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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07. 2017

그람시와 헤게모니

정치커뮤니케이션_한림국제대학원

정치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실재

그람시헤게모니


들어가기


학문을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심 혹은 자존감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 우리가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보아야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으로서 학문을 하라. 소망과 믿음만 있으면 악인이 된다. 사랑이 없이 행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소진과 악덕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다.  



오늘, 키워드


헤게모니 유동성 / 유동적 위기 접합 articulation 종별성 specificity우연성구멍난 내러티브



소쉬르, 언어세계


우리는 말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말이 만들어주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서양세계의 합리주의는 사실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의한 랑그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의 빠롤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언어가 만드는 과잉현실에서 살고 있다. 모든 사물은 과잉대표되고 있다는 것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은 그래서 이러한 현실에서 많은 어택을 당한다. 무엇인가 우리를 열받게 하거나 발작하게 하는 것들이 삶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서 힘들어지게 된다. 현실과 현실을 대표하는 것들과의 괴리 때문이다.



정신분석, 자아


광기, 분노, 슬픔, 외로움' 사피엔스종들의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것들이다. 외로움은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 현실이 바뀌면, 언어적 현실과 괴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정신분석학은 자신을 알아가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학문이다.



알튀세르, 언어


힘, 억압, 권력. 지배라는 개념이 모두 언어 안에 담겨져 있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마다 구분, 차별, 분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과잉대표되고 있는 것이다. 분류 속에서 차별이 온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 사물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남자'라는 단어가 발화되면, 남자를 제외한 모든 종류에 대해서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정말 그렇게 남자, 여자로 구별될 수 있는가? 끊임없이 구분하는 언어는 권력관계의 다른 모습이다. 구분과 증오는 같은 것이다. 생물학적인 증오가 아니라 언어적 증오는 구분되는 순간 발생하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정신을 통해서 무의식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알튀세르가 정리했다. 권력작용도 무의식 속에서 작용한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보는 틀이다. 세상을 보는 창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우리는 슬퍼하고 기뻐하고 외로워하고 있다. 무의식은 감정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은 무의식을 드러내는 작용이다. 생물학적 상황이 아니라 언어 세계 안에서 감정이 상하거나, 좋아지는 것 말이다. 감정이입은 왜 생기게 될까? 말 몇마디로 어떻게 감정적 격발이 될까?



이데올로기, RSA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우리는 처벌 받는다. 처벌에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전부라고 했고, 이데올로기는 최종심급에 의해서 결정된다. 유물론이다. 실천은 이미 사회적 실천밖에 없고, 개인의 실천은 없다라고 알튀세르는 말한다. 마르크스는 생산관계가 가장 근본적인 세상의 툴이라고 말했다.



그람시, 카운터헤게모니


그람시는 문화연구에서 볼 때, 상부구조가 토대 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억압상태를 가능하게 했던 헤게모니가 지배력을 잃으면서 동의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럴 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카운터헤게모니이다. 카운터헤게모니블록은 주체의 다양성을 가지고 온다. 이러한 카운터 헤게모니는 유동성의 위기를 가지고 온다.헤게모니의 이동이 예사오디면서 유동성을 가지고 오게 되는 것이다. 카운터헤게모니를 결집시키는 기제가 없이는 전복subversion이 일어나지 않는다. 새롭게 신뢰를 받고, 새로운 동의를 획득한 특정한 세력이나 생각들이 지배 계급에 대해서 정치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되었을 때 대항헤게모니가 출현하게 된다.



위기, 그람시


낡은 것이 죽은 것 가운데 있지 않고, 태어난 것이 새로운 것에 있지 않다. 위기는 문제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철학이나 대안이 등장하지 않을 때를 말한다_그람시



