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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밍블 Nov 05. 2021

판타지 같은 이야기의 힘

직장생활을 끌고 가는 나의 새로운 캐릭터

가장 책이 보고 싶은 시기는 단연 시험기간이었다.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책들이 시험기간만 되면 눈에 밟혔는데 당장 해야 하는 일은 하기 싫고 굳이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고 싶은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었다. 직장에서 책을 찾던 마음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 지금 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일을 불구경하듯 멀리서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 방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른 말로 현. 실. 도. 피.


출근길이라는 자각을 하고 싶지 않아 책을 펼쳤다. 여기는 출근길 지하철이 아니야, 책 속으로 빠져들고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면 여기는 직장이 아니라는 최면을 걸며 다시 책 속으로. 그래서 그때 무슨 책을 읽었냐고? 으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직장이 아닌 다른 곳에 있고 싶었던 마음만 기억이 난다. 그래도 꽤 많은 책을 읽고 리뷰를 썼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기록이 있으니 책 목록을 찾으면 기억해 낼 수는 있다. 어떤 기준으로 책을 읽은 건지 주제의 맥락 없음에 기운이 빠지긴 하지만 말이다. 어떤 책이든 이야기가 주는 힘만으로 몰입해서 읽었다. 내 삶에서 찾지 못한 답을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발견하려 했고 내일을 이어가게 하는 희망샅샅 찾아보곤 했다.    


"이야기의 힘만이 내 모든 고통을 잊게 해 주었거든. 또한 이야기의 힘만이 내가 살아가야 할 날들이 결코 끝없는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고 증언해주었거든. 이 모든 이야기의 힘이 없었다면 나는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아주 재미없고 지루한 어른이 되었겠지. 이야기의 힘이 나를 그 지옥 같은 입시전쟁에서 버티게 해 준 가장 큰 위로였어" [블루밍, 정여울]     


내가 읽은 모든 책에는 그들만의 힘이 있었다. 나약한 사람의 말은 나와 비슷해서 위로가 됐고 강인한 사람의 말은 본받고 싶은 마음으로 담아 두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억지스럽고 강압적이었다면 나는 책 읽는 행위를 절대로 계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퇴근만으로도 고단한 삶에서 책을 보는 일은 다른 방향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조금 살 만해진 시점부터는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택하기도 했고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 작가의 책을 섭렵하기도 했다. 다른 삶을 살았지만 비슷한 모양이었고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이야기가 가득했다.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것이 희망이 되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이 났고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만약 그 시절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그저 악바리 근성으로 꼿꼿이 버텼다면 나는 꼰대라떼가 되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조금 넋 놓고 책을 본 덕분에 내게 틈이 생겼고 여유가 생겼다. 독서를 통해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해소시켰고 책에 나오는 다른 사람의 삶에 눈을 돌림으로써 부정적 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내가 살아온 방식밖에 몰랐는데 다른 이야기를 보니 내 삶 역시 다른 방식으로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 속의 다양한 인물을 나와 비교하며 구체적으로 캐릭터를 혼합시켰다. 실재하는 나와 바라는 나,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 인물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무심한 듯 차분한 직장인 나는 그렇게 자라났다. 소설 속에서 만난 인물들과 현실의 내가 결합하여 지금의 상황과 시스템에 구현 가능한 사람으로 말이다. 본래의 나는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고 어려웠지만, 남들이 보는 직장인 나는 직장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세상 쿨 한 사람이다. 그 간극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직장을 다니는 나라는 캐릭터에 책 보는 내가 계속 주문을 걸며 레벨업 시키는 것이다. '별 일 아니야,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도 다 그렇게 해결하잖아, 결국 퇴근하면 난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걸. 저 사람이 하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이런 주문들. 우습지만 내가 읽은 이야기의 모든 서사 중 나와 가장 닮은 것들을 적용하여 만든 캐릭터가 지금 내 직장생활을 이끌고 있다. 모든 것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괜찮다 여기니 괜찮았고 직장생활에 모든 것을 갈아 넣을 때보다 성과도 좋았다. 아등바등할 땐 잘 되지 않던 것이 힘을 빼면 어떤 원리로 수월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문제를 만나도 이내 해결되곤 했다. 그런 내가 신기해서 글을 쓰고 있다. 직장생활에 대해서, 마음가짐에 대해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의 힘이 이렇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계속 낳고 있는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까지는 아녀도 뭐가 될지 모르는 알을 자꾸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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