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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수봉 May 10. 2022

육아 번아웃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니.

아이를 돌보기 버거운 엄마들에게.


그저 육아가 고된 줄 알았다. 그냥 남들도 다 힘드니까 그냥 힘든 줄 알았다. 체력이 좋지 않아 운동을 꾸준히 이어갈 수가 없는 줄 알았고 , 집안일하랴 아이들 키우랴 정신이 없어 깜빡깜빡하는 것들이 많아진 줄 알았다. 아침에 눈을 뜨기 힘든 건 , 밤새 아이들과 뒤척거리면서 잠을 잤기 때문인 줄 알았다. 아이들과 하루 종일 복닥거려 감정소비가 많아 다른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싶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저 만성피로인 줄 알았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육아번아웃 정도?



그런 날들이 지속되는 중에 뜬금 작가님의 ‘나는 내가 우울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를 읽게 되었다. 정말 뜬금없이 밀리의 서재의 알고리즘에 의해 읽게되었다. 신기한 인연이어라.


기분부전증이라고 함은 기분부전장애라고 불리는 우울증의 한 형태. 주요 우울증과 비슷하지만 증상이 좀 더 경미하고 2년 이상 증상이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하는 한 늘 우울해왔다고 말한다. 기분 저하, 짜증, 사물에 대한 관심 결여, 무기력, 피로, 과다 수면 혹은 수면 장애, 우유 부단, 비관적, 낮은 자존감. 주요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평균보다 높다. 병인 줄 모르고 자신의 성격일 거라 여겨 도움을 요청할 생각조차 못 한다.

심각하게 우울한 것은 아니다. 그저 늘 수심 몇 미터 아래에 있는 정도의 감각이랄까. 야트막한 우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도. 수면 아래 물속에 살아가는 일상이라고 해야 할까. 따뜻한 빛보다 차가운 심해에 더 가까웠다. 나는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리고 답답하고 적막한 사람이다. 걱정이 많고 ,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많았다. 삶의 전반이 얇은 우울의 껍질로 뒤덮여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잔잔한 우울감은 내 삶에 전반적으로 깔려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다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는 기분부전증일까?' 하는 생각에 일기장을 뒤적였다.   



2020. 03.19

오빠가 설거지하고 있는 내게 그랬다. 요즘 힘이 좀 빠져있는 것 같다고. 그래 맞다. 나는 요즘 힘이 좀 빠져있는 상태. 그냥 힘이 안 난다. 무기력하고 또 무기력하다. 우울한 건 아닌데, 의욕이 없다.


얼마 전 교회를 옮겨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로는 일상의 계획을 세워 힘을 내는 정도가 되었는데, 의욕이 잘 생기질 않는다. 책을 읽어도 재미가 없다. 에세이는 에세이라 싫고, 육아서는 답답한 마음에 그만 읽고 싶고, 기독교 서적들은 집중 자체가 안된다. 소설은 원래 싫어하고 자기 개발서는..? 이제 그만 개발하고 싶다.

이 무력감이 얼마나 더 갈까.


2020.10.27

나의 예민함과 반비례하여 아이를 향한 기다림의 마음이 줄어든다. 아이는 기다려준다면 충분히 해낼 줄 안다. “손 씻자!” 하고 조금만 기다린다면 (기다리면서 속으로 찬양을 한곡 부른다) 싱글싱글 웃으며 의자로 올라온다. 그러나 나의 촉이 곤두서 있는 날이면..... 이하 생략.


노력하고 있는데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 자. 사람은 누구나 그래!라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토닥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늘 합리화를 할 테니.


어슴푸레 밤이 깊어져 , 슬슬 재워볼까 싶어 아이를 잠옷으로 갈아입히며 “엄마가 오늘 시온이에게 짜증을 낸 것 같아. 미안해”라고 하자

아이가 그랬다. “엄마 조아”


미안함과 더불어 울컥함이 단전부터 올라온다. 아이는 침대에 , 나는 바닥에 몸을 뉘었다. 아이의 침대가 높지 않아서 아이의 그 짧을 팔을 내딛으면 내가 바로 만져지는데 , 둥그런 얼굴을 침대 모서리까지 바짝 땅겨 눕고는 그 작고 두툼한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눈이 사라질 때까지 씩 웃으며 “엄마 이삐(예뻐)” “엄마 조아”이라고 중얼거린다.


