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또 한명의 뫼르소다.
'시지프스 신화' 에서 시지프스는 언제나 돌을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린다. 정상에 돌이 놓이게 되면, 돌은 다시 산 아래로 떨어져 버리곤 한다. '시지프스 신화'에 나온 시지프스의 형벌은 도대체 어떤 것이 그에게 절망으로 다가올까? 누구나 알겠지만, 돌을 산으로 밀어올리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들긴 하지만, 궁극적인 고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시지프스의 비극은 돌이 떨어지고, 그 돌을 다시 올리러 내려갈 때,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는 고통이다. 이를 현실 세계의 이야기로 하자면, 전쟁 중이나, 포로 수용소에서 자살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리어, 그들은 살려고 존재의 몸부림을 치곤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나고 시간이 흘러,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자살을 하곤 한다. 이런 점이 시지프스와 전쟁 후에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즉, 사람은 사고를 하는 순간 불행에 처해진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을 해고,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그들을 사로잡아 버리기 때문이다.
즉, 시지프스는 언제나 사고를 하면서 고통을 느낀다. 바로, 이것이 시지프스의 형벌이다.
알베르트 까뮈는 '이방인'에서 시지프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프랑스에서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때문에 양로원으로 가게 되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인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뫼르소는 연인과 해변에서 수영을 한다. 그리고, 그는 친구 하나를 사기게 되고, 그 친구의 별장으로 놀러간다. 그러다, 새로 사귄 친구와 시비가 붙은 유대인을 총으로 쏴 죽여버린다. 뫼르소는 법정에 세워지고, 사형을 명받는다. 그러나, 그가 사형을 받게 된 것은 어머니의 장례식 후 여자친구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일광욕을 한 것이 문제로 꼽히게 된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뫼르소는 목사의 회계를 거부하고 뫼르소를 향해 비난을 하는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끝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사회라는 곳은 죽음을 기다리는 곳
까뮈의 소설을 보면, 감탄하는 것이 있다. 배경을 참 멋지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방인'에서 처음 장면은 양로원으로 시작이 되고, 끝은 형무소로 마무리가 된다. 사회적으로 다른 기능을 하는 이 두 장소가 똑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두 장소의 공통점을 하나 꼽자면,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것이다. 양로원은 노인들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죽을 날을 하루하루 보내는 곳이며, 형무소도, 특히,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다. 이 두 곳은 시간을 허비하는 장소이며, 하루하루가 똑같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까뮈의 관점에서 이 사회 또한 양로원과 형무소와 같은 곳이다. 사회는 감옥과 같은 곳으로,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지루함을 느끼고 산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부조리로 까뮈의 관점에서 이 사회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의 규범이나 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방인'에 나온 뫼르소의 판결을 보면, 이방인 총으로 사살한 것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애인과 해수욕을 했다는 것이나, 영화를 본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법이라는 것 또한, 상황에 따라 맞춰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까뮈가 바라본 사회이다.
뫼르소는 공감능력이 없는 싸이코패스인가?
소설에서 뫼르소가 보여준 모습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어머니 장례식 이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숙을 해야하지만, 다음날 곧 바로 해변에서 애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이, 다른 행동을 보여준다. 이떻게 보면, 뫼르소는 타인을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렇지 않다. 소설 첫번째 장면을 보면, '어머니를 죽인 것은 자신이 아니다.'라며 이상한 말을 되풀이 한다. 즉, 뫼르소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여진다. 즉, 그는 사회적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타인에 대해 무관심할 뿐이다. 하지만, 뫼르소만이 무관심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셀레스 레스토랑에서 어떤 여자가 뫼르소에게 무관심했던 것처럼 뫼르소의 무관심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즉, 우리 모두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다만, 뫼르소에게 그 정도가 강했을 뿐,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은 없다. 오히려 뫼르소는 솔직해서 죽음을 맞이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솔직함이란 멍청한 미덕처럼 보여진다. 상사에게 우리는 선뜻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솔직하면, 그에 걸맞은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뫼르소는 순수한 사람이며, 이 사회에 맞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죽음 앞에 홀로선 남자
사회에 저항을 할 때, 두가지 형태의 저항이 존재한다. 첫번째 저항은 개인적인 저항이고 두번째 저항은 사회적인 저항이다. 개인적인 저항은 사회에 대한 소심함이나 무관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와 다르게, 사회적인 저항은 말 그대로, 사람들이 모여 사회에 대한 투쟁을 하는 것이다. '이방인'에 나온 뫼르소는 죽음 앞에 홀로 서게 된다. 죽음 앞에 홀로선 뫼르소의 앞에는 가족도, 종교도, 사회도, 그 누구도 아닌, 뫼르소 하나의 실존적 존재로 서있는 것이다. 즉, 그동안 사회에서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었던 뫼르소가 죽음 앞에 서있으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 시간은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다. 비록, 뫼르소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적어도 그의 저항은 성공한 것이다. 사회적 저항이든, 개인적 저항이던, 저항을 하게되면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 만약, 저항만하고 대가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한 것이다. 뫼르소는 사회에 대한 저항을 하고 죽음으로 그의 저항을 마무리 지었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