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s

by 민수연

슬픔의 한도


친애하는 레지던시의 동료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주와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행사를 한 게 불과 사흘 전이었는데, 느닷없는 부고 소식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어제 있던 사람이 오늘 없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날은 유독 개인적인 일정이 많았다.

소식을 들은 시간은 운동을 나가기 전인 이른 아침이었다. 다른 동료에게 받은 부고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로 걸어본 전화 너머로 들린 소식에 참담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나는 이 슬픔을 어디까지 표현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개인 레슨 시작까지 20분 남은 시점이었다. 그것도 고작 한 번 만난 선생님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지금 슬프므로 운동을 못합니다.'라고 말하자니 다소 감정적인 대응처럼 보였다. 그와 나의 관계는 단순한 동료였기에, 일정을 취소할 만큼의 적절한 문구를 찾지 못했다.


나는 과연 동료의 소식에 얼마나 슬퍼할 수 있는가.

또 나의 감정을 누구에게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는가.

고인에 대해 슬퍼할 자격과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러자 문득,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이 감정을 어디까지 꺼내도 괜찮을지에 대한 망설임이었다.


어떤 이의 죽음을 두고, 나는 과연 얼마나 슬퍼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슬픔을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을까.

지나치게 슬퍼하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하고, 너무 담담하면 무심해 보이기도 한다. 경계는 모호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종종 날카롭다. 관계가 가까우면 슬퍼할 자격이 생기고,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있어야 할 것 같은 공기가 있다. 그 경계는 누구도 정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의식하며 감정을 조절한다. 나 역시 그 앞에서 주춤했다. 관계의 크기를 계산하고, 행동을 조절하며, '이 정도면 무리 없겠지' 하고 감정을 조율한다. 동료의 죽음 앞에서 마음보다 형식을 앞세웠다. 나는 그에 대한 애도와 복합적인 감정을 잠시 아래로 내려보내고, 운동도 다녀오고, 병원도 들르고, 갤러리 미팅도 하는 등 원래 일정을 소화했다.


슬픔의 한도는 정해져 있을까?

부모상일 경우 얼마큼.

자식상, 배우자 상일 경우 얼마큼.

친구 상일 경우는 또 얼마나.


어떤 슬픔은 너무 눌러 담아 탈이 나고, 어떤 슬픔은 바로 꺼내어 보이지 못한다.

누군가는 장례식 다음 날에도 출근을 하지만, 한동안 세상과 거리를 두는 이도 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는다. 그녀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수위가 주는 커피를 마시며, 장례를 마친 후엔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낸다. 이 행동은 나중에 뫼르소에게 큰 화로 돌아오고 사형수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무심한 태도를 보였으므로, 세상은 그것을 ‘없음’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뫼르소는 사형집행 전에야 어머니를 이해한다.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말을 얹을 수 있는 감정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의 크기가 덜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애도의 방식이 다를 뿐인데 우리는 종종 그 감정을 척도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슬픔의 표현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걸까?

이런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조금은 서툴게 슬픔을 헤아린다.


우리는 각자의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만나 장례식장에 갔다. 다사다난했던 레지던시에서 다 함께 장례식장에 가는 일은 보기에도 없던 장면이라 서글펐다. 우리의 시간은 흘러가고, 레지던시는 며칠 고요하고 쓸쓸했다.

때때로 슬프고 오래도록 먹먹했다.


슬픔은 늘 거기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크기는 온전히 나만 안다.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