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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22. 2017

복음과 변화

로잔언약 그리고 존 스토트

오래전 배웠던 지식이 현실을 입고

나와서 성육신해야할 때가 있다


존스토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복음주의에 대한 이야기까지




20세기 세계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

5강 로잔(1974) 이후 세계 복음주의는 어떻게 변했나?

20140715_기독느헤미야_이재근 박사님



*복음주의 사회성의 스캔들?

1. 상호 연결된 주제들

-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 마크 놀

- 복음주의 정치 스캔들

- 로널드사이더는 매우 열정적인 복음주의자였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최근에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사회와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 이것이 왜 스캔들인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은 매우 많은 관점을 탄생시켰다. 기독교가 확장되어가고, 선교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가 낙관적이 세계관을 가지고 진보하던19세기의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차 대각성의 시기인 19세기에는 복음주의는 각 단계별 혹은 분야별로 나눠지지는 않았다. 2차 대각성운동과 부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영적인 부분과 개인적인 구원과 경건생활에만 집착한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은 대각성 이후 회심에 대한 행동주의의 한 측면은 선교와 전도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해외로 나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주의의 한 측면인 행동주의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이라는 것은 영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창조라는 개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만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타락으로 인해서 상처를 입고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왜곡이 되었으나 회심이후에 재창조의 프레임 안에서 고민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세계관의 확장과 사회적인 부분으로 변혁의 물결이 흘러가면서 변화는 국가적인 차원과 세계적인 차원에서 넘쳐났다. 노예해방운동과 같은 사회적인 운동의 기저에는 대각성운동 이후 회심과 열정, 공의와 사랑이 있었다. 이러한 복음의 전파를 총체적 구원, 전인적인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요 : 19세기 복음주의 부흥-2차 대각성-의 열매로서의 복음전도와 개



3. 상징적 기원

- 사회복음의 등증 social gospel이 등장하여 현대주의와 근본주으의 논쟁(1890-1940)기에는 근본주의자는 모든 종류의 사회에 대한 관심 및 참여를 자유주의 및 사회 복음과 동일시 시켰다.



4. 월터 라우센부쉬


독일에서 태어나서 루터파교회에서 교회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독일계 북침례교 목사로서 헬스키친 빈민가 사역을 했음. 1891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윤리적/내제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고전적 자유의의 신학(리츨/하르낙) 신학의 구체적 사회적용을 고민하였다. 독일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신학자는 아브레이트 리츨이었다. 리츨에 대해서는 자유주의라는 관점이 보편적이다. 특히 리츨과 하르낙에 대해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초기)라고 불리운다. 이들이 생각한 자유주의의 특징은 초월적이지 않고 내제적 기독교를 강조하는 형태가 된다. 라우센부쉬는 원래 진보적인 성향이었으나 리츨과 하르낙을 만나면서 열정과 관점의 확장을 경험하고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현실기반 사회복음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사회복음의 대한 이야기를 미국에서 시작한다. 원래는 루터파 교인이었던 아버지가 침례교로 개종하면서 뉴욕에서 개혁주의로 유명한  로체스터에서 신학을 하고 빈민가로 간다. 1897년 로체스터 신학교 교수가 되고, 기독교와 사회위기(1907)을 쓴다. 사회질서의 기독교화(1912) 이후에 가장 유명한 '사회복음신학'(1907)을 쓴다. 이 책에서 라우센부쉬는 '기독교인됨의 의미는 가난을 영속화하는 경제구조의 개혁을 위해 일하는 것, 구원은 인간사회를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현대 정치사항에서 볼 때 마르크스 주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땅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940년 이후에 신근본주의가 나타나면서 하우센부쉬의 사상은 기독교 안에서도 용납되기 힘든 것으로 치부되었다. 특히 사회복음이라는 것은 사회주의 안에서만 이해 되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사회복음에 대해서 뜨뜨미지근했다.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세족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유주의 안에서는 사회문제와 사회적 해결책을 관심을 가지게 접금하면서 복음주의의 정치적 스켄들이 드러난다.



+복음주의자의 반성과 변화(1947/1974)

- 1. 1947 ; 신복음주의 운동의 등장과 선구적 복음주의 사회 양심 표현

- 현대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


칼 헨리는 이 책에서 "복음주의 기독교가 복음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칼헨리<-에드가 브라이먼)라고 말했다. 에드가는 매우 진보적인 사회윤리학자였기 때문에 칼헨리도 많은 영향을받는다. 에드가는 노년에 제자들 한명 키우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마틴루터 킹이었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싸움이 시작된 원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복음주의자의의 사회적 양심 : 셔우드 워트는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 잡지인 decision의 편집자였다. 이 책을 통해서 사회복음의 근본적인 접근이 시작된다.



- 짐월리스


짐월리스는 트리니티가 풀러의 근본주의신학을 이어가던 때에 친구들 7명과 함께 the Post-American이라는 단체를 만들고(1971년) 그 후에 the Sojurners라는 책을 1975년에 쓴다. 월리스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고 인종과 가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 최근에는 하나님의 정치(2005)를 통해서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복음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 대반전1972년


데이비드 모버그, 19세기 복으주의 사회참여 전통의 20세기 몰락이라는 대반전을 이야기한다.


- 로널드 사이더


시카고 복으주의 사회관심 선언과 사회행동을 위한 복음주의자 그룹을 만든다.



- 밥 피어스


월드비전은 1950년에 만들어졌고 밥 피어스는 1950년에 YFC선교사로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국제인도주의 구호활동의 선구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구호단체인데, 최초에는 한국에서는 선명회가 되었다. 많은 단체들이 그 후로 만들어져서 사회복음이 각 단체의 정체성과 형태를 만들어 간다.



*영국


영국에서는 사실 미국과 같은 사회복음의 흐름들이 대두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복음주의자들과 같이 반대적인 소수파가 아니었기 떄문에 첨예한 활동이나 대립을 하지 않았고 이미 성공회가 국교회로 자리를 잡고 사회가 발전하고 있었기 떄문에 현실의 변화가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1. 구호 ; TEAR


the Evangelical Alliance Relief(1959, 1968)년에 만들어졌고 이들은 도시선교와 샤프츠베리 프로젝트를(1969) 통해 영국의 식민지였던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구호활동을 펼친다.



2. 1974 로잔언약


로잔언약이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데, 왜 한국에서는 많이 회자되지 않았나? 1970년대 한국의상황은 독재정치가 흥하고 있었고 사회복음의 측면에서 인권과 가난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시 되던 때였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야 로잔언약의 정신이 반짝거리고 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도 로잔언약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고, 한국교회복음주의교회 연합이라는 단체도 마찬가지다. 서울신대 조정남 교수가 이미 로자언약을 번역을 했지만, 이것이 어떤 배경이고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2013년 영국에서 복음주의 세계확산'이라는 책을 통해서 이러한 배경들을 서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생겼다. 현재는 로잔 3번째로 케이프타운 서약이 번역되어 나왔다.



