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그의 세상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20180308_느헤미야
하나님과 그의 세상(조직신학)_김형원
기독교신약의 숲 1장_믿음이란 무엇인가?
들어가기
오늘은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커리큘럼을 구성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또한 우리가 고민해야할 주제는 조직신학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의 구성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이러한 작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기독교신학의 숲’으로 들어가서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느헤미야, 학문체계
우리는 느헤미야에서 다음과 같은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신학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진 텍스트를 중심으로 학문을 펼쳐 나간다.
구약학과 신약학과 다르게 ‘주제’를 설정하고 context에서 text로 들어가는 조직신학이 있다. 이러한 조직신학은 주제들을 셋팅하고 역사신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어서 적용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작업니다. 혹자는 역사신학을 교회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헤미야는 구약, 신약, 조직신약, 역사신약으로 큰 툴을 이루고 있다. 이 외에 느헤미야에서는 ‘윤리학’을 배운다. 윤리학 중에서도 ‘기독교 윤리학’을 다룬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다룬다. 방법론이 조직신학과 비슷하기 때문에 원래는 조직신학 안에서 다루어졌지만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대처하기 위해서 아예 따로 분과학문으로 나오게 되었다. 보수적인 신학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text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진보적으로 갈 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context위주의 윤리학이 발전하게 된다. 느헤미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윤리학을 별도로 빼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크게 이론신학과 실천신학으로 나누어진다. 이론신학은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천신학은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치는 실천이라기 보다는 목회자가 만나게될 현실에서 실천을 다루기 때문에 일반인이 배울 필요는 없다.
Text, Context
윤리학은 이론과 현실을 만나게 해주는 학문이다.
설교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것을 뜻한다. 텍스트를 제대로 알고, 이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가운데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작업니다. 문제는 둘 중에 하나만 치우치면서 생긴다. 이론에만 치우치면 보수적인 신앙에서 해석을 적용하기가 힘들어진다. 자연스럽게 이분법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이 없으면 이전에 했던 빈곤한 대안을 찾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무시하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기 시작할 때 독단적이 되고, 원론에 빠지게 된다. 현실에만 너무 큰 비중을 두면 세속화가 찾아온다. 이론적인 배경이 없고,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스스로 정하게 된다. 물론 잘 적응하고 동화되어서 살아가지만 그것이 옳은 방법이고 옳은 생각인지를 고민하지 못하게 된다.
조직신학, 주제
조직신학의 주제는 ‘신론-인간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이라는 것은 Theology라고 부르는데 theos라는 신의 개념과 logos라는 이론의 합이다.다시 말하면 신에 대한 학문이다. 신에 대한 학문을 선포하는 순간 여러가지 범주가 생긴다.물질, 자연, 우주, 영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존재론’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조직신학은 기본적인 주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시스템을 이루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을 한다. 하나님은 왜 하나님인가?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왜 타락했고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은 해결하시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교회로 공동체로 살아가게 되는가? 교회는 두가지가 있다. 보이는 교회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우주적 교회라고 해서 역사상 존재한 모든 사람들이 교회라는 것이다. 이것이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교회론의 출발이기도 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직신학은 ‘신론 - 인간론 - 예수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으로 조직신학이 발전하게 된다.
해석, 행동
조식신학은 시스템신학이다. 그렇다면 시스템의 레벨이 있고 각각의 장에 내용들의 층위가 있다.우리가 행동할 때 여러가지 기준들을 가지고 있는데, 조직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우선순위가 쉽게 정해질 수 있다.새벽기도는 매일 해야하는가? 성찬식은 매주해야하는가? 대예배와 소예배가 구분되는 것이 맞는가? 이런 고민들에 대해서 대부분은 ‘해석’에 따라서 ‘행동’을 제시한다.그러나 ‘해석’이 어떤 층위에서 일어나는가에 따라서 ‘행동’의 깊이와 범위가 달라진다.조직신학의 장점은 이러한 기준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시스템적인 대안을 준다는 것이다. ‘형식’으로 평가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용’으로 옳은것과 옳지 않은 것을 따진다.
종교, 기원
많은 학자들이 종교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는 프랑스 쇼베 동굴 벽화나 알타미랴 동굴벽화, 라스코 동불벽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벽화에서의 특징들은 인간은 무엇인가 크고 거대한 것을 숭배했었고 제사를 지내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에 인류가 존재한 이후로 거의 모든 시대와 민족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선사시대로부터 사람들이 종교를 찾았던 까닭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였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전적 무신론, 신무신론
이런 고민을 해보자. 역사상 무신론자들이 있었을까? 고전적 무신론자들은 철학적인 사조를 따랐는데 17세기 이후에는 신무신론자들은 자연과학의 사조를 따르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고전적 무신론은 아테네의 철학자들과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신에 대한 정의를 하기보다는 물질 자체에 대한 전제를 가지고 불, 물, 공기, 원자와 같은 것들로 세상을 규정했다. 영혼이 물질에서 나왔다는 것을 상정하면 신의 존재는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무신론자가 역사상 이렇게 많아진 것은 17세기 이후 신무신론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원시종교, 고등종교
원시종교는 초월적 존재를 통해서 자신이 처한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을 신에게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초월적 존재를 통해서 무제가 해결되면 더이상 신앙이 발생하지 않는다. 고등종교의 특징은 총체적이라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원시종교에서는 삶 일부분에만 관련되었던 것이 인생의 모든 면을 주관하는 것으로 변한다.
