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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영기 May 26. 2016

08_신화의 시작, 1946년 토지개혁

북한의 화폐와 수령

북한의 화폐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꼭 살펴보아야 할 사건이 있다그것은 해방 직후 이루어진 북한의 토지개혁이다. 1946년의 토지개혁은 현재까지도 북한 경제의 틀을 구성하고수령체제의 위대한 신화로 각인되고 있다북한 경제사에서 결코 생략해서는 안되는 민주개혁’ 최고의 이벤트가 토지개혁이다. 1947년의 화폐개혁도 사실은 해방 직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이 추진한 민주개혁의 일환이었다.

북한 토지개혁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사진과 구호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1946년의 토지개혁은 유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다단지 공산세력이 민심을 얻기 위해 추진한 포퓰리즘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전근대사회에서 토지란 민중의 삶자체였다토지를 둘러싼 처절한 다툼은 결코 20세기에 들어 시작된 것이 아니다토지개혁의 역사적 의미를 알기 위해 고대사까지 상고할 필요는 없으나 고려의 상황부터는 살펴야 한다.


고려시기 토지제도의 근간은 ‘전시과’(田柴科)였다. 왕은 관료에게 전지(田地; 농지)와 시지(柴地; 임야)를 지급한다. 이때 관료가 왕에게 받은 것이 소유권은 아니다. 그러나 관료는 전시지의 경작민에게 통상 1/10 정도의 조(租)를 받을 권리를 얻는다. 왕은 관료에게 수조권(收租權)을 지급하여 부양하고 관료는 왕에게 충성과 직역(職役)을 바치는 쌍무적 관계가 핵심이다. 원칙적으로 전시과는 세습할 수 없었다. 고려 초, 개국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출발한 태조의 역분전(役分田) → 시정 전시과(경종)→ 개정 전시과(목종) → 경정 전시과(문종)의 과정을 거치며 완성된다. 이렇게 정착된 것이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이다.

고려의 전주전객제(田主佃客制)


그러나 고려의 토지제도는 왕권의 약화와 귀족계급의 전횡으로 점점 문란해진다귀족들은 자영농의 토지를 수탈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진 양민을 노비로 삼았다왕은 있으나 마나 했다. 귀족들은 너도 나도 땅의 주인을 자처하면서 조를 강탈해갔다토지 겸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졌다고려 말에 이르자 토지를 둘러싼 모순은 왕조를 유지하지 못할 수준에까지 이른다.


신우 14년(1388) 7월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 등이 상소하기를 ‘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해져 간흉한 무리가 주군을 포괄하고 산천을 경계로 하여 그 모두를 조업전(祖業田)이라 칭하면서 서로 빼앗으니, 한 무(畝)의 전주(田主)가 5, 6을 넘고 1년의 전조(田租)를 8, 9차례나 거두어 간다. 위로는 어분전(御分田)으로부터 종실(宗室)ㆍ공신전(功臣田)과 조정의 문무 양반전, 그리고 외역전이라든가 진(津) ㆍ 역(驛) ㆍ 원(院) ㆍ 관전(館田)에 이르고, 무릇 다른 사람이 대대로 심어놓은 뽕나무와 집까지 모두 빼앗는다’라고 하였다. 『고려사』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토지제도의 모순이 극심해지자 공민왕은 개혁을 추진한다. 실권을 잡은 신돈(辛旽)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고 
탈점(奪占)토지의 원상회복과 노비 해방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저항과 신진사대부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만다. 신돈은 기득권층의 반발과 역습을 받고, 섹스 스캔들로 오물을 뒤집어쓴 채 실각하여 처형되었다.

