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차니즘이 아니었던 것
어느 순간부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꼭 해야만 하는 일들만 겨우 해내곤 했다.
출근을 위해 겨우 머리를 감고,
밥을 씹는 일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카톡 답장을 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는 일조차도,
출근길 커피 한 잔을 위해 핸드폰을 터치하는 일조차도,
모든 것이 피로하고 버거웠다.
이와 함께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도 심해졌다.
원래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민감한 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의 아주 작은 부정적인 반응에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감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태도를 과잉해석하고,
끊임없이 넘겨짚고, 상상 속에서 상처를 받았다.
수면시간도 비정상적으로 늘어났다.
평일에는 출근 때문에 6~7시간 정도 자긴 했지만,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종종 정거장을 지나칠 정도로 깊이 잠들곤 했다.
주말에는 열두 시간을 자고도 더 자고 싶었고, 실제로 더 잠들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감정기복은 심각해졌다.
원래도 예민하고 정서적으로 민감한 편이었지만,
올해 들어 그 폭이 훨씬 더 커졌다.
심한 날은 몇 시간 안에 천국과 지옥을 오갈 정도였고,
그 변화를 나 자신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증상은 아마 작년 11월쯤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때는 결혼 준비와 메리지 블루,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가 겹치며
‘지금은 지칠 수밖에 없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무기력과 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아름다운 곳을 보면
잠시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지만, 금세 다시 가라앉았다.
낯선 환경에서도 여전히 깊은 수면이 계속되었고,
그 모든 감정은 마치 내 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제 나이 들어서 그런가?’
‘새로운 자극에 반응이 무뎌진 건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 너무 소모적으로 느껴졌고,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이 고통처럼 느껴졌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나아지겠지—
그렇게 믿고 기다렸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과민한 반응과 감정기복이었다.
스스로도 사소한 일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점점 커져 나를 집어삼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나를 상자에 가두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원래 조금 까칠한 나니까’라는 핑계로는 이 모든 것을 넘길 수 없었다.
‘그냥 예민한 성격이니까’라고 하기엔
이 감정은 내 일상과 관계를 잠식하고 있었다.
전문의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딱히 ‘죽고 싶다’ 거나 극단적인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우울감, 일상 속 피로함,
그리고 과민한 감정이 반복될 뿐이라고 여겼다.
회사 근처 병원을 점심시간에 예약하고,
설문지를 작성하고, 상담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과 나눈 상담에서,
지금까지 겪어온 무기력, 수면 패턴, 식욕, 대인 관계 등을 이야기했고,
나는 ‘비정형 우울증(atypical depression)’ 진단을 받았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는 그렇게까지 우울하진 않은데요?"라고 말했더니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비정형 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주요 증상은 다음과 같다.
무기력증(납마비):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 일상 동작조차 버거움
기분 반응성: 긍정적인 자극에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짐
과다 수면 및 식욕 증가
대인관계 과민성: 거절에 대한 민감도, 외면에 대한 과잉 해석
나는 그 모든 항목에 해당되었고,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그동안 나는 단지 ‘지쳐 있다’ 고만 생각했지,
이게 질병일 줄은 몰랐다.
특히 **"좋은 자극에는 반응한다"**는 부분이
내가 평범하다고 착각하게 만든 지점이었다.
그래서 더 놓치기 쉬웠던 것이다.
비정형 우울증은 사이클을 가진다고 한다.
좋은 시기가 오르면 모든 게 잘 될 것 같고,
나쁜 시기가 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나는 평생 이런 사이클 속에 살아왔고,
"원래 다들 이런 기복 있는 거 아니야?"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사이클은 중간에서 조절해줘야 한다고 했다.
지속되면 기억력 저하, 집중력 저하,
심할 경우 조기 치매 위험까지 있다고 했다.
나는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 라투다정 20mg
◆ 자나팜정 0.125mg
◆ 에스시탈로프람정 5mg
아직 1일 차.
어떤 효과가 있을지, 부작용은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니, 천천히 지켜보려고 한다.
진단을 받고 마음은 무거워졌지만
오히려 확신이 생겼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건 감정의 나약함도, 성격의 결함도 아닌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었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숨기지 않고, 투병하듯 살아가기로 했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기록하기.
이 글은 그 시작이다.
당분간,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