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료 10개월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처음 맞이하는 겨울이다. 워낙에도 충전속도는 더디고 방전속도는 천하제일 빠른 사람이 우울증까지 있으니 그 간극이 더 멀어져 버린 것 같다. 봄에 진단받은 우울증은 봄을 지나 여름과 가을을 맞이하면서 충분히 나아지고 있었다. 날씨는 좋았고 바깥 활동이 많았으며 볕이 참 좋았었다. 찬바람이 불고 아이들 둘이 번갈아 가면서 감기에 걸리고 나에게도 옮기고 하면서 지독한 겨울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볕을 쬘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두 아이 낳고 난 후 찬바람에 이가 시린 정도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더욱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바깥 활동을 줄여나갔다.
무방비하게 맞이하는 첫겨울은 더 혹독하기만 한 것 같다. 아무래도 '난 이제 괜찮아'라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되려 내게 독이 된었던 것일까. 겨울은 준비했어야 했는데 안일했다. 하다못해 마음의 준비라도 했었어야 그나마 견딜만했을 텐데.
텐션이 한 단계 더 낮아졌고 , 혼자서 충전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과호흡이 올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날들이 늘어간다. 내일은 올 겨울 들어 가장 한파가 찾온다며 재난문자가 연신 울린다. 영하 17도까지 떨어진다지? 동파에 주의하라고 한다. 이번 설명절은 토/일/월/화 이렇게 4일간이었다. 오랜만에 친척들도 만나고 함께 밥도 먹고 참 좋은 날인건 분명한데 , 내게는 영하 17도 정도 되는 한파가 찾아온 거나 다름없었다. 거의 풀타임으로 사람들과 부대껴야 했고 같이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급속도로 방전되는 에너지 때문에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을 감출길이 없었다. 그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내년 겨울은 지금보다 조금 더 현명하게 보낼 수 있을까.
일단 , 좋아하는 겨울의 순간들을 적어보았다.
1. 따듯한 볕이 들어오는 한낮, 볕이 드러 진 자리에 포근한 이불을 펼치고 누워서 책을 읽다 잠이 드는 것
2. 아침에 일어나 급할 것 없이 멍 때리고 앉아서 마시는 따듯한 커피
3. 아이들을 품에 한가득 안아 꼭 안고 있는 순간
4. 나보다 커다란 남편이 나를 품 안에 쏙 안아주는 순간
5. 아이들의 말랑거리는 손과 발을 만지는 것
6. 시끄러운 카페에서 노이스 캔슬링으로 노래 들으면서 멍 때리는 것
7. 와인 한잔에 적당한 취기가 돌아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
8. 밀리의 서재에서 괜찮은 책을 발견하는 순간
9.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는 “잘 잤니?”라고 물으면 양쪽에서 부스스한 찐빵 두 개가 ”엄마! “하고 내쪽으로 얼굴을 드리미는 것
10. 아침에 일어났는데 “오늘은 좀 살만한 날이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
11. 화장실에서 아이들 몰래 보고 싶던 웹툰을 후다닥 보는 긴장감
12. 자기 전에 우리 집 큰 친구가 ”엄마 사랑해 “라고 이야기하면 옆에 있던 아직 말이 트지 않은 작은 친구가 ”므아아 “라고 이야기하는 것
13. 우리집 큰 친구랑 근처 카페에 가서 아이는 아이의 시간을 보내고 (주로 내 아이패드로 영어영상을 시청한다) , 나는 글도 적고 책도 읽으며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아무래도 에너지 레벨 자체가 낮아지는 겨울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순간들이 대부분 정적인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좋아하는 순간들을 하루에 두서너 가지는 경험해보도록 하는 것도 도움이 될것 같기는하다. 가급적이면 겨울엔 액티비티 하고 소란스러운 것들도 가득 채우기보다는 다정히 천천한 시간들을 보내는 것으로 엮어보아야겠다. 다만 , 이미 어나더 에너지 레벨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과는 어떻게 어울려야 좋을지는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다. 더불어 겨울 들어서는 아이들의 고음소리들이 한겨울의 냉기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운 날들이 종종 있어서 당분섭취를 하는 데 있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겨울이 지나고 따듯한 봄이 찾아오고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아님 말고 , 막상 안 나아진다면 그때 돼서 생각해 보지 뭐. 일단 남은 첫겨울을 지혜롭게 보내보자. 조금은 소란스러울지라도 다정한 날이 이어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