그람시, 시민사회


국가는 경제적 계급들 사이의 계급투쟁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란느 기반 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그람시에서 있어서 국가는 '강권적 기구를 통하여 일반대중을 자본주의 생산과 경제에 합당한 정향을 갖도록 하는 정치사회를 이야기한다. 반대로 '사회화 기능을 통하여 집단 의지를 배양하는 이른바 사적 조직체의 수단에 의하여 특정 지배그룹이 전 국가사회에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시민사회가 있다. 그리고 국가와 시민사회는 적절한 균형을 가지고 있다. 국가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결합 또는 강제력이라는 갑옷으로 보호되는 헤게모니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이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그들이 지배하는 대중의 능동적인 동의를 확보하게 되는 실천적, 이론적 행위의 총체적인 복합체로서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담당하게 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지배계급에 의해 용인되는 협소한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발적 동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사회질서의 수호자로서 국가의 강제력이 표면에 드러나고 또한 조직화된 강제력의 존재 그 자체로 동의를 유발시키기 이루어진다. 조직화된 강제력의 존재 그 자체가 동의를 유발 시킨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사적 제도들을 통해 피지배계급에게 행사된다는 점이다.



지배, 피지배


라캉식으로 하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무엇인가에 항상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정신현상과정은 주인을 영접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은 무엇인가를 영접할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헥 되면 데카르트, 칸트적인 관념론이 아니라,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주인으로 영접할만한 주체적 근거를 가지고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에 종속되어서 지배에 대한 동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람시, 우연성


그람시주의의 가장 핵심은 역사가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역사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붕괴였다. 하지만 그람시가 전제하고 설명했던 이론들을 생각해 보면 역사는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서 우발적으로, 우연적으로 질서를 만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지젝, 신헤겔주의자


라캉을 경유한 신헤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이 이야기하는 헤겔은 그래서 좀 다르다. 라캉을 들렸다가 가기 때문에 헤겔이 말했던 변증법이 정신분석학적인 욕망그래프를 반영하게 된다.



악, 절대 악


절대악은 존재하는가? 절대악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절대악이라고 지칭하는 순간 그 존재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당위가 생긴다. 또한 방관하고, 방치한다.



피스크, 일상투쟁


우리는 거대한 구조가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싸움, 주체적 싸움을 하고 있다. 이것이 더 나아가면 종별투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남성성의 획득, 여성주의의 확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 이러한 현실사회에서의 표현은 거대한 구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매번 싸워야하는 개념들인 것이다. 의식화된 지식인은 민중이다'라는 뱅가드 이론을 생각해보자. 레닌이 이야기했던 피지배의 편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피지배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람시, 접합


그람시의 이야기가 다 진리이지 않겠지?전복, 혁명, 대항이라는 것은 정치적 투쟁이 있은 후에 토대가 변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람시는 상부투쟁이라고 하지 않고 정치투쟁이라고 이야기한다. 전복, 혁명, 대항이라는 실천의 문제는 상부구조 즉 정치투쟁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람시에 의하면 우연성에 의해서 대항헤게모니를 만들지 않으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토대투쟁은 언어 투쟁이 아니다. 무력으로 계급투쟁 후에 토대를 변화시키면 자동적으로 변화된다고 보는 것은 초기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헤게모니와 대항헤게모니를 생각해보자. 종별성은 삶의 가장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빈민, 방화동, 학생 등등 여러가지 개념들이 종별로 배열되어서 굳어진 헤게모니 개념에 대항한다. articulation이라는 것은 접골구조라고 할 수 있다. 뼈와 뼈가 연결되는 개념말이다. 대항헤게모니는 삶의 분접구조를 가지고 연대와 단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대항헤게모니는 종별성의 구성을 가지고 연결과 연대되면서 새로운 조직과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인민전선이라는 것은 이러한 종별성의 총체인 접합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푸코, 다원성투쟁


그러나 푸코와 같은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영웅, 대, 큰, 선, 존, 귀, 성, 적 등을 규정하는 집단이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그러나 이것을 대항헤게모니로 보지 않고 다원성 투쟁으로 가지고 간다. 다수성에 대항해서 다원성이 헤게모니로 등장한다.



