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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19. 2017

복음과 해석

복음주의자는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_이재근박사

20세기 세계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

_현대기독연구원/기독느헤미야2014 여름강좌

복음주의자는 성경을 어떻게 읽는가?


제 3강_20140701

*20세기 영미 복음주의의 역사적 발전



text--

1. 미국 (신) 복음주의의 시작과 기원

- 칼 헨리 ; 신학자

- 헤럴드 오켕카 ; 목회자

- 플러신학교 설립 ; 학교

- 빌리 그레이엄 등장

- 크리스채니티 투데이 창간




--lecture1  &

1947, 변화의 시작

- 전쟁의 폐막과 함께 영미권에서는 복음주의의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다.

- 근본주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 속에서도 그 영향력에 대해서 반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그 이유는 전쟁에 대한 긍정이다. 근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세상과 연결되는 신앙의 형태로 신복음주의가 시작된다.

- 뚜렷하게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1947년의 칼 헨리가 쓴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을 쓰면서 부터다.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

- 칼 헨리가 이러한 제목을 지은 이유는 근본주의의 틀 안에서 사는 것이 불편한 것에 대해서 새로운 선언이었다.

- 따라서 이러한 의미가 포함될려면 근본주의'에 대한 불편한 느낌이 담겨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어 제목에는 근본주의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 칼 헨리가 이러한 책을 썼을 때는 칼헨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 이 책을 쓸 당시에 칼 헨리는노던침례신학교 쇼수였고 보스턴 대학의 박사였다. 이 당시만 해도 근본주의자들 중에서 언론에 글을 쓰거나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근본주의적인 신학을 배우는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헨리는 박사학위를 일반적인 대학에서 받음으로써 이미 그 자체로 근본주의진영에 대해서 강력한 도전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 헨리는 오켕가와 마찬가지로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적인 부분도 유지하였다.


해럴드 오켕가

- 보스턴파크르스리트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 진보의 메카라고 불리우는 보스턴 안에서도 이 교회는 신앙의 근본적인 부분을 지키고 있었다.

- 오켕가는전미복음주의협회NAE를 만들게 된다.


ICC 그룹

- 칼 먜킨타이어는 몌이첀과의 관계가 어려워지자 페이스신학교를 만들게 된다.

- 종말론에서 전천년설을 주장해야 하고, 술담배를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 매킨타이어의 성격은 철저한 반공주의였다.

- ICC는 한국의 보수주의를 장려하고 고신을 장려하면서 기독교와 반공주의를 계속해서 연결시킨다.

- 매카시즘과 함께 기독교 내에서 칼 매킨타이어는 반공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보수적인 성향을 강화시킨다.

- ICC에 대해서도 오켕가와 헨리는 반대를 하면서 신복음주의의 균형을 이루어 간다.


플러신학교

- 최초에는  자발적인 학문연구소의 형태로 진행을 하다가 라디오 진행자인 찰스풀러가 학교를 세우게 된다.

- 찰스 플러가 발기인이 되면서 자금과 운영원칙들을 만들게 된다.

-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소재 복음주의학문연구소로 시작한 플러신학교는 총장인 오켕가를 중심으로 헨리(조직/윤리), 해럴드 린셀(교무/역사), 윌버스미스(변증), 에버릿 해리슨(신약)


빌리그레이엄의 등장, 대중성

- 빌리그레이엄은 사실 그렇게 신학적인 기반이 깊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부흥사였고, 전도자였기 떄문이다.

- 그러나 그레이엄을 통해서 신복음주의와 플러신학교는 유명세를 타고 그 세력을 넓혀가는 계기를 맡는다.

- 1949년 LA집회 이후 전국구 인사로 활동했으며 1948년부터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인 BGEA를 만들었다.

- 수 많은 전도자들이나 부흥사들 중에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끝까지 간 사람이 거의 없었음. 이 떄 당시 수 많은 기독교 리더들이 비리와 성스캔들로 추락한 경우가 많았다.

- YFC청소년 선교회의 간사로 처음에 활동했다.