*로잔언약, 로잔대회

1. 예비운동 및 기원

- 1966년 베를린세계전도회의, 여전희 대위임령 중심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에서 베를린전도회의를 개최하면서 전세계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확산을 위해서 베를린 선교대회를 시작한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잘 수행하기 위한 조직으로 이러한 운동이 시작된다. 일단 1966년에 시작된 운동은 그 영향으로 수 많은 모임들을 기획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로잔대회였다.



2. 로잔대회 기획

-주최 :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

- 의도 : 베들린대회 후속프로그램, 1968년 wcc 웁살라대회의 급진주의가 전해졌다.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인간구원을 중심으로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구원과 선교를 외치게 된다. 1968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중요하다. 68혁명 당시 프랑스와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떄였다. 그러나 사실은 빌리의 계획은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차원에서 구원'의 문제로 소급되었던 것처럼, 너무 사회주의에만 집중되는 경향을 균형적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기획위원회 주요인물 ; 잭 데인(회장, 영국/호주 성공학), 레이튼 포드(BGEA), 폴 리틀(미국 IVF), 헤럴드 린셀(CT)


빌리가 로잔대회를 열려고 했을 때 빌리의 기반은 미국이었기 때문에 네트워크와 파급력에 있어서 영국인을 세워서 전세계적인 포섭이 가능하도록 전략적으로 조직을 운용한다.



3. 영국 및 유럽의 반응

- 참석의사 표시율


아시아 96%, 북미 90%, 중미88%, 아프리카86%, 남미85%, 오세아니아85%, 유럽51%유럽, 특히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에서 개최하는 부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존스토트, 고든 랜드레스, 존 레어드, 데이비드 윈터, 마이클 하퍼 등)영국과 미국의 근본적인 복음주의 문화차이 및 영국인의 전형적인 미국인 폄하가 큰 장벽이었다. 그 이유는 영국인들이 미국인을 생각할 때 세계복음화 구호만 그치는 깊이 없는 대회, 지나친 대규모, 미국인의 지배 및 정복 기질, 지나친 호화 숙소, 주제넘고 자만과 천박함으로 가득한 말잔치, 좁은 신학범위, 미국인들의 돈잔치'라고 생각했다.이 대회의 성공의 큰 요건은 존스토트의 참석이었다. 존스토트는 성공회와 연결되어 있고 IVF와 연결되기 때문에 전세계적인 동원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4. 대회 공식 일정 및 통계


1974년 7월 16일-25일까지 로잔 팔레드볼리외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총 2473명 159개국, 135개 교단, 비서구 신자 1천명이 모였다. 여성은 7.1% 정도였고, 평신도는 10% 미만이었으며, 44세 이하는 50% 이상이었다. 1910년에 있었던 에딘버러 선교대회와 비견할 만한 세계적인 대회였다. 에딘버러보다 로잔에는 목회자들의 참석이 크게 증가되었다. 차세대 리더들을 모으고 새로운 연구주제를 만들어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5. 특수 주제


미전도종족 ; 도널드 맥가브란, 랄프윈터, 피터 와그너 등 미국 플러신학교 그룹에서 이러한 주제를 밀고 나갔다. 사회정의 및 급진제자도 ; 라틴아메리카 복음주의자 그룹에서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존 하워드 요더가 영국에서는 짐 펀턴이 주로 목소리를 내었다. 메노나이트 계열의 사람들이 참석해서 사회정의에 대한 목소리르 높였다. 기독교 역사사 처음으로 비서구출신의 목회자들과 일반인들이 복음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400년 동안 혹은 2000년 동안의 기독교에서는 백인 중심의 서구화가 심화되었지만, 로잔대회부터는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목소리도 듣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6. 비서구 복음주의 목소리

- 라틴아메리카


구조적 사회불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분석과 성경의 급진적 제자도 융합


- 아프리카 ; IFES는 IVF의 국제단체 이름인데 아래의 3명은 IVF를 기반으로 이야기 되었다.


르네 파디야 : 복음을 값싼 은혜, 소비자에게 최상의 가치를 보장하는 시장상품으로 축소시킨 미국식 문화기독교를 비판하고, 복음화를 최단기간에 최소비용으로 최대기독교인을 만들어내는 수학적 계산으로 축소시킨 실용적, 공리주의적인 '교회성장운동'을 비판했다. 라틴아메리카 IFES부총무였고 에쿠아도르 침례교 출신이었다. 사무엘 에스코바르 : 캐나다 IVCF 대표였고 페루침례교 소속이었다. 나사렛선언'(누가복음 4장)의 전인적인 이해를 촉구했다. 그 당시 해방신학자들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영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그리스도의 자유와 더불어 자유롭게 된 심령은 경제, 정치, 사회적 압제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 무관심할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선포는 미국사람들에게 매우 큰 충격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로써 그 당시 남미를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독재정권과 결탁을 해서 제국주의의 확장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에스코바르의 선언은 반미신학'이라는 입장에서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올란도 코스타스 ; 푸레에르토리코 침례교 소속으로 코르타리카성경신학교 교수였는데, 로잔대회에서 연설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책자를 만들어서 돌렸다. '심층전도'는 복음을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현 세대의 사회-경제구조에도 적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미국 복음주의 남미선교는 제국주의 문화의 경제 이익과 연결된 부패한 사업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에서 신학을 하거나 신앙을 가지면 부패한 독재정권과 사회문제에 대해서 눈을 감게 만들고 심지어 이러한 구조를 정착화 시킨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3명의 활동은 남미 해방신학의 위엄을 보여주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 아프리카 ; 존가투


동아프리카 부흥의 영향력과 서구 선교의 모라토리엄이 일어났다. 동아프리카 부흥을 통해서 케냐를 비롯한 동부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80% 국가들이 부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존가투는 케냐 출신으로 동아프리카 장로교 총무였고 로잔대회에 초청을 받았다. 아프리카교회의 자립과 자치를 위한 서구 선교사업 선언을 한다. 서구사회의 물량 선교는 이제 끝이 나고 자치를 위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잔에서는 선교사 '철수' 대신 '축소'로 수정하여서 마찰을 줄였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반감혹은 당혹감을 가지게 되는데, 영국에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화해하는 역할을 존스토트가 하게 된다.