지젝, 라캉


지젝은 위에서 설명한 그람시의 개념을 2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한다. 위대한 저녁(혁명이 있었던 날) 이후에 혁명의 다음날'은 사실은 어제와 똑같이 진행이 된다. 프랑스에서 68혁명 이후 혁명주의자들이 라캉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혁명을 평가하는가?라캉은 말했다."여러분들은 또다시 또다른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혁명 이후에 더 안 좋은 혁명대상이 나타난다. 기존의 모든 질서를 모두 뒤집는 신적폭력으로서의 혁명이 나오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혁명은 실패한다_알랭바디우



구멍난 내러티브, 피스크


우리는 어떤 언어, 어떤 이론을 듣는다해도 현실에서는 항상 반대 혹은 예외 상황을 만난다. 그리고 나면, 우리의 이야기 중에 구멍난 이야기 구조, 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 그람시


그람시와 알튀세르는 정말 많이 다르다. 그러나 동시에 소쉬르에 그람시안이라고 할 때는 상대적 투쟁, 정치적 투쟁, 종별적 우연성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람시안들은 프로레탈리아, 보편적 역사 및 보편자 논쟁을 부정한다. 어느부분에서 보면 문화연구자들은 대부분 그람시주의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피스크, 상호텍스트


모든 텍스트는 의미의 결합이 일어나는 공간이 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개념이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상호적으로 만들어진다. 하나의 텍스트로 정리되지 않는다.



민네이션


그렇다면 이렇게 까지 논의를 발전시켜 놓고 보면 우리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사람들의 무의식을 자극하거나, 의식에 대해서 설득하는 작업들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앎으로, 혹은 언어로 감정이 촉발이 되었다면 반대로 앎으로, 언어로 감정이 해소될 수도 있는가? 분접구조 혹은 접합의 개념을 가지고 오게 되면, 비로소 조작정 정의가 가능해진다.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가? 종별성을 가진 대항헤게모니의 구성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배치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혁명이 성공하는 대항헤게모니의 파워가 가늠된다.



그람시, 논문내용


그람시는 유기적위기와 국면적 위기라는 중요한 두 계기를 구분한다. 전자가 경제적 모순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구조적 모순의 산물이라면, 후자는 헤게모니 개념에 의해 매개되는 보다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의 위기이다. 전자는 후자가 전개되는 지형을 형성시키는 기본적인 토대만을 제공하고, 역사적 변혁은 개방성을 지니게 되고 또한 그런 의미에서 특정한 시기의 지배적 헤게모니는 경제적 지배계급의 귀속적 지위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국면적 위기 상황에 있어서 치열한 계급투쟁을 통해서 확보된다.





참고1_위키피디아


안토니오 그람시


출생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사르디니아

사망 1937년 4월 27일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인 옥사

국적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직업 철학자, 정치인

안토니오 그람시(이탈리아어: Antonio Gramsci, 1891년 1월 22일 ~ 1937년 4월 27일)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반 파시즘을 주장한 이탈리아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지도자와 사상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며 한 때 지도자이기도 하였으며,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서 투옥되었다. 그는 문화 및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비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


유년시절

여유있는 집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알레스에서 7형제중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사르디니아의 민중들은 이탈리아 변두리에서 사는 가난한 소작인들이었지만, 그람시의 집안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여유가 있는 알바니아 사람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는 부르봉 왕가의 헌병대 대령이었으며,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탈리아가 통일될때까지 대령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폴리출신으로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람시의 어머니도 보카치오시인의 글을 읽을만큼, 보기 드물게 지적 소양을 지닌 여성이었다.


집안의 어려움

부친은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하급정부관리로 일하다가 공금횡령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구속된 진짜 이유는 지방유지들에게 밉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방유지들의 독재가 만연해 있었는데, 안토니오 그람시의 아버지는 이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1] 그래서 어머니는 1904년 아버지가 석방될때까지 삯바느질과 텃밭농사로 가정을 돌봐야 했고 쓰다버린 초의 토막을 다시 썼다. 4살때 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병약[2]그람시도 하루에 열 시간이상 일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그럼에도 호기심, 상상력, 밝은 성격,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년이었다. 몸이 약하니까 격렬하고 거친 놀이는 못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렸고 독서와 나들이를 좋아하며 고슴도치와 도마뱀을 보고 관찰하였다.