- 처음에는 보수주의 신학교에서 활동하다가 플러에서는 신복음주의의 진영을 옹호하고 이후 런던집회에서 세계적인 전도집회자로 각광을 받으면서 뉴욕까지 와서는 진보진영까지 아우르는 세계적인 리더가 된다. 근 10년간 대부분의 진영을 아우르는 역사를 가지게 된다.


크리스채니티 투데이

- 성경에 근거한 기사들을 내면서도 현대의 문제들을 무시하지 않고, 학자들을 통해서 전문성을 제고했다.

- 총체적인 인식과 이해를 기본질서로 잡으면서 포괄적인 이해와 신학적인 기반을 지지하게 되었다.

- 다른 단체나 진영과 협력하면서 기독교 내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 된다.


밥 존스 대학교

- 현재까지 성경에 근거해서 성적인 문제를 포함한 모든 삶의 부분을 보수적인 가치로 무장한 곳이다.

- 처음에 빌리그레이엄은 밥 존스 대학을 다니다가 자신의 기질 상 복음주의의 메카라고 하는 리튼칼리지로 옮기고 그 이후에 플러에 합류하게 된다.


복음주의, 신 복음주의

- 데이비드 베빙턴의 4각형을 기억해야 한다.

- 십자가와 성경, 회심과 행동주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4가지를 전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 성경이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기본 골격을 가지고 있다.

- 신복음주의란 표현은 사실 칼 헨리와 오켕가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국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축자영감설, 오류설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 오류가능성은 없는가?

- 성경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민네이션

- 메타인지력meta-cognition을 가지는 것은 왜 중요한가? 복음주의 지형도를 그리게 되면  text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라서 현실이라는 context를 더욱 쉽게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정확히 적용할 수 있다.




--lecture 2


2. 영국 복음주의의 다양성 ; 잉글랜드 성공회, 스콜틀랜드 장로회, 잉글랜드 비국교회

- 잉글랜드성공회(저교회low church) 복음주의

- 1950년대 이후 자유주의적 복음주의 세력 이탈 및 그레이엄 영향으로 복음주의 경계선 설정이 상대적으로 쉬워짐

- 이전에는 '보수' 복음주의와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의 공존

-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나 지적으로 훨씬 예리하고 세련된 이미지의 복음주의 집단 이미지 구축 성공

- 존스토트

- 1950년 6월 올소울즈교회 교수 사제로 취임

- 근본주의와 전도1956 ; 교회와 사회 중심부를 침투하는 좀 더 문화적인 복음주의적 전도방법을 이야기 한다.

-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흐름을 강조하게 된다.

- 존스토트는 사제였기 떄문에 현실적인 이야기와 교훈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 제임스패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쓰고 유명해 진다.

-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적 정통으로서의 근본주의를 이야기 하게된다.

- 비국교도 복음주의

- 전반적으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SCM

- 예외는 침례교연합(찰스스펄전의 유산, 온건 복음주의) 및 개별 복음주의자가 많다.

- 마틴로이드 존재의 1966년 2차 전국복음주의자회의에서의 복음주의자 분리와 연합을 요청하게 된다.

- 성공회 복음주의에 비해 영향력이 미비했다.


IVF

- IVF는 성공회 기반으로 보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 각 대학들은 성공회의 기본적인 방침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앙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적인 흐름을 중시하는 ivf가 전세계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마틴로이드 존스

- 성공회가 아니기 때문에 저항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공부는 캠브리지에서 했음.

- 마틴로이드 존스는 교회론에 있어서 50세가 지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 로이드 존스는 1966년 2차 전국복음주의자회의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 성공회와 보수주의에 대해서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분리와 연합을 이야기한다. 복음주의의 원래 순수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분리와 새로운 연합을 이야기했지만, 영국적인 분위기에서는 새로운 교단이 탄생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존스토트는 반대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 이 사건 이후에 마틴로이드 존스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하락한다.

- 이후 이함 머리라는 제자를 통해서 그 맥락을 유지하게 되지만, 영국에서는 존스토트의 학문적인 도전과 성과가 더 중요해지게 된다.

- 스콜틀랜드 국교회(장로교)

- 개혁파 중도 ;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칼 바르트의 신학이 중심이 된다.

- 1급 세속 학문성과 신학/목회 훈련의 조화를 추구했다.