1907년


한국은 동노회를 통해서 자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부흥이 일어나면 감정적인 터치가 필요한데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러한 터치를 할 수 는 없었기 때문에 현지인의 자치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주도권의 이양이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일어나게 된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고 현지인이 복음을 전하는 자치와 자립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가투역시 케냐 부흥의 핵심이 되고 자치와 자립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7. 존 스토드의 역할


로잔언약 입안위원장 의장이 되어서 15주제 로 정리한다. 초안은 스콜틀랜드 JD더글라스가 대회 3일전에 작성하였고, 초안을 기반으로 4번의 수정 끝에 로잔언약이 만들어진다. 쉐퍼, 바이어하우스 등 보수파와 라틴아메리카 급진파의 중재가 일어난다. 미국사람들이 원하는전도우선성을 위치시키고, 사회참여(7안이었던 사회참여를 5안으로 올리고 6, 7안으로 확장시킨다)를 원하는 비서구의 목소리도 포함시킨다. 대회 중 서명은 2473명 중에 2000명이 하게 된다. 미국복음주의자의 일방성, 보수성, 지배의지 무력화와 급진 복음주의자와의 타협을 주도하였다. 이후 복음주의 세계에 급진파 등장의 산파 역할을 하게 된다. 로잔 계속위원회LCCWE에서 미국인의 보수반동에 저항하며 로잔언약의 더 넓은 선교 개념이 만들어지는데, 전인정신 계승 감독하게 된다. 존스토트는 서로 반대되지 않고 모든 부분에서 균형을 갖춘 로잔언약을 만들어 낸다.



8. 대회 직후 평가  

- 영국: 의심에서 열광으로 존스토트의 기막힌 조정능력과 기독교적 외교술을 성공회적 중용으로 승리했다는 평가를 낸다. 잭 데인의 탁우러한 운영 능력과 지도력, 섬김으로 영국인의 태도 변화에 기여하게 된다.

- 미국 : 열광에서 방어로! 린셀, 와그너, 그레이엄(세계복으화를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우려를 가지게 된다)



9. 로잔 이후


로잔의 진자, 로잔의 진짜 메시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다. 멕시코 시티1975 대회, 파타야1980 대회에서는 다시 미전도 종족 주제로 바뀌게 된다. 그랜드피즈1982대회에서는 가위의 양날, 새의 양날개라고 하면서 다시 균형을 회복한다. 로잔2 마닐라대회1989를 통해서 전인성이 부활하고 마닐라 선언은 21개로 늘어나게 된다. 로잔3 케이프타운2010년 대회에서는 "온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라는 구호로 케이프타운서약이 진행되고 크리스토퍼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습진적 제자도와 화해자로서의 선교의 개념이 완성된다.



10. 2014년 평가 ; 로잔이후 복음주의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사회행동, 사회복음은 자유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선교와 전도는 근본적으로 같은 말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서구 북반구 백인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네이션


그렇다면 최근 논의되고 있는 총체적 복음이나 전인적 복음'은 발명된게 아니라 이전에 19세기에 유행하고 성장하던 관점이 아니었나?그럼 도데체 왜 이러한 열정을 잃어버렸는가?가난한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잃어 버리는 것, 잊어버린 거은 무엇인가?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회복음과 개인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메타인지 컨퍼런스를 열어보면 어떨까? 신학, 역사학, 경영학, 언어학, 철학, 법학 등 각 영역의 총체적인 지식을 들을 수 있는 메타인지도를 그려보는 것, 세기별로 나눠도 되고 시계열 분석이나 주제별로 메타인지도를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로잔언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넓은 심연을 가지고 있다. 다시 한국에서의 함의를 생각해 보자.



각주

-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은 노트르담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마크 놀(Mark Noll)이 1994년에 출간한 저서이다. 복음주의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를 비평한다. 미국의 대중적 신복음주의 잡지인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서 2004년 이 달의 책으로 선정했다. 영문판은 1994년 어드만에서 냈고, 한국어판으로는 엠마오 번역본과 IVP 번역본(2010년 6월 30일 출간)이 있다.



- 복음주의 정치 스캔들





- 인격주의

관념론 계열에 속하는 철학 학파.

실재하는 것은 인격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의식성, 자유로운 자기결정성, 목적지향성, 불변적인 자기동일성, 가치보존성 등의 기본특성 때문에 인격이 모든 실재의 원형이라고 본다. 인격주의는 종종 유신론, 특히 그리스도교 인격주의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그리스도교 인격주의는 단순한 인격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개성의 예인 예수 그리스도가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인격주의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르네 데카르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왜냐하면 인격주의는 지각과정이라는 꼬불꼬불한 길보다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의 주관적 흐름 속에서 실재를 더 깊이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격'을 뜻하는 'person'이라는 낱말은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나온 것으로 원래는 배우가 쓰는 가면, 곧 그가 맡은 배역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이 낱말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갖는 품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이처럼 인격은 실재(실체)로 보나 가치(품위)로 보나 최고·최상의 것이다. 인격주의는 여러 종류가 있다. 대부분의 인격주의자들은 실재를 의식의, 의식 안에, 의식을 위해 있는 것으로 믿는다는 점에서 관념론자이지만, 실재론적 인격주의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재론적 인격주의자들은 자연의 질서가 비록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질서 자체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 인격주의자들은 대부분 유신론자이지만, 무신론적 인격주의자도 있다. 더욱이 관념론자에는 절대론적 인격주의자(→ 절대적 관념론 ), 범심론적(汎心論的) 인격주의자(→ 범심론 ), 윤리적 인격주의자, 인격적 관념론자 등이 있다. 인격적 관념론자에 따르면 실재는 일군(一群)의 유한한 인격들 또는 궁극적 인격인 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격주의 사상의 요소들은 동양(예를 들면 12세기 힌두교 유신론자 라마누자)·서양의 전통을 막론하고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보통 인격주의 운동의 창시자로는 17, 18세기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이 운동이 발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사람으로는 18세기 영국계 아일랜드의 주교이며 인식론자인 조지 버클리를 꼽는다. 인격주의는 프랑스에서 대개 유심론이라는 이름 아래 강하게 나타났다. 18, 19세기의 사상가 멘 드 비랑은 저항하는 세계에 거슬러 행동하는 내적 경험을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규정했고, 이 영향을 받은 19세기의 철학자·고고학자인 펠릭스 라베송 몰리앵은 정적인 필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공간세계와 자발적이고 활동하며 발전하는 생명 개체들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구분했다. 이 흐름은 곧 앙리 베르그송의 인격주의로 이어졌다. 19, 20세기의 직관주의자 베르그송은 과거와 현재의 주관적 상태 모두가 서로 밀접히 침투하는 가운데 정신적 인격의 자유로운 삶이 형성되는 비공간적인 경험으로서 지속을 강조하고, 이러한 생철학을 표현하는 전우주에 가득 차 있는 힘으로 생(生)의 약동을 설정했다. 미국의 인격주의는 19, 20세기의 종교철학자들, 특히 감리교 철학자들 사이에서 성행했다. 그중 일부는 독일에서 박식한 형이상학자이자 의학을 공부한 루돌프 헤르만 로체 밑에서 공부했다. 예를 들어 조지 홈스 하우이슨은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은 창조되지 않고 영원하며 따라서 유한한 인격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자율성을 강조했다. 보스턴대학교를 인격주의의 아성으로 만든 보던 파커 바운은 인간이 도덕·종교·감정·논리 등 많은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신의 피조물이며, 이 특성들 각각은 그 자체로 고려할 만한 가치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합리성도 반영한다고 주장하여 명백한 유신론적 견해를 표명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연도 자기 안에 내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를 초월해 있는 신의 에너지와 합리적 목적을 보여준다. 인격주의는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에드거 브라이트먼, 랠프 타일러 플루얼링 등 바운의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에 의해 위세를 떨쳤다. 인격주의의 정신과 풍부한 통찰력은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지속되어왔다.



