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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07. 2017

바울과 하나님나라

기독연구원느헤미야_이형일교수

20170905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바울과 하나님나라_이형일

1강 바울시대의 역사적 배경


들어가기


오늘은 바울시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배운다.바울의 생애, 회심, 소명, 연대기를 배우면서 바울이 추구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이 살았던 로마시대의 구조와 특징, 바울이 속해 있던 유대교에 대해서도 알아볼 것이다. 바울의 생애인가? 소명인가? 학자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신약에서 바울은 13권의 책을 썼다. 그러나 모든 책이 바울이 지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리가전서, 빌레몬서는 바울이 썼다고 확신하지만 그 외에는 바울의 문체나 바울의 성향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위명서신이나 차용서신이라고 부르는데,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바울의 생각을 전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 관점


바울이 썼던 편지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통용되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부분부터 고민을 해야 한다. 2000년 전의 고대 문서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바울 서신을 읽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갭 사이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를 찾지 않으면 그 뜻과 의미를 제대로 알수가 없게 된다. 이것을 성경의 영감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중저작설dual authorship이라고도 부른다. 바울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또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기 때문에 이중저자가 성경을 썼다고 보통은 믿고 있다. 1세기의 글을 21세기의 상황에서 문자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기서 관점의 분류가 생긴다. 유대교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서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율법과 행위'에 대한 바울의 새관점이 생긴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유대교에만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로마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로마사회, 계급


원로원 계급 Senatorial class은 다스리는 계급으로 정치질서와 통치질서를 지배했다. 기사 계급 equestrians 기사 계급은 원로원 계급을 섬기면서 통치의 실제를 담당했다. 총독이나 백부장 같은 사람들이다. 평민 계급 plebeians은 주로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가장 많은 인구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전쟁포로 였다. 로마제국에서는 1/4가 노예이기도 했다. 자유민 freeman은 노예 였다가 돈을 내거나 어떤 계기에 의해서 자유롭게 된 사람이었다.



로마시대, 상황


후견인과 가신의 관계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와 데오빌로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처음에 등장하는 '데오빌로 각하여~'라고 하는 부분은 데오빌로에게 쓴 것이 아니라, 데오빌로가 후견인이기 때문에 축사의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서 16장 2절의 뵈뵈는 누구인가? 프로스타티스'(후견인)라는 이름으로 로마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로 뵈뵈가 바울의 후견인이었던 것이다. 로마사회의 여자들의 권리는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낮았다.



바울시대, 유대교


제 2성전기 유대교에서 자랐다. 솔로몬 시대의 제1성전은 바벨론의 의해서 파괴되고, 재건축되어서 주후 70년 로마로부터 다시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을 제 2성전기 유대교라고 부른다. 다양한 분파가 존재했는데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이었다. 공통점은 유일신 사상, 선민사상, 언약의 백성, 율법이었다. 바울은 헬레니즘 사상에 대한 영향과 함께 메시야를 기다리는 제2성전기의 시대적 배경을 끌어 안고 위와 같은 사상들을 고유하면서 삶을 살았다.



바울, 생애


서신의 바울과 사도행전의 바울은 구분되어야 한다. 서신의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1인칭 작가시점에서 쓰면서 명쾌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도행전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바울의 행태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또한 누가가 자신의 신학적 메시지를 담아서 바울을 평가하고 줄거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자신의 철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서신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상황이나 행태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의미를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울이 직접 쓴 서신이 가장 권위적이고 믿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의 역사성의 측면에서는 복음주의 학자들은 다르게 본다. 누가는 신학자만이 아니라 역사가라는 입장에서 사도행전이 과장되거나 위조가 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바울에 대해서 다른 관점이 존재하는 길들이 존재하기는 하다. 바울은 길리기아 속주의 다소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터키 북동부 지역이며 태어난 정확한 시기는 잘 모르고 대략 기원전 5년에서 기원 후 10년정도 사이로 추측하고 있다. 다소라는 지역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아닌 것으로 봐서, 디아스포라된 유대인이며 벤야민 지파에서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에서처럼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천부장 같은 경우 시민권을 돈으로 샀지만, 바울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부터 시민이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이름과 로마 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사울이라는 히브리어이름과 로마 이름으로는 파울루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사울에서 바울로 개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당시에는 원래  두개에서 세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다소라는 지역은 철학이 발달해 있었고, 언어는 공존했다. 헬라어와 아람어를 동시에 사용했으며, 히브리어도 간혹 쓰이기도 했다. 바울은 아람어로 설교를 하기도 하는데, 사도행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울, 이력서


사도행전 22장 3절에서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여심히 있는 자라'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옵션 1, 옵션 2로 다르게 해석되는 부분이 있다. 옵션 1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고등교육을 예루살렘에서 받았다. 옵션 2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예루살렘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고등교육을 예루살렘에서 받았다.  