- 대학은 세인트앤드류스, 아버딘, 글라스고, 에딘버러였다.

- 비국교회는 주로 자유교회 및 침례교였으며 1832년대분열 이후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민네이션

- 성공회라는 영국적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책을 많이 읽은 목회자가 전하는 전도의 방식과 설교는 당연히 미국적인 배경을 가진 목회자와 다를 수 밖에 없다.

- 우리가 든는 대부분의 설교 말씀은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 그렇다면 애매하게 왔다갔다 하는 설교의 형식을이해하지 못하는 소위 평신도들의 사상을 탓할 수는 없다.

- 청교교도는 역사적으로 아이러니하게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자유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인 진보화를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마틴로이드존스의 책과 이야기, 설교가 유명해졌는가?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이 그 이유인가? 교회의 분열이나 연합이 필요한 시점이여서 그런가?

- 로이드 존스가 쓴 책들을 1966년을 기점으로 해서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 설교라고 다 같은 설교가 아니다.


성공회신학, 영국의 분위기

- 성공회는 언제든지 카톨릭과 급진적인 개혁파의 중간적인 형태를 띄었다.

- 성서비평과 진화론이 유입되어서 영국에서 유행을 할 때에도, 성격상 과격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 미국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고등비평과 진화론에 대해서 극명하게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형태로 나누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 영국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대륙적인 기질보다는 개인적인 기질이 많이 보편화되어서 자유롭고 중도적인 부분이 강조되었다.

- 따라서 분파주의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80%의 국민들이 성공회에 포함되어 있다. 미국은 교파가 나눠 지면서 수 많은 섹터를 갖지만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 보수적이나거 진보적으로 치열하게 발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장점이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알래스터 맥스라스의 책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통합성과 메타인지력의 깊이는 좋은 평가를 하지만, 보수진영과 자유진영은 동시에 두루뭉수리하게 이야기함에 대해서 비판을 하게 된다.

-영국, 미국 복음주의자

- 사회분위기와 교파의 분리상 미국은 보수주의에 대한 반발 세력에 불과했지만, 영국에서는 복음주의가 성공회 안에 존재했고 IVF와 여러 출판사 그리고 옥스퍼스와 캠브릿지를 통해 지성적인 측면을 발전시킨다.

- 영국과 미국 사이 호주와 뉴질랜드, 캐나다는 영국 성공회의 칼바르트와 존스토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 영국은 지적인 형태의 복음주의가 발전했고, 미국은 좀 더 열정적이고 행동적인 성격의 복음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복음주의 성경연구, 성경관 논쟁, 강해 설교


1. 영국

- 틴들 성경연구회

- 틴들성경연구회가 중심이 되어서 IVF 성경연구위원회1938, 연례 틴들 신구약연구강연1942, 틴들하우스1944, 틴들 성경연구회1945로 발전하게 된다.

- 잉글랜드의 복음주의는 어떻게 반계몽, 반지성 딱지를 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지성은 대부분 영국에서 배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성서학의 부흥

- FF브르스(리즈/맨체스터), WJ마틴(리버풀), 하워드 마셜(아버딘), NT라이트(더럼/세인트앤드류스), 데이비드 브러턴 녹스(호주), 레온 모리스(호주), 그레이엄 스탠털(뉴질랜드), 조지래드(플러), 브루스 메츠거(프리스턴TS)

- 여전히 성서학은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되고 있다. 현재 대부분 영국의 신학교의 학생들은 80%가 미국학생들이다.

- 영국 종합대 출신성서학 박사 취득자의 미국 포함 영미권 신학기관 지배

- 복음주의 학자의 종합대 진출 및 신학기관 및 대학기관의 일원화가 일어난다.

- 영국은 그 배경이 성공회이고 주류이기 때문에 미국처럼 따로 신학교를 만들 필요가 그다지 없었다. 따라서 수 많은 대학들에 있는 신학과에서도 충분히 그 핵심을 배울 수 있었다.


2. 미국

- 플러신학교 논쟁

- 1960년에서 70년 사이에 플러신학교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다. 지금 플러는 중도를 걷는다고 말할 수 있다.