사회주의 입문 편집

아버지가 석방되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그람시는 1908년 칼리아리 고등학교에 재입학했으며, 형 젠나로와 동거했다. 젠나로는 토리노에서 군복무하던 중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liano, PSI, 1892년 결성-1994년 해산)을 선전하는 팸플릿을 동생에게 보내주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르디니아는 영화 《빠드레 빠드로네》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들이 배움의 중요성을 모르는 무지와 가난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학교가 아니라 산꼭대기로 올려 보내서 양을 치게 할 정도로 가난한 동네여서, 광부들과 농민들의 민중 운동이 치열했는데, 그들의 생존권 투쟁은 모두 군대와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이를 보고 자란 그람시는 자연스럽게 역사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생 시절

1911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람시는 학문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지역 장학생으로 선발돼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 시절 그는 학문(그리스 문학, 역사,철학, 언어,법학)을 공부했으며,그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산 전공학과(언어학) 교수의 권유와 언어와 철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나쁜 건강탓에 1915년 4월 문학시험을 끝으로 대학교를 중퇴하였다.


사회주의운

1913년 친구 타스카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입당한 그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업도시인 토리노에서는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활발하여,가두시위(1904년), 금속노동자들의 파업투쟁(1912년,노동조합이 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75일간 진행됨),금속노조(FIOM)의 지도로 진행된 파업투쟁(1913년,93일간 진행됨)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를 본 그람시는 토리노 노동자들이 북부 자본가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단결력과 남부 농민대중을 이끌 수 있는 지도능력이 있음을 알았다.그래서 그는 1915년부터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 <전진 Avanti> 토리노판 편집위원회 활동, 사회당 지역주간지 《민중의 외침》(Grido del Popolo)에 정기적으로 글을 썼는데, 그의 관심분야는 사회와 정치,노동운동, 제 2 인터내셔널의 짐머발트 회합, 반전결의, 문화비평등 다양하였다. 1917년에는 《전진》에 〈자본에 대한 혁명〉(여기서 말하는 자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말함.)을 기고하였다. 1917년을 전후로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대단히 전투적으로 전환되어가는데 서구사회에서 전개된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몰두, 점차 사회당 내 좌파 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1919년 토리노 대학교 동창인 안젤로 타스카, 움베르토 테라치니, 팔미로 톨리아티와 사회당 내 급진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할 잡지 <신질서 Ordine Nuovo> 를 창간하는데 이 잡지는 후일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가 됐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배경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이유는 사회당이 투쟁정신을 잃어버린 채 적당히 자본가,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어용정당이 되어간다는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당의 미온성

1919-20년(붉은 2년)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벌인 공장 평의회운동이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의 결탁으로 실패하자 그람시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운동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사회당의 미온적 공장 평의회 지지 및 전반적인 보수주의성향에 있다고 보고 사회당을 이탈, 1921년 리보르노에서 전투적 맑스-레닌주의의 면모를 갖춘 새로운 진보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다.


사회당의 무능함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20년대 초에는 두 가지 상극적이지만 중요한 현상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다. 노동운동이 대단한 호전성을 띠고 전개되는 한편, 이탈리아, 독일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이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1915년 전직 사회주의자 무솔리니에 의해 시작된 이탈리아 파시즘은 사회주의 운동에 공포심을 갖고 있던 제대군인들과 자본가들로부터 이미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당은 우유부단하고도 개량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정부와 타협하며 노동운동의 급진화에 제동을 거는 한편, 파시즘의 확산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공산당내 이념논쟁

초대 이탈리아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아메데오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사회당(PSI)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통해 이탈리아 내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도록 명하던 코민테른과 갈등하고 있었다. 그람시는 처음엔 공식적으로는 보르디가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의 사회당과의 연합을 반대했으나, 날로 증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위협을 절감하면서 차츰 보르디가의 완고한 비타협적 태도에 회의를 갖기 시작,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결국 끝까지 사회당 독자혁명을 고집하던 보르디가는 당내에서조차 차츰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1924년에서 1926년 사이 그람시가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체주의의 사회주의 탄압