도탄에 빠졌다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로 백성은 사경을 헤맸다. 고려사(高麗史)의 해당 기사를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농민이 사전의 조(租)를 바칠 적에는 남에게 빌려도 다 충당할 수가 없고 그 빌린 것은 처자를 팔아도 갚을 수가 없으며 부모가 기한에 떨어도 봉양할 수가 없다. 억울해 울부짖는 소리가 위로 하늘에 사무쳐서 화기(和氣)를 감상(感傷) 케 하여 수재ㆍ한재를 불러일으키니, 이로 말미암아 호구가 텅 비고 왜구가 깊이 쳐들어와 시체가 천리에 널려 있어도 막아낼 자가 없다.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공양왕 1년이었다. 정도전 등은 기존의 사전(私田)을 몰수하고 인구에 비례하여 균분하자고 주장했다. 이른바 ‘계민수전’(計民授田)의 방략이다. 그러나 개혁 추진세력 중에서도 토지에 이해관계가 있는 관료들에 밀려 그의 주장이 완전히 관철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성계의 전제 개혁(田制改革)은 비교적 철저했다. 그는 공사(公私)의 토지문서를 궁궐의 공터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모두 소각했다. 또한 새로운 과전법(科田法)의 시행을 공포했다. 백성들은 이성계로 인해 비로소 자신의 토지에서 경작한 곡식으로 마음껏 밥을 지어먹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쌀밥을 ‘이성계가 준 밥’ 즉, ‘이(李)밥’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성계의 토지개혁이 없었다면 백성들이 조선의 건국을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필자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왕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땅이다. 1389년 이성계의 전제 개혁(田制改革)과 1946년 김일성의 토지개혁(土地改革)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다. 그것을 500년 왕조를 유지한 민심의 지지가 전제 개혁(田制改革)에서 출발했 듯, 수령의 신성(神聖)과 존경(尊敬)의 토대가 토지개혁에서 출발했음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조선 초기 정비된 토지제도는 임진ㆍ병자 양란 이후 급속히 문란해지기 시작한다. 토지 소유의 집중이 심화되었고 병작반수(竝作半收)의 소작제가 일반화되었다. 흉년이 들면 헐값에 토지를 강탈하는 식으로 지주는 점점 더 광작(廣作)을 하게 된 반면, 농민은 땅을 잃고 소작인이 되거나 유민, 화전민이 되었다.

병작반수(竝作半收)의 지주 전호제(地主佃戶制)


이른바 실학을 표방한다는 일단의 현실적 성리학자들이 토지개혁론을 들고 나올 만큼 토지 소유의 모순은 심화되었다.

왼쪽부터 반계 유형원(균전제), 성호 이익(한전제), 다산 정약용(여전제), 다산 정약용(정전제)


조선 후기토지제도의 모순이 심해지자 농민의 토지 이탈이 가속화되었다때마침 새로운 농법이 보급되었다예를 들어, 논에 볍씨를 직접 파종하는 직파법(直播法)이 모내기 법인 이앙법(移秧法)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노동력은 대략 80% 정도 감소했고 광작(廣作)이 가능해졌다기술이나 기계의 도입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편리함을 주지만 탐욕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사회에서 그것은 재앙이 된다토지에서 강압적으로 분리된 백성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항조(抗租)와 거세(拒稅)의 흐름이 터져 나왔다. 민중의 삶이 벌레만도 못할 지경이 되도록 조정은 무력했다이렇게 허약한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에게는 쉬운 먹잇감이었다.

조선말 항조(抗租)와 거세(拒稅)의 운동


강도 일제가 실행한 조선 강탈 프로그램의 첫 사업은 바로 토지조사였다. 근대적 토지제도를 이식해 준다는 명분이었다. 어리석게도 국왕은 이들에게 훈장까지 주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청의(請議)로 인하여 부동산 조사소의 각종 비용 2만 1,455원 50전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일을 논의를 거쳐 상주(上奏) 하니, 비답하기를, “재가한다.”하였다. <고종 43년(1906 / 광무(光武) 10년) 8월 17일>