- 에드워드 카넬 ; 신복음주의 대신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확장시켰다. 정통신학론이라는 책에서 근본주의를 비판하고 더욱이 그레셤 메이첸을 공격한다.

- 성경무오논쟁이 일어나면서 찰스플러의 아들인 대니얼 플러가 학감으로 취임하고 데이비드 허바드가 총장으로 취임한다.

- 초기 함꼐 플러를 시작하면서 신앙관을 지켰던 해럴드 린셀 부총장이 1964년에 사임하게 된다.

- 대부분의 보수적인 미국신학교에서는 신앙고백서에 축자영감서를 담고 있다.

- 그러나 1972년 신앙선언문을 개정하면서 완전 축자영감설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성경은 신앙과 실천의 유일 무오한 법칙'이라는 구절만 남기고 다른 부분은 자유롭게 풀어준다.

- 1976년 the battle for the bible이라는 교회와 성경무오성' 책을 발간하면서 해럴드 린셀은 플러신학교와 전쟁을 시작한다. 복음주의의 근본으로 돌아오라는 경고를 담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적나라하게 글을 쓴다.

- 1978년에는 린셀과패커, 그리고 프란시스 쉐퍼가 플러는 이전의 복음주의의 순수성을 잃어 버렸다고 선언하면서 시카고성경무오선언을 하게 된다.

- 1983년 복음주의 신학회와 1985년 남침례교단은 자유로운 신학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을 해임시킨다. 성경의 보수성을 확고하려는 이전세대의 전쟁이었다.

- 현재도 남침례교단은 더욱 보수성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 고든콘웰과 트리니티도 보수성이 강하다.


민네이션

- 사실은 1930년의 고등비평은 아직도 개인들의 역사에서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성경무오설과 오류설은 개인들의 신앙의 역사에서 끈질히게 투쟁하고 있다. 이러한 context를 이해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는 경향이 강하다.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도 그렇지만,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선택과 집중의 방식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집중해야 하는가?

- 종교다원성과 이스람에 대한 이해가 또 다르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리차드니버가 이야기한 그리스도와 문화의 분류법이 유명하긴 하지만 사랑의 측면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보아야 하는가라는 다소 두리뭉수리한 사견이 있다.

- 역사를 안다는 것은 현재 구조화되어가는 상황을 읽고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확보한다는 것의 다름아니다.

-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정적인가? 신앙적인 열정도 그렇지만 분리와 연합에 대해서도 왜 이렇게 열정적인가?

- 우리가 갈급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도들이 갈급해 하는 것과 목회자들이 갈급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 사실은 이러한 논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신학을 위한 신학을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지식의 측면에서 저잣거리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요구와 필요보다 이미 내제시켜 버린 관점을 가지고 저잣거리로 나갈려는 두려움이나 불명확함에 대한 염려가 더 큰 것은 아닐까? 사랑의 방식으로 다가가기 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는 방식이 많지 않을까?



각주


신복음주의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는 19세기 개신교 신학에서 나타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진정한 복음주의 즉 개신교 정신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영미 지역의 개신교 사상을 지칭했다. 현재는 원래 신복음주의 의미 이외에 미국 개신교 내 온건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근본주의와의 결별

근대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대중문화, 진화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반대하는 폐쇄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실례를 듣면 1925년 테네시 주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압력으로 공립학교의 진화론교육을 반대하는 버틀러 법을 통과시킨 바 있으며,독일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독일신학에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심지어는 근본주의자들은 교육을 선호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반발, 신학 교육에 반대하는 반(反)신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세상을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근본주의와 자신들을 구분짓고자 했는데, 이들을 신복음주의자라고 부른다.


