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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Mar 21. 2024

너무 밝은 빛이 도래할 종말의 위기

한병철 《투명사회》

너무 밝은 빛이 도래할 종말의 위기, 《투명사회》, 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2010년대 이후, 한국에서 대중과 학계를 넘나들며 주목할 받는 철학자가 있다. 한국 태생이 독일 철학자 한병철 교수이다. 분명 한국 태생이지만 독일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며, 저술 역시 독일어로 한다. 미셀 푸코, 하이데거, 벤야민, 아감벤 등 대륙철학자들을 계승하면서도 포스트구조주의와는 다른 방식의 철학, 그리고 사회 비평을 한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비판이다. 긍정성이 과잉이 만든 소진 사회, 약물 사회를 다룬《피로사회》, 신자유주의가 당근을 통해 주체를 성과 주체가 된 현 에로스의 종말을 염려하는 《에로스의 종말》, 타자가 사라짐으로써 타자 변증법의 상실을 염려하는 《타자의 추방》등 다양한 그의 저서는 공통적으로 밝은 시대는 어떻게 어둠을 말하는가를 다룬다. 즉, 그의 저서는 '너무 밝은 빛이 시인을 암흑으로 밀어 넣었다'는 횔덜린의 시구절을 떠오르게 한다.《투명 사회》역시 그 맥락에 있다.

 오늘날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투명 사회'가 신뢰 사회가 아닌 통제사회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불가피하게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 성격을 띠게 된다. 정치는 잡담처럼 얄팍해지고,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지향적 비전은 희소해지고, 천천히 무르익어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배려는 점점 더 줄어든다. 투명 사회는 긍정성을 위해 부정성을 해체해가고 있으며, 그리하여 투명 사회의 일차적 모습은 긍정 사회라고 말한다. 부정성을 떨쳐버릴 때, 투명해지는데 이러한 투명성은 긍정성을 띄지만, 반대로 모든 해석학적 깊이가-즉 의미가 사라질 때 포르노가 된다. 즉, 투명사회는 동일한 것의 지옥이다. 형이상학적 사고에 따르면 빛은 선/어둠은 악이라고 보나, 빛만 과잉한 투명사회는 사실 선한 사회 아니라, 변증법과 해석학에 작별을 고하며, 긍정성 속에서 질주한다.진리의 층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결국,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진리의 결핍-존재의 결핍을 드러낸다.

 이러한 투명 사회는 한편 전시 사회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제의가치는 존재 여부에 달려 있을 뿐 전시와는 상관없다고 하는데,  긍정사회에서는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진다고 말한다. 전시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의 강요는 멂의 현상으로서의 아우라를 완전히 없애버렸으며, 이러한 자본주의의 전시가치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시사회는 모든 것이 전시 가치로 측정되는 투명 사회이기도 한데, 이 지점은 포르노적 사회의 특성이다.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하며, 외설적인 것 속에서 사물들의 고유한 형태는 사라진다. 이러한 포르노는 에로스뿐만 아니라 섹스마저 파괴하고, 포르노적 던시는 오히려 섹스의 쾌락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말한다.

 투명사회는 쾌락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이다. 인간적 쾌락의 경제 내부에서 쾌락과 투명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비밀과 베일과 은폐와 같은 부정적 요소야말로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강화한다. 그래서 유혹자는 가면, 환상, 가상을 가지고 노는데, 투명성의 강제는 쾌락의 놀이 공간을 파괴한다. 명백성은 유혹 대신 절차만을 허용하며, 오늘날 포스트프라이버시의 관행 역시 쾌락을 파괴한다. 동경하던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만큼 더 큰 기쁨을 맛보는 것이고, 비유의 외투는 말을 더 에로틱하게 만든다. 그래서 감추어져 있다는 부정적 특성 해석학슬 에로티즘으로 만드나, 정보는 적나라하다.

포르노사회의 특징인 폭로는 가려진 것을 없애버리며 벌거벗게 만든다. 벌거벗은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형식의 포르노적 벌거벗음 역시 폭력이다. 살덩어리가 된 몸은 숭고하지 않고 외설적이다. 그러한 벌거벗음은 기품을 희생시키며,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활용하게 된다. 한병철은 투명성을 비판하기 위해 바르트의 사진 이론을 가져온다. 좋다/싫다의 층위인 스투디움과 호감을 뛰어넘는 어떤 상처, 격한 감동, 당혹감을 낳는 푼크툽 중에서 단조로운 사진은 푼크툼이 없는 사진이고, 푼크툼에는 명백성과 투명성이 없다고 말한다.

투명사회는 통제사회이다. 투명성우 또 일반통행적 성격을 지니며,모두가 모두를 가시성과 통제구역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전면적 감시 속에서 투명한 사회는 비인간적인 통제 사회이며, 모두가 모두를 통제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투명사회는 정확히 성과사회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 구조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유의 변증법은 통제 사회의 바탕이기도 한데, 자기 조명은 자유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서 타자 조명보다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단지 에고의 집합처럼, 우연한 무리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파노팁콘의 건설에 동참하는데,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이것이 바로 곧 자유의 변증법이며,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고 말한다.

여타의 비평가들이 우리사회의 어둠을 고찰하는데 탁월했다면,  한병철은 시인의 시선으로 자유의 변증법을 읽어낸다. 너무 밝은 빛에 휩싸여있다는 진실이 우리를 더욱 궁핍하게 만드는 현실에 대해 해결책을 말하지 않지만, 오순절의 필요성과 환대의 개념이 힌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빛과 어둠의 변증법을 위하여...

(2024.3.24.추위와 따스함이 공존하는 3월 중순, 학교 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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