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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민희 Nov 01. 2018

#7. 잔

19시부터는 와인만 파는 카페.일행의 취향이 깃든 잔을 존중해 줄 것.

*겨울 막바지에 제작한 독립 출판물 '을지로 야옹이'를 매주 브런치에 소개합니다


#7. 잔

19시부터는 와인만 파는 카페.
일행의 취향이 깃든 잔을
존중해 줄 것.



을지로 ‘잔’은 내 음료를 담을 잔을 직접 고를 수 있어 유명해진 곳이다. 


어느 목요일, 나와 성격이 정반대인 회사 친구와 퇴근길에 ‘잔’을 찾았다. 

19시 이후에는 와인만 판매한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ㅎㅋ) 커피대신 와인을 주문해야 했다. 

둘 다 와인을 잘 몰라서 하우스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하우스 와인은 레드와 화이트, 드라이와 스위트. 

네 종류였다.


커피잔은 낮에만 고를 수 있다.


“골랐어?”

내가 먼저 물었다.

“네! 전 화이트 스위트요!”

“어우- 난 레드 드라이”

식성도 정반대네.


나와 같은 팀에서 일하는 그녀는 본인의 성격을 

따스한 햇볕에도 돌연사해버리는 ‘개복치’라고 표현했다.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과 어울리는 건 서로에게 피곤한 일이다. 

불같은 나는 꼼꼼한 그녀를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녀는 날 기분 내키는 대로 산다고 생각하겠지. 

모르긴 몰라도 내가 개복치 숨구멍을 수차례 막았을 거란 생각을 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네.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친구를 골라 사귈 수 있었기 때문에 개복치 같은 성격의 친구와는 안 어울리면 그만이었다. 대학 때 술을 좋아했는데(지금은 아니라는 건 아니고) 개복치들은 대개 술이나 술자리를 싫어했다. 

자연스럽게 어울릴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회사는 아니었다. 


나와 다르다고 같이 일을 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나와 다른 부류는 생각보다 많았다. 

처음에는 다 이해하는 척 가면을 썼다. 

하지만 불같은 성격은 가면까지 태워버렸다. 

활,

활,

활. 


을지로 '잔'


나의 영혼 없는 리액션은 금세 들통 났다. 

쉽게 상처받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다 내가 병을 얻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개복치들을 연애 상대처럼 굴었다.


연애할 땐 ‘상대가 좋아하는 행동’을 하기보다는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때 더 오래갈 수 있다-고 글로 배웠다. 

개복치들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열심히 관찰했다. 

개복치들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에세이들도 챙겨 봤다. 

의외로 개복치들을 힘들게 하는 행동은 특별하지 않았다. 


장난이랍시고 막말하는 것, 

개인의 취향을 비난하는 것, 

아무 말 없이 슬쩍 업무 기한을 어기는 것… 

그냥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 행동들을 ‘폭탄 돌리기 게임’ 속 폭탄이라고 치자. 

나 같은 사람은 폭탄을 받으면 상대에게 두 배로 돌려주거나 내다 버린다. 

다신 나에게 이런 거 주지 못하게. 

그 과정에서 조금 상처를 입긴 해도 자고 나면 나을 정도. 


하지만 개복치들은 조용히 폭탄을 떠안더라. 

차곡차곡 쌓인 폭탄이 터졌을 때서야 조심스레 남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러게 왜 안고 있느냐’는 말과 함께 새로운 폭탄을 받는다. 

와우!



그런데 웃긴 건 나는 개복치들이 개의치 않아 하는 부분에서 폭탄을 떠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게 터지면 너무 큰 타격을 받는다. 쉽게 수습하지 못한다. 


나는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최근 자존심을 크게 다친 적이 있다. 깊은 상심에 빠졌지만, 개복치가 담담한 위로를 건넨 덕분에 내 품에서 터졌던 폭탄의 잔해를 깨끗하게 치울 수 있었다. 


나는 뒤끝 없고 화끈하니까 성격이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오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개복치들이 더 훌륭했다.


내 주변의 소중한 개복치들이 다치지 않도록 그들이 싫어하는 행동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영혼 없는 리액션은 여전히 못 하지만.



“우와~ 되게 많다! 어떤 잔 고르실 거예요~?”

을지로 ‘잔’에 놓인 와인잔들을 보며 그녀가 들뜬 표정으로 말한다. 


왠지 모르게 옛날 만화 '호호 아줌마'가 생각나는 공간이다.

나와 그녀가 집은 와인잔은 우리처럼 너무 달랐다. 

쌉싸름한 레드 와인을 고른 나는 아무 무늬 없는 넓적한 와인잔을 골랐다. 

손잡이 부분이 화려하게 조각된 게 마음에 들었다. 

달콤한 화이트 와인을 고른 그녀는 자그맣고 노란 꽃이 잔뜩 피어 있는 잔을 골랐다. 


와인을 다 마시고 아쉬워서 찍은 사진.


“으, 내일 출근하기 싫다!”

각자의 성격 같은 와인을 홀짝이며 달고 쓴 이야기를 쏟아냈다. 

아마 그녀와 내가 같은 성격을 가졌으면 이런 저녁을 보낼 수 없었겠지.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와 12번 사이 

골뱅이 골목 초입

작은 선간판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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