미국 복음주의운동

신복음주의자들은 1942년 전미복음주의자협의회(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cals)를 만들었는데, 현재 협의회장은 레이스 앤더슨(Leith Anderson)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의미로 그리스도 신앙을 통한 구원을 믿는다면 로마 가톨릭 신자나 진보기독교인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1947년에는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나와 Fuller Theological Seminary(풀러신학대학원)를 설립했으며,1956년에는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의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sitanity Today)창간을 하기도 했다.[1]하지만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 당선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개입하는 등 교회가 정치문제에 간섭하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미국과 하나님 나라(미래적이며,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영국 복음주의 운동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신학교인 런던 바이블 칼리지(London Bible College, 약칭:LBC)를 1943년 설립하였다.[2] 이듬해인 1944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내에 성서연구기관인 틴테일 하우스(Tyndale House)를 설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 성공회내 복음주의자들도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데, 윌리엄 템플 전 캔터베리 대주교다음으로 영향력있는 신학자로 불리는 존 스토트 신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존 스토트는 개혁파 감리교회 출신의 칼빈주의자 마틴 로이드존스와 비교된다. 존 스토트 신부는 세계복음화대회인 로잔 회의(1974년)에 로잔언약 초안 심사위원회장으로 참여, 복음주의 신학의 가장 대표적인 선언으로 불리는 로잔언약(Covernant) 작성에 기여하였다.


전미 복음주의자 협의회(NAE)의 신앙고백 ;

신(新)복음주의자들이 1942년 결성한 전미 복음주의자 협의회(NAE)에서는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우리는 영감되었고, 유일하게 무오하며, 하나님의 권위로운 말씀인 성경을 믿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영원히 세 위격, 곧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심을 믿습니다.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죄 없으심, 기적들, 그의 피 흘리심을 통한 대속적인 죽음, 육체의 부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의 승천, 권세와 영광 속에서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한 중생이 버려지고 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절대적으로 유효함을 믿습니다.우리는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믿는데, 그를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와 버려진 자의 부활을 믿습니다. 단 구원받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그리고 버려진 자들은 심판의 부활을 받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간의 영적 연합을 믿습니다.


칼헨리

칼 헨리는 1913년 뉴욕 시 맨해튼에서 독일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로마 가톨릭 신자이고, 부친은 루터교회 신자였다. 성공회(Episcopal Church)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192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1932년에는 《스미스타운 스타》편집장이 되었다. 밀드레드 크리스티 부인과의 만남으로 회심했다. 1933년 휘튼 대학교에서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고, 1938년 시카고의 북침례교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1947년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49년 Ph.D 학위를 받았다. 1956년부터 1969년까지 크리스처니티 투데이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의 근거를 성서의 예언자 전통과 복음주의 신학에서 찾은《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1947년 작.2009년 IVP에서 박세혁의 번역으로 한국에 소개함.)등이 있다.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영어: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은 개신교 신학자 칼 헨리의 1947년 저작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내세만 찾고, 사회에는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해 논박하고, 성서의 예언자 전통과 복음주의 신학을 근거로 기독교인이 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신복음주의의 뿌리로 알려질만큼 미국교회에 영향을 준 신학서적이기도 하다.2009년 IVP에서 역간.


해럴드 오켕가

풀러신학교의 초대 총장. 보스톤의 팍스트릿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파사데나를 오가는 수많은 대륙 횡단을 하면서 풀러신학교를 세우기 위한 그의 소명을 다했다. 학자였던 그는 풀러신학교가 학문적 우수성을 추구하는 학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또한 풀러신학교가 복음주의권을 이끄는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다양한 문화권과 교류하며, 사회 참여적인 학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플러신학교

풀러 신학교는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학문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기관을 만들고자 설립되었음. 설립된 지 67년이 지난 현재, 설립자들의 비전대로 풀러신학교는 세계 최대의 복음주의 신학교로서 신학적,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풀러신학교의 세 개의 대학원 가운데 하나인 선교대학원은 교회성장학의 대가로 알려진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A. McGavran)에 의해 시작되었다. 선교학 분야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선교대학원으로 성장하며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선교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 풀러신학교는 라디오 방송 설교자 찰스 풀러(Charls E. Fuller)와 팍스트릿 교회 담임 목사 헤롤드 오켕가에 의해 1947년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에 설립되었습니다. 풀러신학교는 세계 최대의 복음주의 신학교로서 세 개의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한국학부가 소속되어 있는 선교 대학원은 교회 성장학의 대가로 알려진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후 선교학 분야에 있어서 최고의 대학원으로 성장하며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선교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칼 매킨타이어, 사과

