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C 가이드라인과 이득과 비용을 고려해 판단하기
88년생으로 올해 34살이 되었다. 작년에 이어 (빌어먹을) COVID-19 창궐로 나를 위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해외여행과 밤 나들이는 고사하고, 이따금씩 실내 체육시설이 폐쇄되어 운동을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잠시 움츠러들었던 Flex력을 어딘가에 쓰고 싶을 때 즈음, HPV 예방접종이 눈에 들어왔다.
자궁경부암? HPV 백신?
사람유두종바이러스(Human Papiloma Virus, HPV)를 예방하는 백신임으로 'HPV 백신' 또는 'HPV 감염증 예방접종'이 공식 명칭이다. 흔히 '자궁경부암 주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자궁'이라는 단어 때문에 오로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접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 공식 명칭을 사용하려 한다.
HPV는 남녀에 상관없이 감염된 사람과의 성접촉을 통해 전파된다. 감염 시 대부분 증상이 없고, 12~24개월 내에 자연 소멸한다. 그러나 약 3~10%는 지속적으로 감염을 일으키고, 수십 년 후 다양한 암까지 발생시킨다.* 피부나 생식기 점막 등에서 자궁경부암, 외음부암, 항문암을 일으키는데 이 때문에 '자궁경부암 주사'로 알려지게 됐다.
접종 시기를 놓쳐버렸드아!
34세 남자는 HPV 백신을 맞아도 될까. 언론이나 SNS에서도 명쾌하게 대답해주는 곳이 없어 의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CDC(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가이드라인을 찾아봤다. CDC의 백신 자문위원회(CDC’s Advisory Committee on Immunization Practices; ACIP)는 연령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HPV 백신은 -
만 9세부터 접종할 수 있다.
만 11세-12세 남녀 모두에게 권장한다. 우리나라는 해당 나이의 여성에게만 의사와의 1:1 상담과 HPV 예방 접종을 무료로 지원하고 있다. (2021년은 2008 ~ 2009년도 출생 여성이 대상)
만 26세까지 이전에 접종을 받지 못한 경우에도 권장한다.
만 27세에서 45세 사이는 의사와 상의하여 HPV 백신 접종을 결정할 수 있다.
HPV 백신은 바이러스에 노출되기 전 투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백신이 새로운 HPV 감염만 예방하고, 기존에 HPV 감염증을 치료할 수 없어 성활동 이전에 맞는 것을 권장한다. 이미 HPV에 노출된 상태라면 백신을 맞음으로써 얻는 이득은 적어진다.
HPV 백신을 잠정적으로 보류한다.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저자 게르트 기거렌처는 의료행위에서 이득과 위험/비용을 계산해보지 않는 '계산맹' 상태를 이렇게 경고한다. "확실성에 대한 환상, 즉 치료가 오직 이득만을 지니며 결코 해롭지 않다거나 최선의 치료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라거나, 진단을 위한 검사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거나 하는 환상들은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자기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것이다." (p.34)
CDC 백신 자문위원회에 따르면, HPV는 성관계를 하는 모든 연령에서 위험이 존재하지만 장기적으로 일부일처제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HPV 감염에 걸릴 가능성이 낮다고 말한다. 새로운 성 파트너를 갖는 것이 HPV 감염에 걸릴 위험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상의 시소를 상상했다. 왼쪽에는 백신을 맞음으로써 발생할 비용과 위험을, 오른쪽에는 이득을 올려놨다. HPV 감염증에 대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예방 효과, 완전히 학계에서 정설로 확립하지 못한 두경부암 예방 효과보다 약 60만 원의 HVP 백신 비용, 병원에 3번 내원해야 하는 시간과 3번의 피하주사 투여 경험이 더 무거웠다.
그러므로 34세 남자는 HPV 백신을 안 맞기로 했다. 아니, 잠정적으로 보류한다. '만 27세에서 45세 사이에서 의사와 상의하여 HPV 백신 접종을 결정할 수 있다'라는 권고는 아마도 의사와 성 파트너에 대한 현재 상태를 진단하고, 미래 계획에 대해서 상의하라는 의미이다.
성활동이 왕성한 솔로였다면 나는 HPV 백신을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1년 이상 교제하고 있고, 미래에도 함께하려 하고 있기에 나에게는 불필요한 백신이다. HPV를 공부하면서 여자 친구와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약 60만 원 정도의 백신 비용으로 여자 친구가 행복해할 만한 다른 선물을 고민해봐야겠다.
그렇다면 누가 맞아야 하나?
2020년 11월,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현재 만 11-12세 여아만을 대상으로 한 HPV 백신 국가예방접종을 연령과 성별을 확대하여, 18세 미만의 남녀까지 포함하는 것이 골자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녀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것임을 감안할 때 HPV 백신은 여아뿐만 아니라 남아에게도 필요하다. 최근 4년간 만 11-12세 여아의 완전접종률은 60%대에 머무르고 있다. 남녀가 반반이라고 가정한다면, 해당 연령대에 예방 접종률은 30%대에 불과하다.
또한, HPV 백신 접종에는 은근한 불평등이 존재하기에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 접종의 여부는 접종받는 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아이가 가진 배경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쳐서다. 만 11-12세에 HPV 감염증을 인식하고, 백신의 필요성을 깨닫는 아이가 있을까.
아무래도 대다수가 어른들에 의해서 접종 여부가 결정될 텐데 여기서 비용과 효과 면에서 격차가 생긴다. 가정에서 잘 챙겨주는 아이는 만 11-12세에 국가예방접종을 무료로 받고, 가정에서 접종 시기를 놓친 아이는 약 60만 원의 접종비와 시간이 늦어질수록 접종 효과에 대해 걱정하게 될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최적의 접종 시기를 놓치지 않게 정부에서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하고, 혹여 접종 시기를 놓친 아이들에게도 호주와 같이 몇 년의 시간을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자료
*질병관리청 : https://nip.cdc.go.kr/irgd/introduce.do?MnLv1=3&MnLv2=6&MnLv3=1
**CDC’s Advisory Committee on Immunization Practices : https://www.cdc.gov/vaccines/vpd/hpv/hcp/recommendation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