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상의 ‘권태’라는 책을 읽고 그런 감상을 남긴 적이 있다.
‘숨을 쉬는 순간 마다가 권태로워 세수할 적마다 자살을 꿈꾸지만 그런 건 그저 생각만 할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삶은 곧잘 권태라는 이름으로 자리한다. 일말의 차이가 있다면 지금의 내게 있어 권태는 극복해야 하는 감상이라는 점이다. 권태는 언제나 찾아온다. 나와 인생 사이에서도, 나와 타인 사이에서도, 나와 일 사이에서도 권태는 소리소문 없이 찾아와 말을 건다. 나 잊은 거 아니지?
그러면 이내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 이 지난한 삶이 마치 기나긴 형벌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찾아오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속에서 끊임없이 차오른다. 대체 왜, 왜 일 해야 하지? 왜 살아야 하지? 왜 밥을 먹어야 하지? 왜 웃어야 하지? 수많은 왜 사이에서 고개를 빙빙 돌다 보면 침대에 누울 수 있다.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 자고 일어나면 다시 왜와 또 다른 왜 사이에서 지긋지긋한 쳇바퀴를 돌곤 한다.
올해 초, 아직 거리에 눈이 새하얗게 쌓였을 때 친구를 만나 그런 얘기를 했다.
“자꾸 누가 머릿속에서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슨 말을? 누가?”
친구는 그게 대뜸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몰라. 그냥, 자꾸 그만두라고. 이제 그만둘 때라고. 자꾸 옆에서 소리치는 기분이야.”
“뭘 그만두는데?”
“일을”
그러자 친구는 절레절레 빠르게도 고개를 저었다. 너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편안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며. 내가 세상 밖에 나와보니 새삼 알겠더라고. 막상 나와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고. 조용히 입 닫고 빵이나 먹으라고.
그런데 너는 모르잖아. 내가 얼마나 미칠 것 같은지. 이 권태로움에 빠져 곧 숨도 못 쉬고 죽어버릴 것 같은데 너는 그거 모르잖아. 차마 그런 뱉지 못할 말들을 입속에서 굴렸다. 날카로운 말들이 입안을 상처 내는 듯 그즈음엔 입안이 자주 헐었고 구멍이 났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되는 거였지. 집에 돌아와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이해받지 못할 감정들을 내뱉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이 착잡한 일인지.
그리고 여름. 반년이 넘게 죽은 듯이 또는 곧 죽을 듯이 살았다. 누구도 내 마음속 깊은 불행은 몰랐으면 싶어서,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았다. 불현듯 찾아오는 이 지긋지긋한 감정을 억누르고 싶었다. 매번 그 감정을 표출하면서 불안정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권태라는 건 저 문장을 쓰기 훨씬 전부터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고, 어쩌면 내가 이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자리하고 있을 모양이니까. 나는 이 감정을 통제하고 싶었다.
그 반년을 죽은 듯이 살면서 연습한 건 그런 것들이었다. 사는 게 치명적일 만큼 허무하게 다가올 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의미 없이 느껴질 때, 언젠간 부숴 없어질 이 육신이 하루빨리 허망해지길 바라고 있을 때, 나는 단순히 피곤한 것뿐이라고. 잘 먹고 푹 쉬면 사라질 감정이라고 되뇌며 휴식을 찾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죽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권태를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돌이켜보면 그저 나는 잘 먹고 잘 자는 가축처럼,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지난 반년을 보낸 것뿐이다. 여전히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중얼거리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니까. 웃고 떠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즐겁지 않았으니까. 웃는 것마저 의무감에 바친 것일 뿐이니까.
내게 특정한 삶의 의미나 목적이 있을까. 이 모든 권태를 끝장낼만한 근본적인 삶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이렇게 시간을 보낸 후 몇십 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지금은 그런 게 좀 두렵다. 이렇게 한탄을 잘하는데, 한탄을 잘하는 만큼만 머리를 굴려서 삶의 목적성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