칼 매킨타이어 박사는 공산주의와 종교적 자유주의의 지칠 줄 모르는 적수이었다. 그는 흔히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와 많은 신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혹평을 받았으나, 2002년 3월 매킨타이어의 죽음 이후 풀러신학교 교장 리차드 모우는 솔직하게 매킨타이어를 보다 더 호의적인 빛으로 논평하였다. 그는 매킨타이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미국 교회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소비에트 진영의 정교회들로부터 온 방문자들을 따뜻하게 영접했을 때 원수에게 도움과 위로를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분, 이들은 공산주의 정부의 공작원들입니다!'라고 주장하려 했다. . . . 에큐메니칼 지도자들과 같이, 나도 그의 비난들을 광신적 폭언들이라고 물리쳤다. . . .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저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들의 다수가 참으로 그들의 마르크스주의 정부의 의식적 지도자들임을 알고 있다. . . . 내가 아는 한, 에큐메니칼 개신교계에서 아무도 그들이 그의 비난들을 물리쳤던 그 신사적 태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한 사람이지만 우리가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믿었다. . . . 매킨타이어 박사, 당신이 옳았다!(Christianity Today, 21 May 2002; Calvary Contender, September 2003).


빌리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Billy Graham, 1918년 11월 7일-) 은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 조언자였다. 그레이엄은 역사상 존재했던 개신교도 중에서 전 세계에 있는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한 목회자였다.[2] 그의 측근에 따르면, 1993년 한 해 동안 2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빌리 그레이엄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였다.[3] 라디오 청취와 텔레비전 시청을 포함해서 그레이엄의 생애 동안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22억명에 달한다.

- 1918년 11월 7일 북 캐롤라이나 주의 샬롯테 부근 농촌에서 Morrow Coffey 와 William Franklin Graham 의 아들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해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플로리다 성서신학교(Florida Bible Institute)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휘튼대학교(Wheaton College)에 진학하였다. 1943년에 대학생시절 만난 루스 매큐벨(Ruth Mc Cue Bell)과 결혼했다. 그들은 Virginia (Gigi) Graham Foreman; Anne Graham Lotz; Ruth Dienert; Franklin Graham, and Ned Graham의 5명의 아이들을 가졌다. 일리노이주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로 부임1950년대 복음주의 성격의 기독교잡지인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를 창간


성공회

- 성공회(聖公會, 영어: 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는 전 세계 165여 개국, 38개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성공회(관구)로 이루어진 기독교 교파이며, 신자는 약 8천 5백만명이다. 개신교 계통으로 분류되는 교파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세에 해당한다.

간혹 성공회 전체를 영국 국교회로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올바르지 않은 표현이다. 영국 국교회라는 명칭은 성공회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영국 교회의 대표격인 영국 성공회만을 가리키는 말이다.(전 세계 성공회 중에서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국가는 영국이 유일하다.) 한국 성공회의 공식 명칭은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이자,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명예상 대표로서 활동한다

- 세계 성공회의 기원이 되는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는 16세기 유럽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연장선에 있다. 특히 마르틴 루터 등의 대륙 종교개혁 사상이 일찍부터 전해져 영국 내에서도 교회개혁이 움트고 있었다. 특히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대와 반성직자 운동이 이미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영국 성공회의 정치적 분립은 혼인무효(annulment)와 관련한 영국 왕 헨리 8세의 개인적 문제가 아닌, 당시 유럽의 국제 관계와 근대 왕정 국가의 탄생,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영향으로 이뤄졌다.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는 왕위지상령을 선포하여, 영국 교회의 로마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때를 곧장 영국 교회의 성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에 영국 교회는 다시 로마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다가,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여러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종교개혁도 정치 상황과 신학 운동이 결합하여 일어났다. 신학에서는 초기에 마르틴 루터의 신학이 영향을 미쳤으며, 후기에는 칼뱅주의를 따르는 청교도의 세력이 성장했다. 그러나 영국 교회 종교개혁은 대륙의 사변적인 신학 논쟁보다는 교회의 예배 생활, 즉 예전을 통한 개혁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 전례 개혁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가 이끌었고, 그 결과물이 성공회 예전(Liturgy)을 담은 책인 성공회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이다. 1549년 영어로 쓴 성공회 기도서의 등장으로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말로써 예배하였다. 성공회 기도서는 성공회의 신앙생활, 예배생활, 신학과 영성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 성공회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이 서로 견제하며 공존하고 있는 전통을 유지하며 발전했다. 아래에 서술되는 신학적 경향은 이해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분명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다.