사회주의 사냥

1922년 10월 로마 진군과 자본가,제대군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토양으로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의 전체주의정권은 집권 초기인 1922년과 1926년 사이, 노동운동에 대해 강온정책을 함께 사용해 대응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회진출을 허용하는 한편, 공장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같은 노동운동은 탄압하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 사회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등 이탈리아내 진보세력을 탄압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성장

이탈리아 공산당은 1924년 선거에서 10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의회에 진입하는데, 이때 그람시도 하원 의원이 됐다. 그람시는 1926년 1월, 프랑스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정식으로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돼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투옥과 죽음

무솔리니 정부가 그 해 가을 파시스트 국민당(PNF) 이외의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한 새 법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1926년 11월 경찰에 체포됐다.경찰은 불법정당 활동을 구실로 그람시를 체포했으나 실제로는 무솔리니가 명석한 머리로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그람시의 지도능력을 두려워해서 생긴 일이다. 그 증거로 수석검사는 재판에서 그람시는 매우 머리가 좋으니 20년간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로맹 롤랑을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은 '그람시가 무솔리니의 감옥에 갇혔다'고 비판하며, 그람시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람시는 재판에서 20년 4개월 5일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됐고 결국 1937년 4월 별세했다. 무솔리니는 사실상 그의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 된 후에야 그람시의 석방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가 숨을 거두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사상


그람시는 수감 기간 중 역사와 정치 분석을 기록한 공책을 30개 이상 남겼다. 이 글은 감옥에서 공책에 쓴 글이라는 뜻으로 《옥중수고》(Prison Notebook)라고 알려졌으며 그람시의 이탈리아의 역사와 국민주의 그리고 그람시의 것으로 인식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적 이론과 교육 이론 등이 담겨 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문화적 헤게모니

노동 계급으로부터 지식인을 배출하기 위한 노동자 대중 교육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정치 사회 (경찰, 군대, 법률 제도등)와 지도자층이 자발적으로 또는 non-coercively 형성되는 시민 사회 (가족, 교육 제도, 노조등)

절대적인 역사주의

경제적 결정주의 비판

철학적 유물론 비판

당시 사회주의자들과 맑스주의자들에게 당면 과제는 파시즘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그들의 대체적인 태도는 반동적 부르주아 운동의 또 다른 운동에 불과하다고 보며 파시즘 운동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라는 면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람시는 파시즘을 자유주의적 학자들처럼 단순히 서구문명의 일탈로 보는 것도 아니고 독점 자본주의의 극단적 지배 형태로 보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지지해야할 쁘띠 부르주아(소시민)와 노동자 계급조차도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점은 정통적 맑스주의자에게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였다.


자본주의 국가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

《옥중수고》는 그람시가 옥중에서 공책에 쓴 책이다. 그람시의 중요한 이론적 관심사는 자본주의 국가의 내구성과 안정성의 원인과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당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화되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는 점에서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그람시나 루카치에게는 물적 토대에 대한 분석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의식,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가 더 관심사였다. 그래서 그들을 "상부구조의 이론가"라고 부른다. 더욱 중요한 차별성의 하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자가 빠지기 쉬운 경제적/기계주의적 위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람시는 비결정주의적 역사관을 지향했다. 역사와 사회의 변화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참가하는 인간의 투쟁, 의지, 참여에 의해 결정되는 것.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미래가 그때그때 인간자의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본 것은 아니다. 기본적 지향은 사회주의이나 그것의 필연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에 대해 양쪽 모두를 비판한다.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여러 형태로 변화되긴 하나 필연적으로는 붕괴할것이라고 여긴다. 이에 비해 루카치, 그람시, 프랑크푸르트 학파들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장기간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왜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느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설명하려한 것이다. 루카치의 물화이론도 이런 맥락이며, 그람시는 정치학적 견지에서 자본주의의 지속성을 규명하고자 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학자는 1871년 파리 꼼뮨을 전후한 혁명적 노동운동을 보면서 그러한 것을 자본주의의 몰락의 징조로 보았으며, 레닌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보면서 자본주의 몰락의 징조를 발견하였음에 반해 그람시는 1871년 이후 혼란 속에서 자본주의가 벗어나 안정화되고 확산되어가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상부구조의 중요성, 특히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안정화되어가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림시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또 한 번 전도시켰다고까지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마르크스가 관념보다는 물질,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헤겔을 전도시켰다면,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강조하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적 토대의 기초를 떠나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를 보완,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의 주요개념은, ⓐ정치와 헤게모니, ⓑ역사적 지배블록, ⓒ시민사회와 통합국가(Integral State),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 ⓔ진지전과 기동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정치 또는 지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강제의 측면과 동의의 측면으로 어떤 사실, 어떤 지배도 100% 강제와 100% 동의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 두 개가 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유형이 달라지는 것이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포괄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마르스크주의과 다른, 진보된 국가론이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에서는 국가는 강제기구라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지배와 착취를 위한 수단,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그람시는 국가가 강제와 동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진다고 간파했다. 국가가 지닌 기능의 복합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람시는 현실주의적 정치이론을 최초로 정리한 마키아벨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훨씬 더 확장, 발전,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경쟁적 자본주의에서 독점적 자본주의로 발전해가면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갔다고 보았다. 경찰국가가 아니라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이다. 마르크스 시대의 국가는 경쟁적 자본주의 시대의 국가로 시장질서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면서 기본적 질서만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국가는 경제사회영역에서 사회적 재생산을 주도하며 더 나아가 복지 국가로까지 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해주는 기능과 역할로까지 확대되었다. 국가는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시민사회를 통해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확장시키려고 확립하였다.