- 신복음주의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는 19세기 개신교 신학에서 나타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진정한 복음주의 즉 개신교 정신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영미 지역의 개신교 사


상을 지칭했다. 현재는 원래 신복음주의 의미 이외에 미국 개신교 내 온건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근본주의와의 결별


근대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대중문화, 진화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반대하는 폐쇄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실례를 듣면 1925년 테네시 주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압력으로 공립학교의 진화론교육을 반대하는 버틀러 법을 통과시킨 바 있으며,독일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독일신학에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심지어는 근본주의자들은 교육을 선호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반발, 신학 교육에 반대하는 반(反)신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세상을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근본주의와 자신들을 구분짓고자 했는데, 이들을 신복음주의자라고 부른다.



미국 복음주의운동

신복음주의자들은 1942년 전미복음주의자협의회(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cals)를 만들었는데, 현재 협의회장은 레이스 앤더슨(Leith Anderson)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의미로 그리스도 신앙을 통한 구원을 믿는다면 로마 가톨릭 신자나 진보기독교인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1947년에는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나와 Fuller Theological Seminary(풀러신학대학원)를 설립했으며,1956년에는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의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sitanity Today)창간을 하기도 했다.[1]하지만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 당선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개입하는 등 교회가 정치문제에 간섭하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미국과 하나님 나라(미래적이며,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영국 복음주의 운동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신학교인 런던 바이블 칼리지(London Bible College, 약칭:LBC)를 1943년 설립하였다.[2] 이듬해인 1944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내에 성서연구기관인 틴테일 하우스(Tyndale House)를 설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 성공회내 복음주의자들도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데, 윌리엄 템플 전 캔터베리 대주교다음으로 영향력있는 신학자로 불리는 존 스토트 신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존 스토트는 개혁파 감리교회 출신의 칼빈주의자 마틴 로이드존스와 비교된다. 존 스토트 신부는 세계복음화대회인 로잔 회의(1974년)에 로잔언약 초안 심사위원회장으로 참여, 복음주의 신학의 가장 대표적인 선언으로 불리는 로잔언약(Covernant) 작성에 기여하였다.



- 로널드 사이더

로널드 사이더는 1939년 캐나다에서 개신교(그리스도의 형제단)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예일 대학교와 같은 대학교 신학부에서 역사(Ph. D.)와 신학을 공부했다. 1968년 인종차별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흑인 기독교인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서 1973년부터 칼 헨리, 짐 윌리스, 사무엘 에스코바와 함께 주말집회에서 사회문제들을 주로 다루었다.팔머 신학교에서 신학자로 활동했으며, “사회 참여를 위한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ESA)회장,미국 동부 침례교회 신학교(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영어: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영어: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영어: Genuine Christianity)(모두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IVP에서 역간)가 있다.



- 월드비전

월드비전(World Vision)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인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밥 피어스 선교사와 한경직 목사가 처음 설립한 개신교 계열의 국제 구호 개발 기구이다. 현재는 전 세계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 목표는 "모든 사람, 특히 어린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일하는 것(working for the well being of all people, especially children)"이다. 6대륙 모두에서 일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구호재단 중 하나로[1] 2007년 현재 98개국 파트너십 전체의 예산은 2억 6천만 달러이다.

1947년 당시 중국을 여행하던 미국인 선교사 밥 피어스(Bob Pierce)는 한 학교에서 강의한 것이 월드비전을 세우는 동기가 되었다. 밥 피어스 목사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그 아이를 돌봐달라고 매달 5달러씩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0년 6.25 한국 전쟁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한국의 고아와 남편을 잃은 부인들을 돕는 한경직 목사를 만나면서 밥 피어스 목사는 세계의 고통 받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기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한국 선명회'라는 이름으로 월드비전이 탄생되었다. 초기 어린이들에 대한 음식지원과 교육, 건강 관리에만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던 월드비전의 구호사업은 1970년대에 이르러 아동이 사는 지역사회의 발전 없이는 아동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통해 대단위 지역개발사업을 통한 아동후원사업으로 전환하였다. 월드비전은 후원아동을 중심으로 한 식수와 위생, 교육, 소득증대와 주민 역량강화 사업 등의 통합적인 개발사업을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또한 급박한 재난이 닥친 곳을 위한 긴급구호사업 부서를 개설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다.



- 밥 피어스 http://chtimes.co.kr/lib/column/17115


로버트 윌라드 피어스(Robert Willard Pierce), 애칭 밥 피어스(Bob Pierce)는 한국고아의 아버지, 세계적인 대부흥사, 위대한 사람, 제트기처럼 날아다니는 성직자, 온 세계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을 지닌 선교전략가, 가장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의 한사람, 한국 어린이와 교회의 영원한 벗으로 그를 만났던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밥 피어스는 1914년 10월 8일, 아이오와 주 포트 다지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에 감리교 평신도로 있다가 나중에는 나사렛 교회에서 봉사했다. 어린 피어스는 걸을 수 있게 되자 곧 교회에 나갔다. 나중에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를 하게 되자 그는 11살에 나사렛 교회에 등록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이 자그마한 교회에서 12세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의 넓고 큰 땅, 미국 전역, 더욱이 해외로 선교와 구제 사업을 위해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하늘의 소리를 어린 그가 들었다. “너는 내가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서 내가 명하는 말을 하게 될 터인데 내가 너와 끝까지 같이 있을 것이니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렇게 확실한 하늘의 소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파세데나 대학을 다니던 중 목사의 딸인 로레인과 결혼하였으며, 복음전도자의 소명을 크게 느껴 학교도 그만두고 순회설교가로 지냈다. 1940년에 침례교 목사로 안수를 받고 캘리포니아 웰링턴의 침례교 제일교회에서 잠시 목회를 하였다. 1944년 십대선교회(Youth for Christ) 창설에 참여하여 1945~49년에 그 부총재로 지냈다.

    

한국에 오기 전, 그는 믿음에 대한 결정적인 두 가지 경험을 한다. 첫 번째는 ‘20달러짜리 기적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로스앤젤레스 복음센터에서 부목사직을 맡고 있었던 청년 시절에 받은 사례비는 20달러였는데 생활비로는 아주 부족한 액수였다. 어느 주일 아침에 부흥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 사례비 전부를 군부대 천막교회 건립을 위해 즉흥적으로 헌금하였다. 그날 오후, 예정되지 않은 결혼식 주례를 하였는데 새신랑과 신부가 감사의 표시로 20달러를 주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부흥목사의 설교가 너무나 은혜로워서 그 20달러를 다시 헌금했다. 저녁 예배가 끝나고 한 노인 신도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감사의 표시로 20달러를 주었다.