고교회

고교회(High Church)는 교회의 성사성과 그 권위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 경향은 16세기 이래로 지속되었다. 특히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일어난 옥스퍼드 운동은 영국 성공회가 영국 국교회로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사도적 전승에 따른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과 성사적 신앙을 강조했다. 이 흐름에 따르는 이들은 세속 사회의 산업화와 급진주의, 비종교적 사고의 확산에 비판적인 시각을 발전시켰고, 성스러운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권위와 교회의 가시적 일치, 전례와 성사를 중요시한다.


저교회

저교회(Low Church)는 위의 고교회에 대한 상대적 표현이다. 즉 교회의 성사성과 그 권위을 대체로 '낮게' 평가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이 경향도 16세기 이래로 지속되었다. 대체로 영국 성공회 교회 내 청교도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8세기 영국 성공회의 복음주의 운동은 개신교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성령에 의한 개인의 회심, 성서의 최우위성, 복음의 설교에 강조를 두었으며, 신앙에 의한 의인 교리를 강조하였다. 이 시기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 신부의 신앙 쇄신 운동은 원래 고교회 전통에서 기원했지만, 그의 운동은 점차로 복음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웨슬리의 의도와는 달리, 이 운동은 감리교라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존 웨슬리 자신은 죽기까지 스스로 성공회 사제로 남았다. 근대 영국 성공회의 복음주의자들은 노예제도 반대운동,주일학교 운동등으로 영국 사회를 바꾸었다.


광교회

위의 두 경향과는 모든 분파를 "널리" 아우르는 통합적인 국민 교회의 성격을 강조하는 주된 흐름이 있었다. 이런 태도에서 광교회(Broad Church)라는 이름이 나왔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서 이 경향에 있는 신자와 성직자들은 성서비평학과 신학적 자유주의를 적극 받아들였다. 또한 신앙의 본질과 권위를 협소하게 이해하는 태도들을 비판하고, 복음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적응성을 강조했다.


신학적 다양성

성공회 내의 이러한 다양한 전통은 서로 신학적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지금도 여러 모습으로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태도의 다양성은 성공회 전통을 분열시키지 않고 나름대로 성공회의 신학과 정신의 풍요로움에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빌리그레이엄, 서울

1973년 서울 여의도집회를 주도하는 등 해외선교를 활발히 하였는데, 1950년대에도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복음전도집회를 진행한 바 있다.

1992년과 1994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


마틴로이드 존스

- 청년 의사였던 로이드 존스는 40세가 되던 해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출판한 목사와 설교는 명저로 알려져 있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학파의 대표적인 회중교회의 목회자 였다.

-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특징은 개신교 신학자 정용섭 박사가 기독교사상과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연재한 설교비평기사를 근거로 한다.[1]

거룩함과의 만남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열정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주장해야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들을 하고 안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나 행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목표 미달입니다.(복음의 핵심, 132쪽.). ”

종교오락에 대한 거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회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간증하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의 모습들에 대해 종교오락이라는 말을 썼다. 즉, 교인이라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게 설교하고 목회하는 종교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 간증자로 초대되는 사람들 중에는 해군 제독이나 육군 장성처럼 특별한 직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야구선수나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그런 이들의 간증 듣는 일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이 당연히 오락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설교에 등을 돌리고 이런 오락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 26).

신학에 대한 존중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인 신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거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배타적인 모습과 성화의 강조

로이드 존스는 자신과 신학이 다르면 복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강조한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조차도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인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 성공회 신부와도 복음전도 방법론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결별하기도 하였다. 축자영감설을 복음주의의 특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성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성서읽기방법으로 현대교회에서는 보편적인 성서읽기인[2] 성서비평학 또는 비평적 성서읽기를 배척하였다. 또한 그는 칭의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보고 의인으로 인정해주는 은혜에 더불어서 성화를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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