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그의 세상_기독연구원느헤미야
20180405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하나님과 그의 세상_김형원
기독교신학의 숲1_삼위일체, 창조, 섭리, 악
들어가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삼위일체적인 신앙고백 속에 둘러싸여 있다. 찬송가 1장도 삼위일체를 찬양하고, 사도신경도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며, 세례식에서도 삼위일체의 이름이 계속 울려퍼진다. 그러나 역사상 삼위일체 교리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삼위가 하나이고 하나가 삼위라는 것은 인간의 머릿속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러한 이유는 바로 삼위일체 교리 안에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들이 모두 연관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오늘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통한 기독교를 더 깊이 있게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삼위일체를 넘어서면 이제 우리는 창조와 섭리, 그리고 악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용어, 삼위일체
삼위일체 trinity는 두 가지 용어가 합쳐진 것이다. 삼위three persons는 인경체가 셋이 있다는 뜻이며, 일체one substance인 본체는 하나라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라틴어 trinitas에서 나오는 용어로 성경 자체에는 없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별무리 없이 사용되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단순히 성경에 있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성경을 보니 예수님도 하나님이라고 하고,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라고 한다. 다른말로 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세분인 것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런 의문에서 부터 출발하여 모순처럼 보이는 구도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삼위일체, 구도
삼위잎체 교리는 다음의 세가지 구도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두번째는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세번째는 삼위는 모두 동등하고 완전한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한분이라면 단수를 써야 맞지만, 하나님은 종종 자신을 지칭할 때 복수형을 사용하면서 구약에 등장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는 창세기의 구절을 보라.
또한 시편 110편에서 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첫번째로 ‘야훼’하나님이 이라는 단어이고 두번째로 ‘내주님 아도나이’를 이야기하낟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로 표현되고 있을 것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성경은 인격에 있어서도 삼위가 서로 교제하고 대화하는 인격적 존재라고 말한다.
삼위, 관계
삼위의 관계를 존재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 상호내주’의 관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존재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는 존재적 서열에서 볼 때 삼위는 서로 어떤 서열이 없다는 의미이며 신적 속성이나 성품에 있어서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는 역할적 측면에서 볼 때 성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성자와 성령이 종속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종합하며, 삼위의 하나님은 각기 완전한 신으로서 모든 본성과 성품에 있어선느 동등하지만, 세상에 대한 관계와 역할에는 차이가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상호내주perichoresis는 상호공재, 상호침투, 상호의존이며 세분은 하나님은 독립된 인격이고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삼위의 세 하나님은 서로 안에 내주하신다는 의미에서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페리는 원을 돌다라는 뜻이고 코레시스는 춤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강강술래처럼 여러 사람이 원을 만들어 춤추면서 빙빙도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냥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이 자유롭게 원 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계속 춤을 추면서 도는 과정을 반복한느 것을 의미한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 안에,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그리고 성령 역시 성부와 성자 안에 완전하고 총체적으로 내주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상호내주’한다는 것은 존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서로 의존하고 협력한다는 mutual dependence 것이다. 세 위격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에게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고 있따.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혼자 하지 않고 항상 협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 모델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자연적 모델과 심리적 모델, 사회적 모델이 있다. 자연적 모델은 세잎클로버나 나무의 뿌리-줄기-가지, 물의 세가 형태인 증기-물-얼음, 사람이 맡는 다양한 역할인 아버지-농부-장로 같이 자연속에서 유사한 모델을 찾는 것이다. 심리적 모델은 마음이 지-정-의로 구성되는 것처럼 위대한 마음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모델은 아버지와 두아들처럼 사회속에서 유사한 모델을 찾는 것을 말한다.
모델, 한계
그러니 이런 모델들은 모두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자연적 모델과 심리적 모델은 삼위일체 중에서 ‘하나oneness’에 대해서는 설명이 가능하나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존재인 ‘셋’three persons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사회적 모델은 그 반대다. 각기 다른 ‘셋’은 설명이 되지만 똑같은 ‘하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연속에서 유추한 모델들은 시초부터 한계를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자연적인 것들로 설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가 안되서 답답하더라도 어떤 유비를 찾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삼위일체, 신학적 의미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나타낸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피조물인 인간과 다르다.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가능하게 한다. 성자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자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를 예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삼위일체, 신앙생활
삼위일체 교리는 단순히 이론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 세상과 우리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삼위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통해서 우리는 우주 만물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기초를 발견할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한 분이시며 삼위가 존재하지만 본성은 똑같고 통일성이 있기 때문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완전한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도 조화로운 공동체성 위에 만드셨고, 모든 피조물은 피조물 전체의 공생이라는 통일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서도 개성, 문화, 취향과 같은 독특성 삼위일체 안에서 다양하게 인정되고 통일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적 교회에서도 통일성과 다양성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볼 수 있다.
창조, 중요성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창조일 수도 있다. 인간과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목적으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고, 이것이 진행되는 모든 것들의 근거가 되고 있다. 기독교는 ‘어디서 왔고 - 어떻게 살아야하고 -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과학
과학자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은 창조 연대, 창조 방식, 창조 기관과 같은 문제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성경이 과연 답을 주고 있을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신학책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주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책이 아니고 다양한 문화적 장르가 등장하기 때문에 과학적 진리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는 부분도 있고, 우리의 일상적인 관점에서 표현하는 부분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창조 이야기를 담은 창세기 1장은 만물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술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의 1차적인 목적은 창조자의 실체, 하나님과 창조물의 관계, 창조의 목적, 만물의 의미와 같은 신학적 설명을 주기 위함이다.