조령(詔令)을 내리기를,“내각 부동산법 조사회장(內閣不動産法調査會長) 법학 박사 우메 겐지로〔梅謙次郞〕를 특별히 훈(勳) 1등에 서훈(敍勳) 하고, 농상무 기사(農商務技師) 이학 박사 고치베 다다우케〔巨智部忠承〕를 특별히 훈 2등에 서훈하며,~<순종 즉위 년(1907 / 융희(隆熙) 1년) 12월 30일>
토지조사사업의 주역. 왼쪽부터 우메 겐지로(梅謙次郞)와 고치베 다다우케(巨智部忠承)


토지조사사업의 경과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1918년 12월 토지조사 사업이 완료되었을 때, 전국 토지의 40%는 강탈되어 일본인이나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가 되어있었다. 또한 조선의 농민 77.2%가 소작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 피땀으로 생산한 곡식은 체계적으로 일본으로 빼돌려졌다. 식민지 백성은 싸구려 잡곡이나 과잉생산된 수입 밀로 끼니를 연명해야 했다.


조선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1930년도 조선인 1일당 연간 쌀 소비량은 0.45섬이었다. 한 섬(석)은 알곡으로 144Kg이다. 하루 단위로 환산하면 177g이 된다. 이는 1995년 '고난의 행군'시기, 배급이 끊기기 직전, 북한의 1인당 배급량 350g 내외와 비교해 봐도 그 비참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극악한 고역의 박해를 받으면서 그 위에 무상의 모욕을 받는 참상은 조선의 농촌보다 더한 곳이 없을 것이 올 시다. 혁명 전의 러시아의 농촌을 지상 제일의 지옥이라 하였습니다만은 금일에는 조선 농촌의 지옥이 그 제일위를 대체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1921년(大正 十年) 3월 21일 동아일보 유진희의 글>
1921년(大正 十年) 3월 21일 동아일보 유진희의 글


일제는 발악적으로 수탈하였다. 식민지 조선은 만신창이로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에서도 삶의 고통은 여전했다.

해방전후 북한 농촌의 현실


그중 큰애 하나는 해방 전해에 죽었다. 영양부족이었다. 남이 아버지는 안주 수리조합 공사에 보국대로 뽑혀 나가고 없었다. 남이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날도 옥수수를 쪄가지고 순안 장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저녁때 남이 어머니가 돌아와 보니, 큰애의 움푹 꺼진 눈과 반쯤 벌려진 입안에 파리 떼가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이미 죽은 지가 오랜 것이었다. 아래 아이들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자기네의 언니가 오늘은 하루 종일 잠만 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황순원, 『카인의 후예』중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은 단순한 경제적 사건이 아니다. 토지 개혁은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식민지의 유산을 정리하고 새로운 경제토대를 수립하기 위한 첫 번째 과업이 토지개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북한 토지개혁의 경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토지개혁 방안


북한의 토지개혁은 기본적으로 무상몰수와 무상분배의 원칙을 관철했다. 농토는 농가별 노동력과 가족수에 비례하여 나누어 주었다. 그 결과 가구당 평균 1.35정보(약 4천 평)씩 분배되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러시아, 동구, 중국은 인구수 기준으로 토지 분배했다. 그에 반하여 북한은 연령별, 성별로 나눈 노동력에 점수를 부여하고 이 점수를 합산하여 토지를 분배했다. 철저한 노동력 기준의 분배였다.


표에 보이는 것과 같이 북한 토지개혁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5정보(1만 5000평)이상 토지 소유자와 소작농을 부리는 지주였다.
토지개혁 이후 북한 농민의 계층 구성 변화


토지개혁을 지지하는 농민들


1946년 단행된 토지개혁은 김일성의 권력을 확고부동하게 하였다. 조선로동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의 당원 수만 보아도 이러한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1945년 12월에  4,530 명에 불과했던 당원은 1946년 4월에 2만 6천 명이 되고 1946년 8월에는 36만 6천 명에 달하게 된다.

1946년의 토지개혁은 북한의 정치와 경제체제의 가장 극적인 기억이다. 북한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해방 직후 벌어졌던 이 사건을 상기해야 한다. 어쩌면 현재 부침하는 북한 경제의 심층에, 토지개혁을 추동했던 거대한 의지가 원형질로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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