바울의 편지, 고대의 편지


동시대의 다른 편지와 비교해 보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자료는 고대사회의 유명한 연설가들의 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실제 편지를 가지고 살펴 보자. 세네카와 같은 연설가도 편지를 썼고, 편지글의 형태로 많이 쓰는 경향이 있었다. 골로새서 4장 16절에서는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에가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아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서신에서 이중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공용어와 지역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공용어는 서방에서는 라틴어였고, 동방에서는 헬라어였다.



고대편지, 전형적 편지 구조


보통 3등분으로 구분되며 인사말, 몸통, 마무리하면서 마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인사말이다.



바울, 편지


바울은 자신의 친서임을 밝히기 위해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말한다. 위에서 말한 친서와 아닌 문서를 비교할 때 단어 선택과 수사학적 표현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이 사용한 수사학적 기법은 디아트리베라는 수사학적 질문과 키아스무스라고 하는 교차 대구법이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는냐?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하는 로마서 6장 15절은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형식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이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는 것이 교차 대구법이다.



순회철학자, 복음전도자


바울이 활동할 당시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했다. 여기서 후견인과 가신의 관계를 볼 수 있다. 바울의 경우 루디아를 만나고 복음을 전하고 집으로 초대를 받아서 후견인이 되었다.



바울서신, 애로사항


바울 서신의 해석의 애로사항이  존재한다. 서신서라는 형식에서는 모든 것이 다 설명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상황적 서신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적용하거나 해석할 수 없고 그것이 쓰여진 상황을 봐야 한다.




민네이션, 생각


바울은 어떻게 신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 되었는가?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사람들이 만든 것인가? 근본적인 고민이다. 예수님과의 권위에서 어떨 때는 더 높게 느껴지게 소개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울의 텍스트를 읽기위해서는 바울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바울의 생각이 담긴 서신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바울의 새관점과 옛관점이 나온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칭의와 구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관점들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결국은 해석학의 이야기가 결론이 된다. 같은 텍스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그렇지만, 같은 시대적 상황을 가지고 어떻게 바울을 볼 것인가도 중요하다.역사와 해석에 대한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사도바울에 대한 평가와 이해가 중요한 것은 상황과 단어선택과 인지적 능력과 문화 안에서 완전히 다른 방향성이 제시되기에 그렇다. 교단과 교리로는 쉽게 정의내릴 수 있지만, 그것이 진리가 아닌 이상은 여러가지 방법론과 해석학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 맞다.  



바울, 새관점


영욱의 성공회 출신 신학자인 샌더스, 제임스 던, 그리고 톰 라이트 같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새관점이다. 새관점이라는 것은 1세기 유대주의에 근거하여 바울의 서신을 이해하는 태도이다. 루터와 칼뱅에 의해 주창된 이신칭의론을 비판하고 칭의를 미래의 완성적 종말에 강조를 두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행위적-종말론적 요소를 새롭게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개신교의 법정적 칭의라는 핵심적인 주장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큰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만약 유대인들에게 '율법주의'가 없었고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그리고 바울도 궁극적으로 율법주의를 비판하게 아니라면, 지금의 구원론은 상당한 수정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새관점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서 부터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유대교를 오해하고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유대교 율법의 구원론 논의도 잘못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유대교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종교이며 율법의 행위를 강조한 율법주의는 없었다는 것이다. 파격적인 이 관점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미국의 신학자 샌더스였다. 유대교 문헌에 관심이 많았던 샌더스는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교에서 유대교 랍비 밑에서 공부했고 예루살렘에서 유대 문헌들을 연구했다. 1977년 출판된 그의 책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20세기 신학 분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이 책 422페이지에서 새관점에 대해서 언급한다. 새관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런 다음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은 선택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순종에 대해선 보상하시고 불순종에 대해서는 심판하신다. 율법은 언약관계의 유지 및 재확립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언약 안에 머무는 자들은 모두 구원받을 그룹에 속한다. 샌더스는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것과 언약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신앙을 가진 유대교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율법적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와 같은 측면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샌더스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율법인식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 nomism으로 명명했다. 이것을 기존의 율법주의와 다른 점은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단지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것이다. 율법 이전에 먼저 선택과 언약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은혜는 이스라엘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는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선한 행위는 언약 안에 머무르는 조건이지 그것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바울도 유대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게 샌더스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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