    

이 일이 그에게 믿음을 가르쳐주었다. 믿음이란 인간의 머리와 노력의 최고 수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방’(God Room),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 자신의 역사하심, 인간의 머리나 세상의 일반적 경험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것을 믿는 것, 믿고 행해 보는 것 - 이런 기적의 산물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 혼의 세계가 ‘믿음’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피어스는 말한다. “인간의 최선을 다 한데서 그치는 것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셔서 인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영역 밖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일 - 그것이 '하나님의 방'이다. 이 하나님의 처소가 내 일상생활의 일부분, 경험의 전부분이며 기본철학이다. 나는 더 강조할 수 없을 만큼 주장한다. 당신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가능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그보다 더 약속을 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비콕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부터 1년간 서독의 베를린에서 거주하면서 동독 교회와 하버드대학교간의 연락을 받는 일을 하였다. 귀국후에는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했으며, 보스턴의 흑인거주지역에서 살면서 흑인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한 사회운동을 하였다. 저서로는 《예수, 하버드에 오다》와 《세속도시》가 있는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하비 콕스는 자신의 저서인 《세속도시》에서 도시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에 대해 긍정하고, 성경에 대해 문자적인 해석과 로고스(logos) 중심적인 해석을 배격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론은 남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의 열풍이 부는 데에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서평



박창수



1. 요약



로날드 사이더가 쓴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한화룡 옮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0)은, 엄청난 부와 만연된 빈곤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희생적 나눔을 비롯하여 다양한 실천 방식을 통해 대량의 세계 빈곤을 실제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로날드 사이더가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소액 대부의 예를 들어, 대량의 세계 빈곤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과 냉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부분이다.



“때로 우리는 사태가 절망적이며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하거나 냉소주의에 빠지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변화를 일으킨다. (중략: 인용자)



그것은 대량의 세계 빈곤이라는 전체 상황을 정말로 바꿀 수 있을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10조 불 이상의 연간 총수입을 올린다. 다섯 식구 한 가족을 돕기 위한 대부금은 평균 500 불이다.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수입의 1%를 소규모 대부금으로 준다고 가정해 보자(중략: 인용자).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수입의 1%만 사용해서 가장 가난한 10억의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아는가? 단 일 년이면 된다!”(로날드 사이더, 13).



로날드 사이더는 물론 소액 대부만으로 모든 빈곤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극심한 세계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피력하며 그 구체적 처방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날드 사이더는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 총재 무하마드 유누스와 미국 경제학자 제프리 D. 삭스와 닮았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소액 대부가 모든 사회적 악을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무하마드 유누스, 340), 그가 1997년에 워싱턴에서 열린 ‘소액 융자 정상 회담’에서, 137개국으로부터 온 3,000명의 인사들 앞에서, 소액 대부를 통해 가난 없는 세상을 이룩할 수 있음을 역설한 연설은 감동적이다.1) 제프리 D. 삭스도 『빈곤의 종말』에서 ‘선진국들의 빈국들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의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다양한 대안들을 통해, 세계의 최빈국들인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을 그 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로날드 사이더가 무하마드 유누스나 제프리 D. 삭스와 다른 점은, 빈곤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무엇보다도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게 희생적 실천을 요청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듣는 이의 마음을 괴롭히는 사실을 말하며, 희생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다. (중략: 인용자)



우리는 엄청난 부와 만연된 빈곤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하도록 돕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우리는 그대로 행할 것인가? 또한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에는 사실상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가 포함될 것이다)은 자비로울 것인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품위 있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자본을 함께 나눌 것인가? 부유하고 자비로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난한 사람들과 협력한다면, 앞으로 20년 안에 세계의 가난을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로날드 사이더, 14-15).



로날드 사이더가 탁월한 점은, 빈곤 문제에 관해 성경 본문(Text)과 현 상황(Context)을 최대한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그 둘을 연결시키는 능력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이 책에서 먼저 상황을 이야기 하고(제1부 “가난한 나사로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 그 다음에 성경을 말하며(제2부 “가난한 자와 재물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 후 성경과 상황을 모두 이야기하고(제3부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대안을 제시한다(제4부 “실천적 제안”). 이제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을 두 가지씩 기술하고자 한다.



2. 장점



이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날드 사이더는 제2부에서 ‘경제적 나눔과 경제적 정의’라는 본문 가운데 ‘예루살렘의 모델’에서, 초대 교회의 경제적 나눔이, 일거에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기적이고 반복적인 나눔의 방식으로 실행되었음을 매우 탁월하게 설명한다.



“초대 교회는 절대적인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초대 교회는 사유재산을 폐지하지도 않았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재산을 팔거나 교회에 수익을 바쳐야 할 의무가 없었음을 상기시켰다(행5:4). 나눔은 강제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충만하여서 많은 사람이 기꺼이 개인 재산에 대한 적법한 권리를 포기했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 이 구절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기증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도행전 뒷부분에 가면 우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가 여전히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음을 본다(12:12). 다른 사람들도 약간의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헬라어의 시제가 이 해석을 확증한다. 사도행전 2:45과 4:34의 동사들은 반복되는 행동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의미는 “그들이 자주 소유물을 팔았다” 또는 “그들은 물건을 팔아서 수익을 정기적으로 가져오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사유재산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거나 모든 사람이 즉시로 모든 것을 팔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본문은 일정 기간에 걸쳐,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땅과 집을 팔았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변화된 경제관계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루살렘 교회의 관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그들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서로에 대해 책임을 졌으며 전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나눔은 피상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2:45).”(로날드 사이더, 124).



로널드 사이더의 초대 교회의 경제적 나눔에 대한 이런 해석은, 구약 희년법의 연장선상에 있는, 예수님의 초과소유 토지·주택 환원 명령과 일치한다. 예수님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아 빈자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여기서 ‘재물’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크테에마’(kth/ma)2)인데, 이 단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그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다고 할 때 바로 ‘소유’로 번역된 단어이다(행 5:1).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이 크테에마는 바로 토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도, ‘밭’(hd,f', 잠 23:10)과 ‘포도원’(~r,K, 잠 31:16; 호 2:17; 요 1:11)이 바로 크테에마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돈은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팔라고 하신 것은 당시에 가장 대표적 재산인 토지, 그리고 토지 부착 재산인 주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무시한 분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때, 희년법이 토지와 (성 밖의 농촌과 레위인의) 주택에 대한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그 사람이 희년의 토지·주택법을 어기고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기 몫을 초과하는 토지와 주택을 팔아서 빈자에게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전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행 2:42) 순종하였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행 4:34-35).