국가라는 것은 공적 영역의 대표이며 시민사회는 사적인 영역의 대표이다. 마르크스는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질서가 국가를 매개로 공식화된다고 보았다. 즉 시민사회가 국가영역을 지배한다고 본 것이다. 국가기능이 점차 확대되면서 시민사회는 국가의 사적 네트워크가 된다. 그 시민사회를 통해 국가는 모든 의식과 조직에 침투할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며, 그런 속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일 수밖에 없다. 강제측면을 담당하는 부분은 정치사회이고, 동의를 창출하는 부분은 시민사회이다. 그람시의 국가는 "정치사회(강제)+시민사회(동의)"이다.


시민사회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서구의 사회과학속에는 국가(공적 영역)와 사회(사적 영역)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시민사회는 다양한 사회집단,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이런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는 바로 이런 시민사회 영역에까지 침투, 사회 각계 각층의 동의를 창출하면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구축한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통합국가이다. 통합국가는 시민사회까지 포괄하면서 독재(강제)와 헤게모니(동의)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헤게모니 이론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러시아 마르스크주의에 의해 계급동맹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마르스크주의 이론가들에게 헤게모니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그런 헤게모니를 그람시는 새롭게 해석했다. 계급적 동맹의 원칙의 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유형의 지배질서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 것이다. 이데올로기 매개로 기본적 집단과 추종집단이 융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지적·도덕적 수준에서까지 통합을 이루어내고 추종집단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까지 창출해내는 것이 헤게모니이다. 즉 헤게모니는 정치적 강제와 지적 도덕적 동의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마르스크주의의 헤게모니는 계급동맹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농민계급간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융합이라는 완전 통일, 통합된 형태이다. 헤게모니 구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단순히 기본계급의 이익을 추종세력이나 동맹세력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집단의 근본적 이익이 훼손되지 않는범위내에서 추종/동맹세력의 이익을 수용, 융합해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헤게모니지배가 구축될 수 있다. 따라서 헤게모니 집단이 되려면 자신의 조합주의적 이익(좁은 의미의 계급적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집단의 이익을 포괄,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헤게모니적 지배를 성립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헤게모니계급(집단)이 될 수 있다.


정치적 수준에서 출발, 도덕적, 지적 수준에까지 통합, 공통의 집단의지를 창출할 수 있을 때, 이럴 경우에 역사적 지배블록이 형성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변형주의(Transformism) : 수동적 동의이며 수동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파악. 기본집단들이 동맹집단에 의해 산출되는 능동적요소, 심지어는 적대적 집단으로부터 나오는 요소까지를 점진적으로 흡수, 그들의 반대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는 기존의지배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으로서 추구.