저 둥그런 찐빵 같은 놈이 내 속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의문스러운 점은 이렇게 부족한 나라는 사람에게 어찌 저런 무한사랑을 주는 아이가 찾아온 것일까.


 아이 마음이 다치지 않게 견고하고 단단히 아이를 키워내고 싶다. 

그러면서 나도 조금 성장하겠지.


2021.03. 21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익숙해지는 감정일까. 어렵다. 오늘은 정말 답답하고 끝없는 레이스라는 생각에 답답해졌다. 오빠와 아이 둘만 두고 나온다는 게 마음이 많이 걸리기는 하는데... 그렇기는 하는데... 어쩔 수 없다. 하하


아이를 키워내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가 싶다.

근데 또 귀엽고 뭐야 이게 뭐야.


2021.10.1

언제쯤 기분이 좀 나아질까. 매일이 피곤하고 매일이 예민하고 매일이 짜증 난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다는 거 자체가 너무 싫다. 오늘은 또 이유식 만들어야 하는데 좀 한가한 날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바쁘고 번잡한 날이 지나가는 게 싫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좀 며칠만 정말 쉬었으면 좋겠다.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겠지.




일기장에서 마주한 나는 무척이나 자주 밀려오는 우울감들에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 지금 기분이 왜 이러지? 이게 맞나? 라며.



특별히 기분이 나쁘지도,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은데 매번 ‘괜찮으냐'는 질문을 받는다. 가만히 있어도, 별 다른 생각이 없어도 나는 아프거나 울고 있거나 슬프거나 무슨 일이 있는 사람이 되고는 한다. ‘얕은 우울이 조금씩 오래도록 스며들어서 내 얼굴 전체를 뒤덮은 걸까’

<나는 내가 우울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뜬금> 중에서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슬퍼 보여" “어제저녁에 잠 못 잤어?”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아침에는 우울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최근들어 아침에 자주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좀 추스러드는 정오쯤이 되면 조금 나아졌는가 싶다가도 오후가 되면 극심하게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그저 피곤해서 그런 거라 여기기는 했지만 ,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날들 또한 있었다.


아이들과 있으면서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는 순간들이 늘어갔다. 작은 일에도 이성의 끈이 달랑거렸다. 웃고 넘길 수 있는 일들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고 , 즐겁고 재밌게 ‘논다'라는 자체가 잘 되지 않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끌어내야 아주잠시 아이들과 신나게 놀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혼자 있고 싶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고 싶었다.

할수만 있다면 숨도 쉬고 싶지 않았다. 그것 조차 귀찮아서.


타인과의 만남을 줄여갔다. 카톡이 점점 쌓여갔다. 타인과의 대화와 만남이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여유가 좀 되는 날에는 어느 정도 이어가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그냥 뭐.


재미와 흥미가 사라졌다.  

식욕은 거의 없었다. 점심은 거의 생존으로 아이들과 먹었고 최소한 살아갈 정도로만 먹어냈다. 그러다 꽂히면 폭식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살이 빠지지 않은 이유는 케이크나 등등의 것들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려나? 싶어서 감정의 식사를 해냈기 때문이었다. 세상 좋아하던 라면조차 맛이 없어졌다.



병원의 문턱을 넘기는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병원을 갈 정도인가?를 구분하기가 좀 오래 걸렸다.  단순한 번아웃이 아닌 스스로에게 이상함을 감지하고 병원을 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 이유로는,

1. 아이들에게 내 우울함이 물들까 무서웠다.

2. 타인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대화조차 버거워졌다는 건 충분한 이상신호라 여겨졌다.

3. 유독 벅찼던 날이었는데 아이들 책을 읽어주다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 들면서 3초 정도 숨이 안 쉬어졌다.