여기에서 ‘밭과 집’의 헬라어는 복수형이고, ‘팔다’의 헬라어 시제는 로널드 사이더의 언급처럼 정기적이고 반복되는 행동을 나타낸다. 곧 자기 기업 몫만큼의 밭과 자기 가족이 사는 한 채 집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밭들’과 ‘집들’을 갖고 있는 다토지·다주택 소유자들이 희년의 토지·주택 환원법을 어긴 채 초과 소유하고 있는 토지·주택, 곧 기업 몫만큼의 토지와 가족 거주 한 채 주택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 초과 소유 토지·주택을 정기적이고 반복적으로 팔아서 사도들을 통해 빈자에게 환원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초과소유 토지·주택 환원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그 결과 백성이 교회를 칭송하고,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아지는(행 5:13-14)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둘째, 로날드 사이더는 이 책의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경제적 균등’이라는 성경의 관점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그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경제적 균등의 의미에 대한 통찰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필자는 ‘경제적 균등’ 혹은 공평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다. 곧 하나님은 모든 사람 혹은 가족이 적어도 품위 있는 삶을 살 만한 돈을 벌고, 당당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땅, 돈, 교육)을 접할 수 있을 만큼은 균등한 경제적 기회를 갖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기회 균등은 이 책 4장에서 주장하듯이, 명백하고도 강력한 성경의 요구이다―이러한 요구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이행된다면, 이 책이 처음 나온 후 20년 간 일어난 변화 뒤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지독한 악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로날드 사이더, 10-11).




3. 단점



이 책의 단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날드 사이더는 제1부에서 ‘우리의 풍요에 대한 합리화’라는 본문 가운데 ‘구명보트의 윤리’에서, 불공평 분배의 문제야말로 빈곤 문제의 원인이라는 올바른 관점을 피력하면서도,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잘못된 논리를 일정 정도 수용하고 만다(로날드 사이더, 61-62).



“올바른 원조-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자립시키고 여성을 교육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원조-를 하면 인구 성장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로날드 사이더, 62).



결과적으로 그는 인구 증가가 오히려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에 의하면,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에 있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낸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인구가 많을수록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더 많아진다. 평등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인구의 자연증가는 개인을 가난하게 하기는커녕 언제나 부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헨리 조지 당대에,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임금이 크게 하락하여 자연의 관대함이 줄어들었음이 사실로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사례인 캘리포니아의 경우조차도, 자연적 요소의 힘은 줄어들었지만 인간적인 요소의 힘이 증가하여 이를 보상하고도 남았다. 자연이 인색한 곳에서 20명이 일하면 자연이 풍요로운 곳에서 한 사람이 생산하는 부의 20배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인구가 조밀할수록 노동의 분업이 더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생산과 분배의 경제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구 증가는 빈곤 문제를 초래하는 저주가 아니라, 그 반대로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인구 증가가 정치경제학적으로 축복이라는 헨리 조지의 사상은, 창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복’이라는 성경의 관점과 일치한다(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둘째, 로날드 사이더는 위의 본문에 이어서 바로 그 다음 ‘부자를 복음화함’에서, 막대한 돈을 들여 사치스런 예배당을 건축하는 풍조를 비판한다. 참으로 정당한 비판이다. 그런데 잘못된 사족이 붙어서 그 비판이 불철저하게 되고 만다.



“어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풍요한 생활 양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화하기는 매우 쉽다. 캘리포니아 주의 가든 그로브 커뮤니티 교회(Garden Grove Community Church)는 목사가 강단에서 단추를 누르면 물을 뿜는 여러 개의 분수로 장식된, 사치스러운 수백만 불짜리 건물을 갖고 있다. 담임 목사인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사치스러운 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우리는 교회 곁의 번화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풍요하고 비종교적인 미국인들에게, 아름답고 강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인용자) 사회 복지 사업가들은 우리가 오렌지 드라이브 인 극장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돈을 써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돈을 가난한 자들을 먹이는 데 썼다고 가정해 보라.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겠는가? 여전히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들이 더 성공적이고, 더 풍요하고, 더 관대해지고, 더 이타적이 되도록 고무하기 위해 지금 사용하고 계시는 이 엄청난 작전 기지를 갖지 못하셨을 것이다.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 때로는 타당하다(강조: 인용자). 하지만 하루에 1불로 생활하는 10억 이상의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검토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유리 성전을 건축할 것인가?”



왜 그가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 때로는 타당하다는 이야기를 이 본문에 넣었는지 참으로 아쉽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교회’는 로버트 슐러의 발언 첫 부분에 있는 “아름답고 강한 인상”을 고려할 때, 사치스럽거나 최소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건축하는 예배당을 가리킨다. 로널드 사이더는 이런 예배당이 ‘때로는’ 타당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배당은, 로널드 사이더 본인의 말처럼, 하루에 1불로 생활하는 10억 이상의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검토했을 때, 어느 경우에도 타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광은이 『메가처치 논박』에서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 대안 부분에서 옆길로 새 버린 것을 연상케 한다.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마저 자신의 교회라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메가처치가 해체되어야(중략: 인용자) 한다고 말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신광은, 341).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크기를 몇 명 선에서 제한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메가처치를 작은 교회로 쪼개야 하는가? 글쎄, 그래야 할지 모르겠다.”(347).



신광은 본인이 강조한 것처럼, 교회의 크기가 교회의 본질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당연히 메가처치는 해체해서 작은 교회들로 분립하는 것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일관성 있는 대안이 아닌가? 현재 2,000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서울 강남에 땅을 사고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하는 사랑의 교회의 담임 목사인 오정현은 그 사고방식이 로버트 슐러와 어찌 그리 닮았는가? 이런 잘못된 시도를 막아야 하는 한국 교회와 미국 교회의 현실에서 신광은과 로널드 사이더의 일관성 없는 대안과 사족은, 오정현과 로버트 슐러에게 변명거리를 주고 그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로날드 사이더 지음, 한화룡 옮김,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0.

무하마드 유누스 지음, 정재곤 옮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세상 사람들의 책, 2005.

신광은, 『메가처치 논박』, 도서출판 정연, 2009.

신현우, “예수와 토지: 마가복음 10장 17-31절 주해”, 성서한국대회 강의안, 2007.

제프리 D. 삭스 지음, 김현구 옮김, 『빈곤의 종말』, 21세기북스, 2006.

찰스 아빌라 지음, 김유준 옮김, 『초대 교부들의 경제사상 소유권』, CLC, 2008.

헨리 조지 지음, 김윤상 옮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1998.



