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을 넘은 고전,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by 꿈꾸는 곰돌이

신형철 평론가는 진은영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2003)을 두고, 명품이라고 말한다. (느낌의 공동체) 재료도 고급이고 만툴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 독자가 많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말한다. 나는 이 시집이 나온지 20년이 된 시점에서는 고전이라고 부르고 싶다. 진은영이라는 이름은 문단 내에서, 시 창작 지망생에게 꾸준히 읽혀왔고, 가장 모범적인 2000년대 이후 미래파라는(다만 이 용어는 은어적인 성격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새로운 경향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이러한 무겁고도, 중대한 이름의 시작이 바로 이 시집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믿으로품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감을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길


시, 일부러 뜬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일곱 개의 단어로된 사전》전문


이 시는 초월적 향연에 초대된 이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편지다. 작성자는 진은영이고, 독자에게 쓰여진 편지이다. 진은영 시세계에 대한 편지이기도, 진인영이 영향 받았던 수많은 시인들의 시세계에 대한 초대장이기도 하다. 확실히 80년대 민중시와는 전혀 다르고, 그렇다고 최승자나 김혜순 같은 여성 시인의 시세계와도 조금 다르다. 진은영 시는 기존 시를 설명하는 렌즈로 도저히 설명 불가능하기에, 진은영은 표제시를 빌려 자신의 시세계에 독자를 초대한다. 그 시세계는 혁명적으로 보인다. 사실 그녀뿐 아니라, 모든 시세계는 가히 혁명적이다. 혁명?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존 질서가 아래로 자라는 유한화서라면, 시는 무한화서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질서가 전복된 세계를 상상하는 시는 급진적이며, 시인은 그런 세계를 선험적으로 관찰하는 견자일 것이다. 진은영은 혁명 이후의 향연에 가서 상상한다. 눈을 감으며 신비한 회오리를 보고, 존재한 적 없던 잎맥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녀의 세계에서 내려와 대중을 시의 세계로 안내하는 사도가 된다. 그것이 시인의 꿈을 꾸는 혁명가의 임무, 혁명을 꿈꾸는 시인의 임무이다.


그외에도 <첫사랑>, <봄이 왔다>, <정육점 여주인>, <멜랑콜리아> 등 그녀의 초기들이 담겨있는 이 시집은 명품이자, 지읽어야 할 고전이다. 기존 시인들과는 다른 문법을 사용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녀도 사랑이라는 시인들의 에스페란토에 기초해있기에 느낌을 연다면 읽을 수 있을 만한 시들이 많다. 20년도 더 된 시들에는 섬세한 낯설게 하기로, 사랑과 멜랑콜리를 모두 느낄 수 있다.


(2024년, 1월, 31일 제주도 본가 작은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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