, 박치우는 남한 빨치산을 규합하고 통솔하는 과제를 안고 360명의 제1병단 유격대 정치위원으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다. 빨치산 부대의 일원으로 태백산 일대에서 활동하다 그해 11월 20일 전투 중 최후를 맞이했다. '동아일보'는 당시 "약 2주 전 태백산 전투에서 박치우를 사살했다"는 단 한 줄의 기사만을 남겼다. 박치우의 최후는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삶으로 실천한 한 사상가의 완결이었다. 그에게 해방조국에서 이제 당면해야 할 존재는 역사의 정당한 투쟁적 주체로 등장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근로 대중'이었다.


박치우에게 인민을 이끄는 것은 '계급 자각'이고,
이 과정 자체가 최의 지식인의 계급의 계급투쟁이었다.


'사상과 육체'(1937)에서 그는 "정치의 연장이 아닌 전쟁이 있는가. 그리하여 전쟁에 관한 한 군인은 적어도 사수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탄환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전장에 투신하는 병사의 생명은 전쟁의 소모품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실천은 자각한 주체의 이성적 행동이므로, 전장에서 무자각적으로 총을 든 소모품 같은 병사와 신념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투사로서의 자각적 주체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박치우에게 최후의 투쟁은 단순히 전장에 육체를 던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 변증법적 실천은 사유방식이면서 동시에 자각고 자기 성찰과 단련을 필요로 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저자 조배준은 박치우의 최후를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비견하며, 자신의 신념과 사유에 따라 살다가 담담히 그 죽음을 선택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하면서, 불과 수십 년 전 한국에도 사유와 삶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분투한 철학자가 있었음을 우리가 오늘날 박치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0. 나오기

과도기를 살아간 사람들. 거기서 일어난 무수한 실험과 도전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해방은 되었지만 더 큰 제국이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그 제국에 무릎꿇은 작은 제국의 앞잡이를 하던 이들이 활개치던 세상. 제국의 가진 일방적인 형식주의를 탈피하려는 노력. 시대의 아픔을 품은 철학자들이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신남철은 휴머니즘을, 박치우는 민주주의를 다시 고민하면서 미래를 예견했다. 어쩌면 이들의 노력이 반영되는 대한민국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욕하거나 혹은 옹호하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한 '개인'으로써 역사 앞에 선다는 것을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다른 사람이 해석한 것으로 살고, 다른 이들의 인정에 목말라해야할까? 스스로 처음부터 고민해서 미래까지 던져진 밧줄을 붙잡고 열심히 걸어 올라가보자. 박치우가 꿈꾼 세상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fCTCcQFq17I&t=1011s


https://www.youtube.com/watch?v=n0yLThmwfMA&t=1298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