확장적 헤게모니 : 진정으로 다양한 계급의 융합의 폭을 넓혀 감으로써 마침내 민족적, 민중적의지로 까지 확장되어가는 헤게모니이다.

기본집단(기본계급)에 대해선 그람시가 분명하게 규명하지 않았다. 계급이란 개념은 경제적 개념이고, 집단이란 개념은 반드시 경제적 개념은 아니다. 기본계급이라고 할 때, 경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계급을 들 수 있다. 부르죠와와 프롤레타리아이다. 기본집단이라고 할 때, 사회/정치/문화/이데올로기영역에서 공통의 이익을 같은 것을 집단이라고 하기에 이것은 상부구조의 표현이다.


기본집단을 통해 나타나는 헤게모니는 그러므로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이다. 토대에서 형성되는 질서와 상부구조에서 형성되는 질서를 어떻게 집중시키느냐의 문제를 그람시는 애매하게 남겨두었다. 기본계급만이 기본집단으로서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람시를 마르스크주의라고 취급하는 것이다.


기본계급이 헤게모니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추종계급에 대한 확실한 리더쉽을 확립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도적 집단(공통이익, 세계관같은 이들의 집단)이 역할을 수행하며 지도적 집단을 매개로 헤게모니질서가 확립된다. 시민사회에서 기본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면서도 다른 세력의 이익을 이용/접합함으로써 헤게모니질서를 확립한다. 이때 나타난 국가는 통합국가이다. 통합국가는 정치사회(강제)+시민사회(동의)의 국가이다.


부르죠와 지배 질서는 강제기구로서 국가기구를 붕괴시킨다고 해도 강고한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한 부분이 남아 있는 한 부르죠와 지배 질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러시아의 경우 혁명적 세력이 강제기구인 국가를 파괴/점령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기동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경우, 핵심에는 국가기구로서 국가가 있지만 그 주변에서는 시민사회로서 참호가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기동전으로 당당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하나하나 참호를 점령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으로서 장구한 시간이 필요하다. 러시아 볼세비키의 혁명전략이 왜 서구사회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설명한 것이다.


그람시는 서구 부르죠와 지배 질서가 얼마나 강고하며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장고한 기간과 인내가 필요한가에 대한 것을 생각했다. 서구의 진지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는 이들은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보았다. 대중운동으로서 노동계급보다는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을 상당히강조했다. 레닌이나 루카치에게 있어서는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에게서보다 혁명적 지식인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람시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유기적 지식인

그람시는 지식인을 크게 두가지로 구분했다.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이다. 지식인이란, 인간의식, 관념, 사상 등의 상부구조 영역을 담당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인은 어떤 형태로든지 "계급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하부구조가 형성될때에는그것을 옹호하고 전파시키는 그들 나름의 지식인 계급을 배출시키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보면 모든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계급이 가진 집단의지를 결집/확산시키는 특수한 성격의 집단이고 이것이 바로 유기적 지식인이다.


전통적 지식인은 유기적 지식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창출한 생산양식이 붕괴되었음에도 살아남아 현존하는 사회계급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예술가, 작가, 철학자, 성직자 등이 그 유형이다. 모든 질서는 지도집단이 나오면 유기적 지식인 집단이 없이 헤게모니적 질서는 창출될 수 없다. 상부구조의 측면에서 기본계급, 지도적 집단의 세계관과 의지를 형성, 결집확대시키는 역할, 즉 계급적 지배가 헤게모니적 지배가 될 수 있게 한다.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대항해 저항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것대로의 헤게모니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의싸움이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쟁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싸움인 상황에서 유기적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신들의 이익과 세계관을 대변할 자신들의 유기적 지식인 집단들을 창출해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기 계급의 새로운 유기적 지식인을 창출함과 동시에 전통적 지식인을 자신들에게 동화시키려 했으며, 이러한 유기적 지식인의 진정한 존재 방식은 대중과 깊이 연결되어 실천 활동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유기적 지식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다른 계급의 이익을 포괄할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 저항 이데올로기를 제시하여 부르죠와적 이데올로기를 파괴시키고 나중에 정치적 부분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 그룹의 총체가 "당"이라고 봄으로써 당의 지도적 역할을 인정한다. 기본적으로 레닌주의적 전통속에 서구사회의 독자성을 추구하면서도 레닌주의의 틀속에서 그것을 추구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수정

그람시의 공로라고 한다면, 1920년대, 30년대에 정통적 마르스크주의들의 논리의 밑바탕에서 깔린 경제주의적 해석을 극복하려고 했던 최초의 마르스크주의 이론가이다. 경제주의적 해석의 특징은 무엇인가? 환원주의와 반영주의이다.


