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는 헝가리의 작은 마을. 1980년,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직전의 이곳에서는 시간마저 멈춘 듯합니다. 집단농장은 폐허가 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탈출만을 꿈꿉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돕니다. 몇 년 전 죽었다던 이리미아시가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는 이렇게 막을 올립니다. 헝가리 문학의 거장인 그는 한 마을의 몰락을 통해 인간 실존의 가장 어두운 면을 파헤칩니다. 단순히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제와 상관없이 인간이 품는 희망의 허무함, 구원에 대한 갈망이 초래하는 비극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작품의 형식부터
파격적입니다.
12개 장이
전후반부로 나뉘어
대칭을 이룹니다.
첫 번째 부분이
1장에서 6장으로 진행된다면,
두 번째 부분은
6장에서 1장으로 되돌아갑니다.
탱고의 스텝처럼
전진했다가 후퇴하는
이 구조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상징합니다.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악순환.
제목에 담긴 '사탄탱고'는
바로 이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의 춤을 뜻합니다.
마을에는 저마다의 비참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후투이 부부는 서로를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아내는 슈미트와 바람을 피우면서 공동 자금을 빼돌려 달아날 계획을 짭니다. 슈미트 부부도 비슷합니다. 누구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고, 모두가 배신을 준비합니다. 의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그는 창문 너머로 마을 사람들을 관찰하며 끊임없이 메모를 남깁니다. 그는 참여자가 아닌 방관자로서 이 몰락의 과정을 기록합니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분신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가슴 아픈 인물은 어린 소녀입니다. 가족에게서 학대받고 방치된 그녀는 고양이를 잔인하게 다루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합니다. 아무도 그녀의 아픔을 보지 않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리미아시가 나타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구원자처럼 여깁니다. 과거에 그는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동료 페트리너와 함께 어디론가 떠났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는데, 이제 부활이라도 한 듯 돌아온 것입니다.
그의 연설은 강력합니다. "함께 새로운 터전을 만들자. 이곳을 떠나 진짜 삶을 시작하자." 절망에 지친 사람들은 그의 말에 매혹됩니다. 자신들이 모아둔 돈을 모두 그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진실은 다릅니다. 이리미아시는 경찰에 협력하는 밀고자입니다.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돌아왔습니다. 구원자가 아니라 또 다른 억압자. 하지만 희망에 굶주린 사람들은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소녀가 실종됩니다. 수색 끝에 발견된 그녀는 이미 죽어 있습니다. 독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충격받지만, 곧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 죽음은 단지 불편한 사고로 기억될 뿐입니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가장 잔혹한 진실을 드러냅니다. 이 사회는 가장 약한 존재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면하고 희생시킵니다. 소녀의 죽음은 마을 전체의 도덕적 파산을 상징합니다.
이리미아시가 약속했던 새 출발은 환상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간 곳은 또 다른 황무지였습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고, 아무 계획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닫습니다. 서로를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공동체는 산산이 부서집니다.
의사의 마지막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창문을 판자로 완전히 막아버립니다. 바깥세상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복일까요, 아니면 침묵의 저항일까요?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탈출을 꿈꿨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탱고는 멈추지 않습니다. 같은 리듬, 같은 동작이 영원히 반복됩니다. 이것이 '사탄탱고'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희망을 꿈꾸지만, 그 희망은 언제나 배신당합니다.
작가의 문체는 독특합니다. 한 문장이 페이지를 가득 채울 정도로 길게 이어집니다. 쉼표로 연결된 절들이 끝없이 계속되어 독자는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이는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주인공들이 느끼는 질식감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려는 기법입니다.
서사는 지독하게 느립니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시간은 정체됩니다. 일상의 지루함과 무게가 문장 하나하나에 스며듭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어려움 속에서 실존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소설이 쓰인 시기는 중요합니다.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의 공산주의는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번영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냉정합니다. 체제가 바뀐다고 해서 인간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공산주의가 사라진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외롭고 불안합니다. 이념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또 다른 환상입니다. 거짓 메시아는 어떤 시대에나 나타나고, 절망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에게 속습니다. 이 순환은 계속됩니다.
헝가리 감독 벨라 타르는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상영 시간 7시간 18분. 흑백 화면에 극도로 긴 롱테이크가 특징입니다. 한 장면이 10분 이상 이어지기도 합니다. 영화는 소설의 무거운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걸작으로 평가합니다. 지루함을 견디는 관객에게만 허락되는 예술적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편안함을 거부합니다. 대신 깊은 사색을 요구합니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은 작가를 극찬했습니다. 현대 문학에서 묵시록적 비전을 가장 강렬하게 구현하는 작가라고 평했습니다. 카프카와 베케트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완전히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2025년 노벨문학상 선정은 상징적입니다. 이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 어려워합니다. 명확한 결말도, 위안도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스웨덴 한림원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소비되는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에,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문학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사탄탱고'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거짓 희망에 매달리는가? 왜 구원자를 갈망하는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이 작품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질문을 더 날카롭게 만들 뿐입니다. 희망이 없는 세계를 그렸지만, 작품 자체는 예술적 승리입니다. 절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 달콤한 거짓말을 거부하는 정직함. 이것이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보여준 문학의 힘입니다. 2025년 노벨문학상은 이 어둠 속의 빛을 세계가 인정한 순간입니다. 사탄의 탱고는 계속됩니다. 진흙탕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춤 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