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자본주의적 성전을 꿈꾸는 낭만적 시인의 상상력
숲으로 된 성벽
저녁 노을이 지면
신들의 상점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와 함께
성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
어느 골동품 상인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라캉 이론에서 말하는 실재계는 상징화가 불가능한 곳이다. 상징화에 맞서 저항하고 있는 곳인 실재계는 상징화되면 죽어버리는 곳으로, 상징계가 상상계를 구조화하고 상징계 내의 구멍 속에 바로 실재가 자리한다. 상징계는 구멍난 세계이며, 주체는 판타지로 그것을 채우지만, 판타지의 공식의 대상에 갈수록 현실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실재계는 상징계의 질서로 설명되지 않고, 시인은 그 불가능함을 쫒아가며 그러한 곳은 현실과는 괴리된 성스러운 곳, 신의 세계일 것이다. 기형도의 시 <숲으로 된 성벽>의 장소는 분명 상징계의 질서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곳이다. 구름이나 공기가 되지 않는 이상 현실에서 갈 수 없는 곳이고, 그곳으로 갈 수 없기에 존재하는 실재계라고 생각된다. 기형도는 경험된 적 없는 이상적 장소를 목가적인 시어로 신들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근원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
노발리스나 횔덜린 같은 뛰어난 문인들은 고대 희랍 세계를 이상적인 공간, 근원적 공간으로 그렸고, 기독교인에게는 성지 예루살렘이 그러한 곳일 것이다. <숲으로 된 성벽>에서 나타난 이상적인 공간인 '근원적 고향'은 하이데거의 그토록 그리워한 '숲'의 메타포를 차용한 공간으로 읽혀진다. 그 공간은 현대 문명과는 단절된 향토적인 곳, 성스러운 존재가 남아있는 장소이다. 그런 성스러운 곳에 가기 위해 물질적 욕망을 지닌 채로 도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목가적인 당나귀 탄 농부는 일살적으로 수 있더라도, 소문을 듣고 온 물질적
가치를 품고 온 골동품 상인은 도달할 수 없다. 즉, 시인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골동품 상인을 비웃고 시적 상상력에 기대어 영원한 고향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분명 숲으로 된 성벽은 보이지 않지만, 시인에 따르면 존재하는 곳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곳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 주목하는 존재자이다. 기형도의 시 <어느 푸른 저녁>에서는 물화된 도시에서 환멸을 느껴 방어구로 시적 상상력을 착용한다면, <숲으로 된 성벽>에서는 물화된 도시를 저버리고 이상적 공간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시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물론, 자연 -도시/ 농부-골동품 상인이라는 투박한 이항대립이라는 인식이라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기형도의 섬세한 언어는 낡다고 평가되는 인식을 잠시 망각하게 해준다. 즉, 기형도의 <숲으로 된 성벽>은 낭만적 심상에, 소박한 향토적 언어, 종교적 신비로움이 융화되어있다. 도시에서 이탈해, 편안에 이르고 싶어하는 욕망이 느껴져 읽는 이로 하여금, 몽상에 빠지로독 하는 마성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