환원주의는 상부구조의 영역(정치문화등)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경제적 요인에 환원시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저항한 인물들이 루카치(계급의식의 중요성)와 그람시(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를 독자적 자율성을 갖는 영역으로 인식)이다. 반영주의는 국가는부르죠와 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도구적 기구라는 식으로 토대적인 것을 반영하는 기구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고 그 자체는 물질성을 갖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람시에게 이데올로기는 토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피동적/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자율성을 갖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기본명제 ①∼④에 주요한 수정을 가한다. 상부구조의 자율성과,이데올로기영역의 상대적 자율성, 물질성등이다.


결정론적 해석을 또한 배격한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배제된 어떤 객관적 힘, 관계,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점을 배격한다. 그람시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투쟁과 노력, 승리와 패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람시는 마르스크주의자이기에 자본주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의 강고성과 노동자 계급의 패배를 바라보면서 상당한 기간의 노력을 통해서만 사회주의적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긴다. 단순한 기계론적 과학주의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참고 2_헤겔의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이란?


노동에서 찾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여기서 우리는 새삼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주인과 노예가 뒤바뀌는 결정적인 계기를 노동에서 찾았다. 이 주인-노예의 장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인간 심리의 주인적 측면과 노예적 측면이라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는지는 헤겔이 죽은 지 1백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그것을 사회적 관점으로 보는 해석은 지배-피지배간의 계급투쟁이라는 역사적 유물론으로 흘렀고, 그에 대한 심리적 관점은 헤겔 우파를 형성했을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노예제를 염두에 둔 이 묘사가 기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관계의 진리와 노동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겔에 의하면 노예는 생산하는 자이고, 주인은 소모하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노예는 노동을 하고 주인은 그 생산물을 향유한다. 자연상태 속의 자연물은 그 조야성(粗野性)으로 인해 인간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향유하기 힘들다. 예컨대 살아 있는 소를 불고기로 상에 올릴 수 없으며, 땅에서 자라고 있는 뻣뻣한 배추를 맛있는 김치로 먹을 수는 없다.   이때 소나 배추 같은 자연물은 비록 그것이 사물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향유에 완강히 저항하는 자립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자연의 자립성과 대결하여 사물을 가공하는 것이 노예이다. 주인의 강제에 의해 사물과 투쟁적 관계에 들어간 노예는 지혜를 짜내어 물성(物性)에 따라 사물을 순치하는 능력을 터득한다.   이때 노예는 사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공, 생산하기만 한다. 즉 사물의 내용적 측면은 고스란히 긍정한채 그 자연물의 조야성만을 부정한다. 예컨대 뻣뻣한 배추를 소금에 절여 숨을 죽이고 양념을 가하여 먹기 좋은 음식물로 만들었을 뿐 배추라는 원래의 내용은 그대로 보존한다. 주인은 이 가공된 사물을 순전히 소비하고 파괴함으로써 그것을 향유한다.

  여기서 주인과 노예의 가치가 전도된다. 대상세계와 단절된 주인의 이 허망한 욕구는 노동을 통해 자연과의 통일을 이룬 노예의 삶에 비해 열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어떻게 결정된 것인가? 그것은 인정(認定)투쟁의 결과이다. 인간의 자기확신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전에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확신일 뿐 객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타인의 의식을 매개로 했을 때만 진정한 자기확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도 역시 나로부터 인정을 구하는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다. 여기에서 두 자기의식 사이에는 불꽃튀는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중 한쪽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타자에게 예속되는 결과가 일어난다. 이때 자신의 자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쪽이 주인이고, 자신의 자아를 포기한 채 생(生)을 택한 쪽이 노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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