성경은 우주 생성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누가, 왜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에 더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 연대, 창조방식, 창조 기간 등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주제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성경을 뒤지면 잘못된 결론은 도출할 위험이 있다. 성경은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찌 않으며, 다양한 추정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겸손해야 하며, 알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성경, 창조
성경에서는 창조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무로 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이 그로부터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것을 신학적 언어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lhilo라고 한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할 때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존에 존재하던 어떤 형태를 갖추지 못한 물질에 질서를 부여해 주는 행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또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예외 없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창조를 통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했던 창조의 세계는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타락하게 되고, 훼손되게 된다.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요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녀들이다. 따라서 한가족으로서 형제자매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아울러 자연을 지키고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섭리, 개념
하나님의 일하심을 섭리providence라고 한다. 섭리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과 협력하면서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자신의 목적대로 통치하는 지속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섭리의 범위는 전우주적이다. 무생물, 생물, 자연의 움직임, 역사, 인간의 생명과 움직임 등, 하나님의 섭리가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창조 이후 지금까지도 다스리고 있다.
전우주적 설비의 범위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배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부해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믿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애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고, 그것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세상을 섭리하신다.
섭리, 세가지 요소
하나님의 섭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세상을 보존한다.preservation’,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한다.government’, ‘하나님은 피조물과 협력한다.concurrence’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보존하시고,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멸망시키시지 않고 남겨두신다.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영향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결정 없이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멸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악과 고통과 죄의 문제와 싸워야 하고 선한 것들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는데 우주와 자연을 통치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통치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모든 역사적 사건을 승인하고 인정했따는 뜻이 아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세부적인 인간의 역사는 ‘자유의지’에 의해서 수 많은 변화와 책임의 문제를 낳는다. 세부적인 부분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하는 순간 하나님의 책임이 악의 문제까지 가게 되고, 인간의 책임은 하나도 없어지면서 인간이 비인격적으로 전락하게 된다.
섭리, 오해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말은 피조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피조물의 어떤 선택이나 행동에도 부룩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신다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피조물은 완전히 수동적인 로봇에 불과한 존재일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일은 하나님 탓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불행한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 조차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의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법칙대로 세상이 움직이도록 놔두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법칙 속에 이미 하나님의 손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다. 물론 하나님이 전격적으로 개입하셔서 전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고 행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독재자처럼 자기 마음대로 통치권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움직임에 적절하게 빤응하면서 그들이 행동을 활용하고 그들과 협력하면서 통치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이나 실패 모두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더 큰 우주와 인생 계획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삶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따고 믿는 사람은 살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려고 애를 쓰겠지만, 그 이후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 살아간다.
자연적인 악, 도덕적인 악
지진, 홍수, 태풍과 같은 자연 재난과 각종 질병과 사고로 인한 불행한 일들을 자연적인 악이라고 한다. 각종 강도, 강간, 살인, 전쟁, 권력에 의한 압제처럼 인간의 부패한 행동 때문에 초래되는 악한 일들을 도덕적인 악이라고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막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피해를 입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그러면서 하나님이 정말로 선하고 공의로운 분인지 의심한다. 왜 이 세상의 고통과 악은 존재하는가?
무신론, 공격
악의 존재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의 공격을 받게 된다. 데이비드 흄은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서 ‘하나님이 악을 처리할 수 없다면 그는 무능력한 존재이고, 그가 일부러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는 선하지 않은 존재이다’ 그래서 어느쪽이든 하나님은 기독교가 믿는 그런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리스도인들을 소아병동에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고통을 견디는 아이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도 그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해서 그들이 받는 그런 고통ㅇ르 받아야 마땅하다고 계속 주장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는 것이다.
악과 고통, 하나님의 부재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래서 수 많은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옳은가? 실제로 부당하게 비극적인 일을 직접 당하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이와 똑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 원인을 찾아 분노와 원망을 쏟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 앉히고 생각해보자.
무신론자들은 세상에 악과 고통이 있따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빈약한 근거를 가진 단순한 추정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세상의 악과 고통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생각의 전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을 만들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반드시 지금 당장 악과 고통을 없애야 하는가? 왜 그래야할 의무가 있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없는가? 그런 결론의 근거가 무엇인가?
도리어 이럴 가능성은 없을까? 하나님이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와 목적 때문에 악과 고통이 현재 그대로 존재하도록 하신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악과 고통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한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 없는 비약이다. 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인가? 우리가 잠시 생각하면 얻을 수 있는 세상의 고통에 대한 해법을 하나님은 모를 수 도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보다 어리석은가?
민네이션, 생각
악과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어디서도 명쾌한 답을 들은 적은 없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잘 다듬어진 악과 고통에 대한 이론이라도 잘 와닺지 않는다. 악과 고통의 문제를 누군가 나에게 물어보면 나는 단번에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대안도 주지 않고 줄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가지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메타포 안에서 악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당하고 악에 의해서 힘들어할 때도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또한 그 악을 제거할 수 있을 때,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점점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 악의 발생과 고통의 해결과 같은 단순한 것 같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함브로 다룰 수 없는 주제들이 더 많아진다. 그게 맞는 것 같다. 모르는 것, 신비한 것을 그 자리에 놓아 두고 평가하지 않고 정의내려하지 않는 '부정의 변증법'이 말이다. 아마도 앞으로는 이러한 생각의 태도가 더 깊어지지 않을까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 악의 존재와 고통의 실존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겠지. 그러나 성향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그 악을 나름의 방식으로 제거하고 고통을 맞이해서 우리의 길을 열어 가려고 노력하겠지. 그래도 약간의 공간은 생겼으니 조금은 맘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