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선미 Mar 15. 2024

엄마 같던 언니의 입원

언니야 아프지 마~~

예부터 맏딸은 살림밑천이라고 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엄마"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내게  있어 언니는 엄마대신이었고 엄마 같은 존재였다. 고등학교 자취 때부터 언니, 오빠랑 살면서 언니는 내게 도시락도 싸 주고 끼니와 빨래를 해결해 주었다. 집안의 맏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 엄마 역할까지 해내며 직장생활을 다.


언니는 나랑 7살 터울로 언제나 큰 존재였다. 감히 말도 못 언니와 함께 놀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전혀 없다. 그저 내가 태어났을 때 손수 내 똥기저귀를 빨아주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다.


언니는 맏딸이라는 이유로 살아오면서 특혜를 많이 받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은 더 무거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막내였던 나는 특혜는 없었지만 부모님의 기대도 없었다. 모든 기대는 첫째인 언니와 둘째인 큰 오빠였고, 작은 오빠와 나는 덤이었다.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한 언니는 30년을 맞이한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축복을 받은 적이 없었다. 30년이란 세월 동안 순정으로 딸 을 지켜준 사위를 온전하게 사랑으로 받아주지 못하셨다. 자신의 딸을 평생 고생시키고 있다억지스럽고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명 인간 취급하셨다.


언니네는 친정집에 사건, 사고가 생겼다 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와 있었고, 반복되다 보니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빠는 자존심 빼면 시체일 정도로 남의 시선과 가오를 중하게 여겼다. 팔순의 나이에도 자그마치 자존심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그냥 언니네 가족에게 생색 좀 내면 좀 더 대접받을 일이 많은데 그저 아들, 아들, 아들 타령 밖에 안 하신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호랑이처럼 위엄하고 무시무시했지만, 이제는 나약하고 힘이 빠진 고양이처럼 된 자신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셨다.


지난 주였던 3월 1일에 영덕으로 풀빌라를 미리 예약하고 언니네 식구와 다녀왔다. 코로나 전에 언니네 가족과 코타키나 발루를 시작으로 어느덧 여행 떠나는 멤버가 되었다. 서로 휴가를 맞추었고, 긴 연휴를 틈타서 다니기 시작했다. 전국 어디든지 가고 싶었던 곳을  우선하여 여수로, 서천으로, 영덕으로, 고성으로 여행을 무탈하게 다녀왔다. 문제는 이번 영덕여행이었다.



언니는 맏딸이라 그런지 내가 두 아이를 어렵게 낳아 산후조리할 때에도 한 번도 안 온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존재였다. 그동안 큰 병 없이 살았고 단 한 번도 수술해 본 적이 없는 건강한 언니였다.


게다가 결혼 후 직장생활을 꾸준히 해왔다. 오롯이  전업주부를 한 적이 없었다. 세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로 쉰 것이 다였다.  언니네는 언니가 편하게 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언니는 커리어를 쌓아 올렸고 부지런하게 살았다. 그러던 언니가 우리 가족  생일에 맞춰서 간 여행지에서 바다를 보고 얼마나 동심의 세계로 빠졌는지 넘어졌는데 그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지

우리 일행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아. 약간 멍들었을 뿐이야"라고 말했다. 근처 약국에서 파스를 사서 붙이고 약을 사서 먹었기 때문에 괜찮을 줄로 알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영덕은 대게 축제기간이어서 어디를 가도 대기번호를 받고 기다려야 했다. 예약한 풀빌라로 돌아와서는 삼겹살 바비큐도 즐겼고, 강구항에 대게도 사고, 모둠 회도 사 와서 숙소에서 한 상을 차려서 즐겼기에 언니가 넘어진 사실을 모든 가족 모두가 까맣게 잊고 여행을 즐겼다. 언니만 빼고는 말이다. (아팠을 텐데 놀러 온 분위기를 망칠까 숨겼던 것은 아닌지 더 속상했다)




웃지 못했던 일은 해넘이 전까지 고스톱을 치자며 여행가방에서 화투를 꺼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대가족이 모이는 명절에는 필히 고스톱 치자고 조르는 언니의 별난 취미가 여행길에도 포함돼 있었다. 초등학생 6학년이 내 딸은 그런 엄마와 이모가 못마땅했는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도박하는 우리 엄마를 신고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얼른 고스톱판을 접어야 했다. 그렇게 파도 소리와 함께 영덕 강구항의 밤은 무르익어가고 언니네는 다음날 새벽에 미사가 있어서 일찍 출발했다.  풀빌라에 남겨진 우리 가족은 장사리 해수욕장에  있는 장사리 상륙작전을 둘러보며 비통하고 애통한 마음을 삭이며 집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언니네와의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봄방학을 끝내고 새 학기를 시작했다. 바쁘고도 평화롭게 일주일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아이들은 새 학기로 반장선거를 치르고, 진단평가를 치렀다. 나의 루틴인 새온독과 읽고 쓰기를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언니의 소식이 들렸다. 그때 여행 가서 넘어진 손목이 골절돼서 수술해야 한다고.




"아뿔싸~~!!"

'어떻게 그동안 아팠을 텐데 이지경이 될 때까지 참았던 걸까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남이 보면  참을성있다고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통증도 못 느끼는 미련 곰탱이가 떠올라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를 지켜보던 남편은 민 씨 집안 여자들은 참을성으로는  기네스북에 올라도 되겠다며 옛날옛적의 내 아픈 과거일부러 들춰 꺼냈다. 

몇 년 전에 오른쪽 발의 네 번째 발가락 골절된 이야기, 유치원 공개수업에 엉덩방아를 찧어서 꼬리뼈 골절된 이야기 ㅎㅎㅎ 참 남편은 이런 나의 흑역사를 너스레를 떨며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스토리를 풀어내고 있었다. 언니를 생각하며 얼마나 아팠을고~~라고 생각하니 우리 자매가 통증에 무딘 것은 확실했다.



언니는 왼손의 손목뼈가 골절돼 수술해야 하고 입원까지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골절은 거의 깁스만 하면 되는 걸로 알았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니 큰 병이라 생각돼서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수술당일날에는 찾아가지 못하고 다음날에 병원을 찾았는데 뉴스에서 의사들 반란으로 심란한 만큼 병원은 한가하고 조용했다. 그 많던 환자는 어디에 갔는지 여기저기 둘러봐도 썰렁했다.




순간 환자복을 입은 언니를 보는데 어찌나 낯설었는지 눈물이 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동안 언니는 엄마, 아빠의 병간호를 수십 년간 했지만, 본인이 환자가 되기는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병원 측에서는 간단한 시술이라고 걱정 말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함께 여행도중에 넘어진 부위가 수술까지 이어지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무탈하게 다녀오지 못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왜 우리는 바다를 보면 높은데 올라가고 싶고, 바다풍경을 한눈에 보고 싶어 하는 걸까 그것이 문제다. 언니도 다수가 보고 있는 전망 좋은  곳올라가려다 그만 '철퍼덕'  넘어졌기 때문이다. 언니는 이제는 호기심으 절대 높은 곳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언니야~~ 아프지 마라~~








작가의 이전글 슬기로운 결혼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