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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을 그만둔 순간까지도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직사회의 실상을 정확하게 다룬 책을 내야겠다는 추상적인 기획은 머릿속에 있었지만, 그걸 부분적으로라도 내보일 원고조차 없었다. 출간에 대해 상의한 출판사도 없이 덜컥 사표부터 낸 나의 선택에 대해 성실하고 똑똑한 주변의 지인들은 대체로 터무니없어 했다. 이는 나를 향한 인간적인 응원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준비된 원고도 없이 갑자기 의원면직부터 신청하게 된 이유의 팔할은 인사과 때문이었다. 서기관을 달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대통령실로 파견을 가야 한다고 떠미는 것 아닌가. 인사가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건 너무 잘 알지만, 갑자기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곳으로 일반직 공무원이 가라는 건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에는 일하는 내내 꾹꾹 눌러놓았던 무력감과 분노 때문에 위장이 말을 듣지 않을 정도였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문면 그대로 위장이 아파 며칠을 끙끙 앓아누워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 나는 한순간도 여기 더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더이상 미련 없이 직을 던지는 순간이 언제여야 하는지는 본인만이 또렷이 알 수 있다.
생각나는 재밌는 에피소드에 그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 몇 달간 원고를 썼다. 그리고 평소에 유심히 봐둔 출판사들에 투고를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투고 이후 한 달간 몇몇 군데에선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고,(거절의 이유로는 주로 '우리 출판사의 방향과는 맞지 않아..'가 많았으며 '이 원고를 잘 팔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곳도 있었다) 대부분의 출판사에선 답신조차 주지 않았다. 그간 써놓은 원고를 사장하긴 아까워, '사무관은 이름이 없다'라는 제목으로 브런치에 연재를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연재에 대한 반응은 꽤 뜨거웠다. 내가 쓴 글인 줄은 어떻게 알았는지(하긴 서기관 달자마자 문체부에서 때려친 사람이면 공직사회에서 바로 특정되긴 하지만) 연락이 뜸했던 주변의 지인들에게 잘 읽었다는 격려의 연락도 종종 받았다.
브런치에 올리기 시작하고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투고한 출판사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보완 작업을 하여 출간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신인작가 입장에서 찬밥, 뜨거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닌데도, 괜히 출판사가 내민 계약서를 유심히 보는 척 했다. 고맙고 설레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손을 내민 출판사는 '도서출판 사이드웨이'이다. 『K를 생각한다』(임명묵, 2021), 『자살하는 대한민국』(김현성, 2024) 등을 펼쳐낸 인문사회 분야의 실력 있는 출판사이다.
계약을 하고 지난 4달 간 사이드웨이의 박성열 편집장님과 함께 책을 다듬었다. 브런치에 연재한 내용은 목차의 유기성에 맞게 정리하고, 필요한 내용은 추가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종이책 원고의 분량은 브런치에 연재한 양의 두 배가량이 되었다. 한 권의 책을 쓰는 일은 브런치나 SNS에 토막 글을 쓰는 작업과는 완전히 달랐다. 먼저 뚜렷한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목차가 있어야 했고, 목차 간의 흐름을 연결한 자연스러운 흐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독자가 자연스럽게 저자의 시선을 따라오게 하려면 글쓴이의 개인적인 퍼스널리티도 중요했다. 그래서 화곡동 빵집부터 시작하여 목동에 이르게 되는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추가했다. 무엇보다 날카롭기만 하고 허무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대안도 고민했다. 편집 1~4교, 그리고 최종교에 이르는 작업의 전 과정은 박성열 편집장님의 세심한 피드백 아래 이루어졌다. 브런치에 연재한 글과 종이책의 질적인 차이가 독자에게도 느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사이드웨이의 박성열 편집장님의 역량 덕택이다.
책의 제목은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로 정했다. 입만 열면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공직사회의 무기력과 무능을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조장하는 관료의 이중성을 제목에서부터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처음에는 원래 제목이었던 '사무관은 이름이 없다'에 비해 너무 강렬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주제의식을 제대로 독자에게 전달하려면 이 정도의 제목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음 주,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에 유통이 시작된다.(빵집 아들의 운명인가!) 보통 온라인 서점의 입고가 빠르고, 오프라인 서점에 깔리는 건 시일이 며칠 더 걸린다고 한다. 솔직히 신인작가로서 책이 출판되는 일이 마냥 신기하고, 고생한만큼 책이 팔리기를 바라는 순진한 기대도 크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보다는 책이 사멸하는 시대에 출판계의 일원이 된다는 무게감과 부담감이 훨씬 크다. 특히 이 업계의 정책을 한때나마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출판업계에 전반적으로 스며든 거대한 무력감에 대해서는 일말의 책임감마저 느낀다.
좋은 영화는 관객이 영화관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좋은 책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의 삶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책이야말로 진정으로 좋은 책이라고 믿는다. 나의 책으로 새로운 대화와 공감, 그리고 비판의 자리가 조금이나마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용기를 내어 던진 메시지가 어디까지 닿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책이 가진 힘을 믿으며 그 가능성을 오롯이 긍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