- 로잔언약

The Lausanne Movement

로잔 언약

머리말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150여 개 나라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인 우리는, 그 크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우리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며 우리가 서로 교제하게 해주시니 매우 기쁘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행하시는 일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우리의 실패를 통회하고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복음화 사역에 도전을 받는다. 우리는 복음이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임을 믿고 이 복음을 온 인류에 선포하여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분부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그의 은혜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앙과 그 결단을 확인하고 이 언약을 공포하려 한다.



1. 하나님의 목적



우리는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되신 영원한 한 분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그의 뜻과 목적에 따라 만물을 통치하신다. 그는 자기를 위해 세상으로부터 한 백성을 불러내시고 다시 그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시어 그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의 부름받은 백성을 그의 종과 증인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 동화되거나 세상으로부터 도피함으로 우리의 소명을 부인하고 우리의 사명에 실패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를 고백한다. 그러나 비록 질그릇에 담겼을지라도 복음은 귀중한 보배임을 기뻐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 보배를 널리 선포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새롭게 헌신하려고 한다.



사 40:28; 마 28:19; 엡 1:11; 행 15:14; 요 17:6, 18; 엡 4:12; 고전 5:10; 롬 12:2; 고후 4:7



2. 성경의 권위와 능력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믿으며, 그 진실성과 권위를 믿는다. 성경 전체는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무오한 척도임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그의 구원 목적을 이루는 말씀의 능력을 확신한다. 성경 말씀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불변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오늘도 그 계시를 통해 말씀하신다. 성령은 어떤 문화 속에서나 모든 하나님 백성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들의 눈으로 이 진리를 새롭게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온 교회에 더욱 더 풍성하게 나타내신다.



딤후 3:16; 벧후 1:21; 요 10:35; 사 55:11; 고전 1:21; 롬 1:16, 마 5:17, 18; 유 1:3; 엡 1:17, 18; 3:10, 18



3.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



우리는, 전도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구세주는 오직 한 분이요 복음도 오직 하나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이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부인한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불의로써 진리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모든 종류의 혼합주의를 거부하며,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식의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거부한다. 유일한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한 유일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예수님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할 것을 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구원의 기쁨을 거부하며 스스로를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다.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전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말이 아니며, 또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공한다고 보장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전하는 것은 오히려 죄인들이 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한 회개와 신앙의 인격적인 결단으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영접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청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름 위에 높임을 받으셨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이 그를 주로 고백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갈 1:6-9; 롬 1:18-32; 딤전 2:5, 6; 행 4:12; 요 3:16-19; 벧후 3:9; 살후 1:7-9; 요 4:42; 마 11:28; 엡 1:20, 21; 빌 2:9-11



4. 전도의 본질



전도는 기쁜 소식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며, 기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죽은 자들 사이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과,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로서 지금도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전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대화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전도 자체는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에 초대할 때 우리는 제자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가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였음을 분명히 하도록 부르신다. 전도의 결과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과 그의 교회와의 협력, 세상에서의 책임감 있는 섬김을 포함한다.



고전 15:3, 4; 행 2:32-39; 요 20:21; 고전 1:23; 고후 4:5; 5:11, 20; 눅 14:25-33; 막 8:34; 행 2:40, 47; 막 10:43-45



5.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시요,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누구나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해 왔고, 때로 전도와 사회 참여를 서로 상반된 것으로 여겼던 것을 뉘우친다. 물론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나타내는 데 필수적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억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불의가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이것을 고발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주11)



행 17:26, 31; 창 18:25; 사 1:17; 시 45:7; 창 1:26, 27; 약 3:9; 레 19:18; 눅 6:27, 35; 약 2:14-26; 요 3:3, 5; 마 5:20; 6:33; 고후 3:18; 약 2:20



6. 교회와 전도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그리스도 역시 그의 구속받은 백성을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이 소명은 그리스도가 하신 것 같이 세상 깊숙이 파고드는 희생적인 침투를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비그리스도인 사회에 스며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 할 일 중에서 전도가 최우선이다. 세계 복음화는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할 것을 요구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의 바로 중심에 서 있으며,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단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는 스스로 십자가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 교회가 만일 복음을 배반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산 믿음이 없거나, 혹은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거나, 사업 추진과 재정을 포함한 모든 일에 있어 철저한 정직성이 결여될 때, 교회는 오히려 전도의 걸림돌이 되어 버린다. 교회는 하나의 기관이라기보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문화적․사회적 또는 정치적 체제나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요 17:18; 20:21; 마 28:19, 20; 행 1:8; 20:27; 엡 1:9, 10; 3:9-11; 갈 6:14, 17; 고후 6:3, 4; 딤후 2:19-21; 빌 1:27



7. 전도를 위한 협력



교회가 진리 안에서 눈에 보이게 일치단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전도는 또한 우리를 하나가 되도록 부른다. 이는 우리의 불일치가 우리가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 손상시키는 것 같이, 우리의 하나 됨은 우리의 증거를 더욱 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직적인 일치단결은 여러 형태가 있고, 그것이 반드시 전도를 진척시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성경적 신앙을 소유한 우리는 교제와 사역과 전도에 있어서 긴밀하게 일치단결해야만 한다. 우리의 증거가 때로는 사악한 개인주의와 불필요한 중복으로 인해 훼손되었던 것을 고백한다. 우리는 진리와 예배와 거룩함과 선교에 있어서 좀더 깊은 일치를 추구할 것을 약속한다. 우리는 교회의 선교 사역을 확장하기 위해, 전략적 계획을 위해, 서로서로 격려하기 위해 그리고 자원과 경험을 서로 나누기 위해 지역적이며 기능적인 협력을 개발할 것을 촉구한다.



요 17:21, 23; 엡 4:3, 4; 요 13:35; 빌 1:27; 요 17:11-23



8. 교회의 선교 협력



선교의 새 시대가 동트고 있음을 우리는 기뻐한다. 서방 선교의 주도적 역할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하나님은 신생 교회들 중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위대하고도 새로운 자원을 불러일으키신다. 그렇게 해서 전도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 속해 있음을 밝히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지역을 복음화 함과 동시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선교사를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과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선교 책임과 선교 역할에 대한 재평가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교회들 간의 협동은 더욱 강화될 것이며, 그리스도 교회의 보편성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경 번역, 신학 교육, 방송매체, 기독교 문서 사역, 전도, 선교, 교회 갱신, 기타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여러 단체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울러 이런 단체들도 교회 선교의 한 사역자로서 그 효율성을 평가하기 위해 지속적인 자기 검토를 해야 한다.



