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은 하루

_고요한 하루

by 민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은 하루

_고요한 하루



오늘은 아침부터 유난히 고요하다. 긴 추석 연휴 탓인지, 마을 전체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다.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고, 그 소리가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나는 이 조용한 시간을 깨뜨리지 않으려 조심스레 움직인다. 아침부터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혼자 걷는 길이다.


집에 있으면 독서하다가 글을 쓰고, 틈틈이 빨래를 개고, 밥을 하다가 하루가 흘러간다. 그런 일상이 나쁘진 않지만, 가끔은 벽과 창 사이의 공기마저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가끔 ‘무작정의 시간’을 만든다.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나오는 길. 오히려 그 무의미함 속에서 마음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카페 안으로 들어오니, 따뜻한 커피 향이 공간을 채운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와 젖은 흙냄새,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음악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오늘의 생각을 적어 내려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은 하루.’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처럼 특별한 일 하나 없는 날이 오히려 내게는 가장 평화로운 하루일지도 모르겠다.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이 책은 철학자들의 삶을 열네 장의 여정으로 그려낸다. 저자는 마치 기차를 타고 각 철학자들의 도시를 여행하듯, 인생의 지혜를 실감 나게 풀어낸다. 처음에는 한 장을 넘기기도 어려웠다. 철학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에게 어렵고 멀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페이지를 넘길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철학자들의 사유가 내 일상에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함께 읽는 독서모임에서는 철학이 늘 화제다.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에 익숙했던 우리는, 처음엔 다소 버거워했다. 하지만 문장을 곱씹을수록, 철학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질문하고, 멈추고, 다시 생각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철학이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려 애쓰는 존재다.”

_앙리 베르그송


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인 셈이다. 어려운 문장을 붙잡고, 이해되지 않는 구절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삶도, 공부도, 결국엔 ‘천천히 익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아무 일 없음 속에서 나를 만났다. 책 속 문장이 내 마음을 두드리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나를 위로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그 하루 속에서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깨닫는다.


삶은 결국 ‘무언가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는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달려 있음을.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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