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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수봉 May 18. 2022

친애하는 나의 우울증에게

우울증치료 30일, 우울증 덕에 알게 된 감정들.


안녕 나의 친구 우울증아, 

오늘은 너에게 편지를 좀 적어볼까해. 네 덕에 요즘 알게 된 익숙하지만 낯선감정들이 많거든. 


요즘 들어 날씨는 좋고 공기마저 쾌청했건만 나 혼자서 만 한 여름의 비오기 전 습한 기운이 있는 침침한 날들이 이어졌어. 축축함을 머금은 나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그냥 재미도 없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갔었어.  


가족들과 친구들 심지어 직장사람들까지도 내가 늘 웃는 상의 밝은 아이라 했는데 , 어째서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는 그게 안되는지 의문이 드는 날들이 많았어. 분명 입꼬리를 올려 힘껏 웃은 것 같은데 눈은 멍하게 아이들을 봤었던것 같아. 분명 이 정도로 화를 낼 일은 아닌데 왜 언성이 높였을까.  (ㅇ_ㅇ)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아이 얼굴이 아직도 생생해. 아이들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도 한번 하려면 단전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했어. 아이들에게도 미안했지만, 사랑하는 나의 남편에게도 미안한 날들이 많아졌어. 습기를 잔뜩 머금은 축축했던 나는 늘 찌든 얼굴로 오빠를 마주했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습관처럼 이어갔지.



육아는 원래 힘든 거야, 누구나 다 그런 거야. 그래.. 그래서 그런 걸 거야. 이것 또한 지나갈 거야.라는 이야기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는데 , 실은 그 말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어. 너무 합리화 하는 것 같잖아.


꺼져가는 등불처럼 흔들거렸던 나는 혹여나 그 심지가 꺼지는 건 아닐까 늘 안절부절 하는 남편 덕분에 감사히도 꺼지지 않고 열심히 살아낼 수 있었어. 치료받는 것도 결심했고.


그리곤 요즘 , 우울증 덕분에 웃는 행위가 귀함을 알게 되었어. 


그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그저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만으로도 삶이 살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다시 진득한 우울감에 물들까 두렵지만 , 그럼에도 삶은 희로애락에 있음에 감사해. 네 덕에 평온함을 배웠어. 크게 하는 거 없이 아이들과 서로 간지럽히면서 깔깔 거리는 것만으로도 끝없는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주변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함으로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기쁨과 감사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어.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걸까. 따듯한 볕에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 아래를 걷고 있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어. 얼마만의 콧노래인지 모르겠다. 그 노래가 아이의 동요인 게 좀 흠아닌 흠이었지만 그것마저 웃기고 마음이 간지러웠어. 둥그런 찐빵 같은 내 아이들의 얼굴이 생각나서.


몇 달 만에 먹고 싶은 게 생각났어. 

그날은 12시간을 자고 일어난 날이었는데 문득 “그래 거기 프랜치 토스트. 그래 그거. 촉촉하게 달걀물을 머금고 시나몬가루와 슈가파우더를 톡톡 올린 바로 그 프랜치 토스트" 바로 그게 먹고 싶었어. '식욕'이 참 낯설더라. 한 7-8년 전에 먹었던 거니, 아무래도 그 집이 없어졌으리라 생각을 했는데 이게 웬걸 진짜 없어진거 있지.  그럼에도 괜찮았어. 몇 달 만에 먹고 싶은 게 생각났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뻐서 안 먹어도 배가 불렀으니까. 그때 그 추억이라도 되살려보고자 사진이 보고 싶어 검색을 했는데 서촌에서 망원동으로 이사를 갔다더라?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찾아보니 그 집이 그 집이네.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그 기분. 정말 그걸 오랜만에 느꼈어. 나이스.



딱히 그곳에 가지는 않아도 괜찮았는데 내가 블로그에 적어놓은 걸 읽은 남편은 아이 둘을 봐줄 테니 다녀오라고 했어. 무심하게 툭-이야기했어도 너는 이게 얼마나 큰 결심이고 나에 대한 배려라는 걸 알겠니?  볕이 좋은 날 시장 골목을 누비다가 도착한 그 곳. 프랜치 토스트를 한입 밀어 넣자 “그동안 힘들었지? 괜찮아. 이젠 정말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넌 괜찮아질 거야" 하는 위로가 입 안부터 퍼지더라고. 


우울증을 치료하기 전이었다면 어떻게든 천천히 집에 가려고 했었을 텐데 , 산책을 한 바퀴 돌고 아이에게 줄 스티커를 하나 사고 나니 가족들이 보고 싶어 안 되겠더라고. 얼른 집으로 돌아갔지.


몇 달간 나는 말라버린 장작 같았어. 


그런데 며칠 전 웹툰을 심지어 청춘 로맨스 그 빤하고 유치한 웹툰을 보다가 엉엉 울어버렸어. 그리고 우리들의 블루스 드라마를 보다가 대성통곡을 했지. 다른 이에겐 슬플 때 우는 게 별거라고? 싶겠지만 이제 슬픔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 것 같아.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고 울 수 있게 돼서 기뻐. 감정들이 몽글몽글 생겨나고 있어.


나의 친애하는 우울증아, 

네 덕에 내 삶이 얼마나 감사함과 다정한 것들로 가득 찼는지 요즘 알게 되었어. 더불어 먹는 것 또한 즐겁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된거 있지.


덕분이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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