롬 1:8; 빌 1:5; 행 13:1-3; 살전 1:6-8



9. 전도의 긴박성



인류의 3분의 2 이상에 해당하는 27억 이상의 인구(1974년 자료)가 아직도 복음화 되어야 한다.(주13) 우리는 이토록 많은 사람을 아직도 등한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는 우리와 온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비판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례 없는 수용 자세를 보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와 모든 선교 단체들이 복음화 되지 못한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세계 복음화를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을 시도해야 할 때임을 확신한다. 이미 복음이 전파된 나라에 있는 해외 선교사와 그들의 선교비를 감축하는 일은, 토착 교회의 자립심을 기르기 위해 혹은 아직 복음화 되지 않은 지역으로 그 자원을 내보내기 위해 때로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겸손한 섬김의 정신으로 더욱더 자유롭게 육대주 전역에 걸쳐 교류해야 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좋은 소식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일 기회를 얻는 것이 목표다. 희생 없이 이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빈곤에 우리 모두가 충격을 받으며, 이 빈곤의 원인인 불의에 대하여 분개한다. 우리 중에 풍요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은 검소한 생활양식을 개발해서 구제와 전도에 보다 많이 공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확신한다.



요 9:4; 마 9:35-38; 롬 9:1-3; 고전 9:19-23; 막 16:15; 사 58:6, 7; 약 1:27; 2:1-9; 마 25:31-46; 행 2:44, 45; 4:34, 35



10. 전도와 문화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전략 개발에는 상상력이 풍부한 개척적 방법이 요청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도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내리면서도 자신들의 문화에 적합하게 맞추어진 여러 교회들이 일어날 것이다. 문화는 항상 성경을 기준으로 검토하고 판단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류 문화의 어떤 것은 매우 아름답고 선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그 전부가 죄로 물들었고, 어떤 것은 악마적이기도 하다. 복음은 한 문화가 다른 어떤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모든 문화를 그 자체의 진리와 정의의 표준으로 평가하고, 모든 문화에 있어서 도덕적 절대성을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선교는 복음과 함께 이국의 문화를 수출하는 일이 너무 많았고, 때로는 교회가 성경보다 문화에 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도의 전도자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해, 개인적인 순수성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겸손히 자신을 온전히 비우기를 힘써야 한다. 또한 교회는 문화를 변혁하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애쓰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



막 7:8,9, 13 창 4:21, 22; 고전 9:19-23; 빌 2:5-7; 고후 4:5



11. 교육과 지도력



우리는 때로 교회 성장을 추구한 나머지 교회의 깊이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또한 전도와 신앙적 양육을 분리해 왔음을 고백한다. 또한 우리 선교 단체들 중에는, 현지 지도자들이 그들의 마땅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격려하는 일에 매우 소홀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토착화 원칙을 믿고 있으며 모든 교회가 현지 지도자들을 세워, 지배자로서가 아닌 봉사자로서의 기독교 지도자상을 제시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신학 교육, 특히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신학 교육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모든 민족과 문화권에서 교리, 제자도, 전도, 교육 및 봉사의 각 분야에 목회자, 평신도를 위한 효과적인 훈련 프로그램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한 훈련 프로그램은 틀에 박힌 전형적인 방법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 기준을 따라 지역적인 독창성을 바탕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골 1:27, 28; 행 14:23; 딛 1:5, 9; 막 10:42-45; 엡 4:11, 12



12. 영적 싸움



우리는 우리가 악의 권세들과 능력들과의 부단한 영적 싸움에 참여하고 있음을 믿는다. 그 세력들은 교회를 전복시키고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교회의 사역을 좌절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자신을 무장하고, 진리와 기도의 영적 무기를 가지고 이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교회 밖에서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잘못된 복음, 즉 성경을 왜곡시키며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일을 통해서도 적들의 활동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적인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며,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속적인 생각과 행위, 즉 세속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면역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숫자적으로나 영적으로 교회 성장에 대해 주의 깊게 연구하는 것은 정당하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우리는 종종 이런 연구를 게을리 하였다. 반면, 어떤 경우에는 복음에 대한 반응에만 열중한 나머지 우리의 메시지를 타협했고, 강압적 기교를 통해 청중을 교묘히 조종하였고, 지나치게 통계에 집착한 나머지 통계를 부정직하게 기록하는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세속적인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세상이 교회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



엡 6:12; 고후 4:3, 4; 엡 6:11, 13-18; 고후 10:3-5; 요일 2:18-26; 4:1-3; 갈 1:6-9; 고후 2:17; 4:2; 요 17:15



13. 자유와 핍박



교회가 간섭받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 그리스도를 섬기며,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평화와 정의와 자유를 보장해야 할 의무는 하나님이 모든 정부에게 지정하신 의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고 유엔 인권 선언에 규정한 바와 같이 종교를 믿으며 전파할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또한 부당하게 투옥된 사람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이유로 고난받는 우리 형제들을 위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우리는 그들의 자유를 위해 기도하며 힘쓸 것을 약속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협박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불의에 대항하고 복음에 충성하기를 힘쓸 것이다. 핍박이 없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딤전 2:1-4, 행 4:19; 5:29; 골 3:24; 히 13:1-3; 눅 4:18; 갈 5:11; 6:12; 마 5:10-12; 요 15:18-21



14. 성령의 능력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증거하라고 그의 영을 보내셨다. 그의 증거 없는 우리의 증거는 헛되다.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선교의 영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성령 충만한 교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지 못할 때 그 교회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요,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온 세계 복음화는 오직 성령이 교회를 진리와 지혜, 믿음, 거룩함, 사랑과 능력으로 새롭게 할 때에만 실현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한다. 주권적인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성령의 모든 열매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고, 그의 모든 은사가 그리스도의 몸을 풍성하게 하기를 기도하기 바란다. 그때에야 비로소 온 교회가 하나님의 손에 있는 합당한 도구가 될 것이요, 온 땅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고전 2:4; 요 15:26, 27; 16:8-11; 고전 12:3; 요 3:6-8; 고후 3:18; 요 7:37-39; 살전 5:19; 행 1:8; 시 85:4-7; 67:1-3; 갈 5:22, 23; 고전 12:4-31; 롬 12:3-8



15.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권능과 영광 중에 인격적으로 또 눈으로 볼 수 있게 재림하셔서 그의 구원과 심판을 완성하실 것을 믿는다. 이 재림의 약속은 우리의 전도에 박차를 가한다. 이는,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신 그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 기간은 하나님 백성의 선교 사역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종말이 오기 전에는 우리에게 이 일을 멈출 자유가 없다. 우리는 또한 마지막 적그리스도에 앞서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리라는 그의 경고를 기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이 땅 위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한 자기 확신의 환상으로 간주해 이를 거부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요, 우리는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또 의가 거하고 하나님이 영원히 통치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시는 그의 권위에 기꺼이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와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우리 자신을 다시 드린다.(주16)



막 14:62; 히 9:28; 막 13:10; 행 1:8-11; 마 28:20; 막 13:21-23; 요 2:18; 4:1-3; 눅 12:32; 계 21:1-5; 벧후 3:13; 마 28:18



맺음말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결심에 따라 우리는 온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계획하고, 일할 것을 하나님과 우리 상호 간에 엄숙히 서약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이 일에 우리와 함께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언약에 신실하도록 그의 은혜로 도와주시기를 기도한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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