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맹수봉 Jan 25. 2023

우울증을 치료하며 맞이하는 첫겨울

우울증 치료 10개월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처음 맞이하는 겨울이다. 워낙에도 충전속도는 더디고 방전속도는 천하제일 빠른 사람이 우울증까지 있으니 그 간극이 더 멀어져 버린 것 같다. 봄에 진단받은 우울증은 봄을 지나 여름과 가을을 맞이하면서 충분히 나아지고 있었다. 날씨는 좋았고 바깥 활동이 많았으며 볕이 참 좋았었다. 찬바람이 불고 아이들 둘이 번갈아 가면서 감기에 걸리고 나에게도 옮기고 하면서 지독한 겨울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볕을 쬘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두 아이 낳고 난 후 찬바람에 이가 시린 정도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더욱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바깥 활동을 줄여나갔다.


무방비하게 맞이하는 첫겨울은 더 혹독하기만 한 것 같다. 아무래도 '난 이제 괜찮아'라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되려 내게 독이 된었던 것일까. 겨울은 준비했어야 했는데 안일했다. 하다못해 마음의 준비라도 했었어야 그나마 견딜만했을 텐데.


텐션이 한 단계 더 낮아졌고 , 혼자서 충전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과호흡이 올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날들이 늘어간다. 내일은 올 겨울 들어 가장 한파가 찾온다며 재난문자가 연신 울린다. 영하 17도까지 떨어진다지? 동파에 주의하라고 한다. 이번 설명절은 토/일/월/화 이렇게 4일간이었다. 오랜만에 친척들도 만나고 함께 밥도 먹고 참 좋은 날인건 분명한데 , 내게는 영하 17도 정도 되는 한파가 찾아온 거나 다름없었다. 거의 풀타임으로 사람들과 부대껴야 했고 같이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급속도로 방전되는 에너지 때문에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을 감출길이 없었다. 그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내년 겨울은 지금보다 조금 더 현명하게 보낼 수 있을까.


일단 , 좋아하는 겨울의 순간들을 적어보았다.



1. 따듯한 볕이 들어오는 한낮, 볕이 드러 진 자리에 포근한 이불을 펼치고 누워서 책을 읽다 잠이 드는 것

2. 아침에 일어나 급할 것 없이 멍 때리고 앉아서 마시는 따듯한 커피

3. 아이들을 품에 한가득 안아 꼭 안고 있는 순간

4. 나보다 커다란 남편이 나를 품 안에 쏙 안아주는 순간

5. 아이들의 말랑거리는 손과 발을 만지는 것

6. 시끄러운 카페에서 노이스 캔슬링으로 노래 들으면서 멍 때리는 것

7. 와인 한잔에 적당한 취기가 돌아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

8. 밀리의 서재에서 괜찮은 책을 발견하는 순간

9.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는 “잘 잤니?”라고 물으면 양쪽에서 부스스한 찐빵 두 개가 ”엄마! “하고 내쪽으로 얼굴을 드리미는 것

10. 아침에 일어났는데 “오늘은 좀 살만한 날이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

11. 화장실에서 아이들 몰래 보고 싶던 웹툰을 후다닥 보는 긴장감

12. 자기 전에 우리 집 큰 친구가 ”엄마 사랑해 “라고 이야기하면 옆에 있던 아직 말이 트지 않은 작은 친구가 ”므아아 “라고 이야기하는 것

13. 우리집 큰 친구랑 근처 카페에 가서 아이는 아이의 시간을 보내고 (주로 내 아이패드로 영어영상을 시청한다) , 나는 글도 적고 책도 읽으며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아무래도 에너지 레벨 자체가 낮아지는 겨울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순간들이 대부분 정적인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좋아하는 순간들을 하루에 두서너 가지는 경험해보도록 하는 것도 도움이 될것 같기는하다. 가급적이면 겨울엔 액티비티 하고 소란스러운 것들도 가득 채우기보다는 다정히 천천한 시간들을 보내는 것으로 엮어보아야겠다. 다만 , 이미 어나더 에너지 레벨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과는 어떻게 어울려야 좋을지는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다. 더불어 겨울 들어서는 아이들의 고음소리들이 한겨울의 냉기만큼이나 견디기 어려운 날들이 종종 있어서 당분섭취를 하는 데 있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겨울이 지나고 따듯한 봄이 찾아오고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아님 말고 , 막상 안 나아진다면 그때 돼서 생각해 보지 뭐. 일단 남은 첫겨울을 지혜롭게 보내보자. 조금은 소란스러울지라도 다정한 날이 이어지길 바래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해도 아이들과의 일상은 흘러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