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화폐와 수령
일본은 강점기간 내내 조선의 명목생산액을 상회하는 통화량을 유통과정에 투입함으로써 노동 생산물과 자원을 수탈해갔다.
【그림 1】 조선과 일본 노동자의 1일 노동시간(조선 : 1931년, 일본 : 1930년)
【그림 1】에서 보듯 1일 12시간 이상 노동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일본은 0.3%인데 반해, 조선은 46.9%에 달했다. 일본은 조선 노동자를 극도로 혹사해가며 생산물을 쥐어짜 냈다. 게다가 가혹한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것은 준비금도 없이 남발된 악화(惡貨)였다.
통화증발에 의한 물자수탈은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극심하게 전개되었다.
【표 1】 조선은행권의 유통고ㆍ발행고 비교
【표 1】에서 보듯 1931년 기준으로 각각 1억 100만 엔과 7,900만 엔의 발행고와 유통고를 기록했던 조선은행권은 1945년 각각 43억 3,800만 엔, 38억 6,200만 엔을 기록하였다.
세계적 공황이 일본을 덮치자 그들은 제국주의적 침략과 통화조작을 통한 인플레이션으로 돌파구를 삼았다. 위기 타개 방안으로 조선, 만주,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결제권이 추구되었고 이에 따라 1931년 만주침략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1937년 노구교에서의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로 시작된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식민지와 점령지의 확대는 자연히 일본의 일본은행권과 연결된 다른 통화를 등장시켰다.
예컨대 1932년 3월 만주에 허수아비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만주중앙은행을 창립하여 조선은행권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 ‘만주국폐’를 발행하였다.
북경에는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중국연합준비은행을 창립(1938년 2월)하고 신화폐 ‘연은권’(聯銀券)을 발행하였다.
아울러 화중, 화남지역에는 중앙저비은행(中央儲備銀行)을 설립하여 ‘저비권’(儲備券)을 발행하였다.
"이같이 친일 괴뢰정권의 수립과 함께 진행된 금융정책은 ‘저비권-연은권-만주국폐-조선은행권-대만은행권’을 완충지대로 하여 일본은행권으로 묶인 통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통로는 통화의 남발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전쟁수행에 필요한 전비조달을 위해 통화 남발과 군표(軍票) 발행이 무제한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조선반도 내에서의 인플레에 그치지 않았다. 대륙의 악성 인플레이션의 파도가 중국의 양쯔 강과 황하를 건너,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려들어왔다. 조선 내에서는 전시체제가 유지되었고 전쟁수행을 위한 식민지 병참기지로서 격렬한 민중수탈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은행권은 일본 은행권 이외의 통화에 대한 팽창과 남발에 의해서 보호되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의 유입과 확장은 조선의 민중을 고난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조선 민중은 이와 같은 인플레와 함께 식량수탈과 강제징용, 강제노동, 각종 세금과 공과금의 중압, 강제저축에 의해 고향을 떠나고 각처로 떠도는 유랑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민족민주운동연구소 편, 『물가, 임금: 노동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서울: 백의, 1991), pp. 18~19.
엔블럭에서 식민지와 조선은행권은 전시 인플레이션의 여파가 일본에 전달되는 것을 가로막는 방파제가 되었다.
일본은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자국만을 보호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통화를 범람시켰다. 화폐 유통량의 폭발적 증가는 전쟁물자 수탈을 위한 신용팽창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조선 외 일본 식민지로부터 유입된 통화량이 급속도로 증가된 결과이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과 조선은행권은 전시 인플레이션의 여파가 일본에 전달되는 것을 가로막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일본은 식민지 및 점령지역에서 급속한 통화 남발과 극심한 인플레이션 조작에 의하여 전비를 조달했다. 그들은 엄청난 폐해와 뒷수습을 조선 민중에게 전가했다.
【그림 2】 일제하 화폐(조선은행권) 유통량의 변화
조선의 민중은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엄청난 통화증발을 자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격통제를 통해 물가상승을 폭력적으로 억눌렀다. 그 결과 조선 민중의 피땀 어린 노동 생산물과 악화가 강제로 교환되었다. 식민지 화폐 체제는 매우 영리하고 조직적인 수탈시스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