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그의 세상_기독연구원느헤미야
20180322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하나님과 의 세상_김형원
기독교신학의 숲1_하나님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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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조직신학의 구성원리와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조직신학의 6가지 중에 한가지씩을 제대로 살펴보자. 특히 오늘은 ‘신존재증명’에서 부터 시작해보자.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그 증명은 옳은가? 증명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고전적, 신 존재 증명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주관적이여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만약 경험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증명할 수 있다면 기독교의 신뢰성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 이것을 ‘신 존재증명’이라고 한다. 중세시대부터 발전한 증명방법에는 대표적으로 네가지가 있다. 고전적인 신 존재증명은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이 있다. 한 때는 이와 같은 증명들이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수많은 비판을 거친 지금은 그런 증명이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증명해 주니는 못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존재론적 증명, ontological
어떤 존재의 원인을 계속 추적하면 가장 최초의 원인이 되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신이며 이로써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우주론적 증명, cosmological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외적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주는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우주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 존재가 의도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그 무한자를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론적 증명, teleological
세상의 모든 만물은 존재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배후에는 그것에 목적을 부여한 지적 존재가 있음이 분명하다.
도덕적 증명, moral
인간에게 객관적인 도덕법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도덕적인 입법자가 존재해야 한다.
성경, 하나님 증명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가 자명하게 드러나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가 하신 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하려는 어떤 시도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매우 주관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보여줄 수는 없다.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대, 무신론의 도전
오랜 유신론의 시대가 가고 요즘은 무신론자들이 매우 공격적으로 유신론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시대가 되었다. 리차드 도킨스나 데이빗 밀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은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영향을 받아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목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는 인간의 허무함과 무기력함으 ㄹ메우려고 만들어낸 허무이며, 권력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세상에서 절대자를 몰아내고 나면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이 파생된다. 객관적 진리도 사라지게 되고, 절대 윤리라는 것도 없어지며, 인생의 궁극적 의미나 영원한 소망 같은 것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무신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신화는 종교는 근거가 없는 ‘주관적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무신론은 매우 정교한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유신론적 종교는 상상적 허구에 매달리는 것이고, 무신론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절대적 진리인가?
무신론, 신앙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종교는 신앙의 문제이고, 무신론은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신앙은 주관적인 신념의 문제이고 무신론은 객관적인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신이 있다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증거를 대지 못한다고 해서 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합리적인가? 반대로 무신론이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하는 부분이 있다. 과학적으로 없다고 증명할 수 없는데 신이 없다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과학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무신론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하나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신론과 유신론은 결국 신의 있고 없음을 두고 ‘믿음’의 영역을 어디에 두는가이다.
신의 현존, 세가지
신의 현존에 대해서 유신론적 합리성을 가지고 보면 우주의 기원, 윤리의 존재, 인간의 존재가 신의 현존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는 과학적으로 보더라도 그 기원에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밖에 없게 끔 복잡하고 유기적이다. 이러한 구조를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다른 방식의 증명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윤리는 가치의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윤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 바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존재, 믿음
인간이 정한 가치는 어디서 그 근거를 찾는가? 철학과 과학의 틈바구니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대답하고 증명하는 것들이 과정 맞는 것인가?라는 고민이 든다. 존재에 대해서 다른 존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은 어렵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존재, 타자에 대한 존재, 사회에 대한 존재 등등은 사실 증명이라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믿음을 갖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따. 과학 역시도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이제 인간은 믿음 안에서 어떤 것이 진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도덕, 윤리
살인은 나쁜가? 왜 나쁜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나쁜 것이라고 누가 규정했는가? 그 규정이 얼마나 타당한가? 우리는 인종차별, 강간, 살인, 폭력, 뇌물수수와 같은 것들이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판단은 무엇으로 근거로 하고 있는가? 도덕적이라고 할 때 그 출처는 일단 힘이 있는 사람이 정해놓은 규칙을 따른느 것이다. 그러나 힘이 있는 사람의 기준이 바뀌게 되면 그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살인도 미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횢거 합의에 따라 규정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사회 대다수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살인청부업자를 위인으로 받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또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시대가 바뀌면 윤리 관념도 바뀔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기우제를 지내면서 처녀를 바치는 것이 과거에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다 보면 다시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전통이란 계속 바뀌고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사회의 보존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금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가변적이다. 사회의 보존을 위해서는 타민족이나 타인종을 죽이는 것이 필요하단느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이처럼 윤리적 근거들이 사실은 매우 빈약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 존엄
우리는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다른 동물들이나 식물들보다 우등하며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옳은 것인가? 왜 인간이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존재보다 더 존엄하고 가치가 있따고 생각하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사회계약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사회계약에 의해서 스스로 서로에게 존엄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스로 부여한 가치 그 자치가 그 자체로 객관적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유물론적 견해에 따라서는 인간은 가장 잘 진화가 된 존재라고 믿기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존재 자체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이고 상대적이란느 말이된다. 유물론적 견해는 우리보다 더 발달한 존재가 나타나서 우리를 가혹하게 한다고 해도 말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월한 존재가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사유구조를 가지게 된다. 천부인권설을 볼 때는 인간은 하늘이 준 본래 가치는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천부인권설은 인간보다 훨씬 우위의 존재가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천부인권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는 기독교적 인간관과 신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 존재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은 독립성aseity, 불변성immutalbility, 편재성omnipresence, 영spirituality 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지혜wisdom, 거룩holiness, 신실함faithfulness, 평화peace이다. 하나님은 또한 초월성transcendence, 내제성causiness을 가지고 있다.
민네이션, 생각
어릴적부터 불교나 무신론, 무속신앙을 믿었던 내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2살 때였다. 물론 그 전부터 예수님의 생일에 축하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그 분은 좋은 분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12살까지 인생은 너무 외로웠고, 힘들었고, 가족 안의 문제는 끝이 없었고, 인간의 근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다가 자아 정체감이 형성되는 시기를 거치면서는 더더욱 증폭된 문제들이 뒤덮여서 살았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아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찾아오는 신’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인간적이지도 않아서 이러한 관계는 부모님이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사상은 더욱 쇼킹했다. 이것 자체로 너무나 인격적이었기에 말이다. 나랑 상관없이 나의 외부에서 나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신이 아니라,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내 안에서 스스로 존재하면서 함께 걸어가는 신이었다. 그리고는 인격적인 만남은 계속되고 있다. 무신론, 신이 없다라고 말하는 이들에 대한 태도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다. 증명하려는 싸움을 그치고 삶을 보여주려고 굳이 하지 말고, 예수님이 다가오듯이 함께 걷는 것 말이다.친구가 되는 것, 정말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보여주신 롤모델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다. 지나치게 정리하고 보수적인 혹은 방어적인 방식으로 증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방식,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