그리곤 바로 다음날 병원을 향했고 ,

난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선생님 , 제가 우울증이라구요? 저 꼭 약먹어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 차분히 답을 해주셨다. 과학적인 근거를 들이미시면서 하하.


자율신경계 검사에서 부교감신경과 교감신경이 아예 반대 곡선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전형적인 우울증 그래프를 보인다고. 우울증 점수가 높기도 했고.



문장 완성검사를 했다. 

다른 답들은 술술 잘도 적어 내려 갔는데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으려면"이라는 문장에서 탁 막혀버렸다. 골똘히 생각을 해봤는데도 모르겠어서 다른 것들을 다 적고 나서 다시 그 문장으로 돌아왔다.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으려면 ,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결국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막연하다.


에스벤 50mg로 약복용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침에 한번.

이 한알의 약이 나의 기분을 좌지우지 한다는 사실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나머지 한알은 위장약


복용을 하고 며칠이 지나자 아이들을 마주하고 온전히 사랑해줄  있게 되었다. 같이 즐겁게 뛰어놀  있게 되었다. 이 부분이 정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행복하다. 물론 아이들과 하루 종일 복닥거리는  힘들지만 , 결이 달라졌다. 여유롭게 힘든  견뎌낼  있다. 농담을   있게 되었다. 아직 식욕은 없지만 , 그럼에도 아이들과 같이 밥은 먹을  있게 되었다. 활기를 되찾았고 , 머릿속의 뿌옇던 안개가 걷힌  같았다.


나만 이런 경험을 했을까 싶었던 차에 송희재 작가님의 <나는 예민한 엄마입니다>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기분이 좋아졌고 몸이 다시 마음대로 움직여졌다. 멍했던 머리가 맑아지며 기억력과 집중력이 회복됐다. 산책하며 불어오는 바람에 기쁨을 느끼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짹짹거리는 새들이 예뻐 보였다. 점차 에너지가 회복되어 아이와 다시 깔깔 웃으며 춤출 수 있게 된 어느 날 밤에는 아이를 재우고 많이 울었다. 우울증 약은 플라세보 효과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약을 먹고 머릿속의 안개가 깨끗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나 같은 사람들은 이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135p


일주일 뒤 병원에 다시 방문하여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약빨이(?) 잘 받은걸 보니 확실히 뇌의 호르몬의 문제였던 것 같다고 했다.


다행이다.


의지력의 문제가 아닌 호르몬의 문제라니.

내 모성애의 문제가 아니라니 다행이다.


치료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적절할 때 병원에 잘 와주었다고 선생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이대로 방치했다가 더 늦어서 오게 되면 치료가 더 오래 걸릴 것이라 한다. 아이를 보면서 이렇게 병원에 오는 경우가 많은가 물었다. 내가 너무 유난 떠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대부분은 우울해서 오는 것보다 아이를 보기 버거워지고 짜증이 많아지는 이유로 내원을 한다고 한다. 그러다 우울증을 진단받고. 또는 그저 힘든갑다 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우울증이 극에 치달아 오는 경우도 있고.

병원에 가기로 결단한 나의 용기를 칭찬한다. 잘했다. 정말.


더불어 , 내게 혼자 있을 시간을 내어주고 내면의 우울감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주부습진 걸려가며 집안일과 여러 가지 배려를 해준 남편에게 너무 고맙다. 우울증 점수가 더 높이 나오지 않은 건 아마 신랑이 큰 몫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여하튼 본인의 상태를 점검해보고 이상하다 싶으면 주저 말고 병원을 방문해보았으면 좋겠다. 일단 가봐서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하고 , 그 정도는 아니다 하면 안심(?) 하고 본인에게 맞는 스트레스 대응 프로젝트를 시작하시면 되지 않을까. 개인 시간도 좀 갖고.


우울증을 마주하고 나니 삶의 결이 달라졌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 상태가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들과 마음껏 웃고떠들고 사랑해줄 수 있는 힘이 생긴 지금이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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