믿음, 내용
고등종교의 관점에서 믿음을 정의하면 ‘자연적인 삶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그 인식에 근거해서 세계관과 인생관을 정립하고, 그 관점을 따라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저응에는 세가지 요소가 담겨져 있다. 첫째 자연계 너무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둘째, 그 존재와 관련해서 우주와 역사와 삶에 대한 관점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관의 정립’이다. 셋째는 그런 관점에서 기초해서 삶을 영위하는 것, 바로 실천이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첫째, 기독교인은 자연계를 초월하고 총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다. 둘째, 기독교인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받아들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셋째, 기독교인은 그런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에 맞는 삶을 사아가려는 사람들이다.
믿음, 세요소
초월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 세계관 구축, 실천이 바로 믿음의 세요소이다.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한 근거를 찾는 방법은 직접적인 확인을 통한 믿음, 간접적인 확인을 통한 믿음, 반증에 의한 확인이다. 자신의 감각을 통해서 직접 경험한 것은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가 된다. 또한 다른 신뢰할 만한 사람들의 연구와 지식에 의존해서 믿음이 생기는 방법도 간접적인 믿음의 기초가 된다. 또한 어떤 지식이 거짓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그 지식이 사실이라고 믿게되는 반증에 의한 믿음도 있다.
믿음, 세계관
세계관을 구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나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총체성, 초월성)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세계관은 보는 방식인데 하나님과 그의 세상이 세상과 어떤 관계인지를 보이는 것이다. 결국 가치관, 물질관, 인간관과 같은 관점의 문제가 된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의 세상에서도 주인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관점이 우리의 관점이 될 때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
믿음, 실천
실천은 믿음의 대한 실행이다. 믿음이 실행된다는 것은 가치를 실현하다는 것과도 같다. 문제는 실천이 먼저 되어버리고, 가치가 재대로 해석되지 않으면 우리는 나중에 쉽게 그 실천을 과소평하게 된다.
신학, 오해
성경을 읽는데 전문가가 필요한가? 아니면 성경을 읽는데 전문성이 필요한가? 우리가 읽고 묵상하고 해석해야 하는 것들을 우리는 너무 ‘목회자’들에게만 맡겨왔다.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믿음의 지식, 세계관, 실천의 관점에서 우리모두가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엠마오의 두제자를 보라. 부활후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서 신학적인 지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지식과 관점, 실천까지 이어지는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민네이션, 생각
시간의 무게가 쌓여서 역사가 된다.
역사는 의미들의 흐름이다. 문제는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이다.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해석학자들이기는 하지만 해석학자들은 푸코의 말을 빌려오자면 권력의 시녀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쉽지 않다. 어떻게 시간을 정의하고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인간은 왜 그런가?라는 고민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민네이션, 대안
대안을 못 찾으면 결국 잘못된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론과 실천, 텍스트와 컨텐스트 처럼 모든 삶은 두가지의 결합에서 일어나는 플랫폼이다.그러나 두가지를 다 알지 못하면 결국은 한 쪽으로 치우쳐서 문제가 생긴다.한쪽의 입장을 대변하면 대칭성이 사라지고 현실 자체를 담아내지도 못하면서 이론으로만 충만해지면 정죄함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현실에만 치중한 대안 이론적인 기반이 적어서 지속가능성과 일관성이 없어진다.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시행착오와 고민을 통해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대안을 많이 고민하고 만들어낼 수록, 다시 말하면 더 많은 방법론을 만들어낼 수록 우리는 더 풍성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민네이션, 믿음
결국 믿음은 지식을 연결하여 관점을 가지고 실천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도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 그렇다면 어떤방식으로 존재하시는가? 그렇다면 나는 그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고민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주권에 대한 인정recognition of Lordship, 세계관의 구축으로 인한 희망emergence of hope, 존재의 실천caring for others로 다시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을 통한 관점의 변화가 행동을 바꾼다’는 것이 ‘믿음’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민네이션, 질문
그렇다면 이런 고민도 생긴다. 3가지의 믿음의 요소에서 한가지가 결여되었다면 그것이 역시도 믿음일까?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자시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실천은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세계관도 없을 수 있는가? 논리학의 주제이긴하지만 3가지가 요소명제라면 요소 명제들이 연결되지 않았을 때도 부분적인 요소가 작동할 수 있는가?
민네이션, 가치
결국 인간은 가치를 따라가는 존재이다. 우리에게 어떻게 가치가 만들어지는지도 매우 재미있는 고민이지만, 가치를 실현하는 것도 매우 재미있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이것을 ‘의미론’이라고 하기도 한다.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사물을 다시 보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또다시 순환논법처럼 관점의 문제가 된다.대부분 관점은 ‘경험’과 ‘롤모델’을 통해서 바뀐다. 새로운 경험을 할때, 그리고 자신이 실제로 실천을 할 때 바뀐다. 그러나 함께 롤모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을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가치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도 ‘가치론’을 역사의 핵심으로 보았다. 역사적으로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다. 어떤 것이 가장 가치있는가? ‘자본’인가? ‘사회’인가? ‘국가’인가? 그에 대한 답에 따라서 사회를 구성하는 논리와 국가를 구성하는 이론이 달라진다. 이런 질문은 어떤가? ‘인간’의 가장 깊은 가치가 아닌가?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간’이 가장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 인간을 세분화하고 인간을 등급을 메긴다는 것 자체는 ‘인간’이 가장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맞는가? 여러가지 고민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