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일기
수영장 물속으로 살며시 몸을 미끄러뜨리는 순간, 주변의 소음이 확 줄어든다. 웅웅거리며 퍼져나가던 소리는 멀어지고, 체온보다 조금 낮은 미지근한 물의 온도가 뒤숭숭한 마음을 적당히 중화시킨다. 수경을 쓰면 시야가 바뀐다. 넓게 보이던 익숙한 수영장이 아니라 내 눈앞에만 펼쳐지는 투명한 방이 된다. 바닥 타일의 줄무늬가 길게 늘어져 있고, 그 위로 파란 물결이 얇은 커튼처럼 흔들린다. 물은 투명한데 내가 움직이는 만큼 파랑의 농도가 바뀌는 것 같다. 빛이 부서지고, 물이 빛을 품고, 다시 몸을 지나간다. 그 장면은 가끔 호크니의 수영장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벽을 박차는 순간이 가장 좋다. 두 발로 벽을 밀어낼 때, 몸이 일제히 길어진다. 팔은 머리 위로 모이고, 어깨는 반쯤 회전하며 배가 단단해진다. 그다음은 글라이딩. 물속에서 미끄러지는 동안에는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줄어든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물이 나를 밀어주는 것 같다. 소리는 사라지고, 작은 물결들이 지나가는 촉감만 남는다. 그 촉감이 귓가를 스치고, 뺨을 스치고, 팔꿈치 아래를 간질인다. 마치 젤리처럼, 단단하지 않은 것들이 나를 지탱해주리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며 천천히 나아간다.
고개를 돌려 호흡하는 찰나. 물 밖으로 나오는 그 얇은 틈에서, 나는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을 힐끗 확인한다. 숨은 들이마시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받아오는 것에 가깝다. 많이 들이마셔야 살 것 같은 마음에 서둘다간 숨이 아니라 물이 들어오고, 그 순간 리듬이 무너진다. 그래서 숨은 정확해야 한다. 짧게, 맑게, 과하지 않게. 다시 얼굴이 물속으로 들어가며 소리가 꺼지고, 그 꺼짐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참 이상하지. 숨을 참는 시간이 더 편안하다니.
수영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됐다. 어릴 때 아주 잠깐 수영을 배웠지만, 그땐 수영의 재미를 몰랐다. 오직 수영을 배우기 위해 수영장에 갈 뿐이었으니 배워서 뭘 할 수 있다는 것도, 물속에서 자유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저 수영을 배우러 가야 한다는 것이 귀찮을 뿐이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가게 됐다. 수영은 못했지만 스노쿨링을 좋아해서 구명조끼를 입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물고기를 따라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구명조끼 없이 가벼운 맨몸으로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헤엄치는 가족을 만났다. 흡사 돌고래 가족처럼 보였다. 저렇게 가볍게, 원하는 대로, 바다가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는 거였다니. 충격이었다. 스노쿨링이 좋아서 괌, 사이판, 오키나와를 여행할 때마다 물고기를 따라다녔어도 나는 늘 구명조끼를 입었다. 얕은 바다인데도 무서웠고, 숨이 막힐 것 같았고, 조금만 방심하면 빠져 죽을 것 같았다, 물이 계속 나를 넘어뜨릴 것 같았다. 물은 늘 그렇게 나를 압도하는 존재였다. 물이 좋으면서도 무서웠기에 수영을 배우려는 생각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했다. 내 삶에는 이미 할 줄 아는 것들이 충분히 쌓여 있었고, 지금부터 배워봤자 얼마나 써먹겠나 싶었다. 수영은 특히 허들이 많았다. 머리를 감고 말리고 이동하는 번거로움, 겨울에 옷을 입고 벗을 때 닿는 차가운 공기, 볼록 튀어나온 배와 여기저기 동그랗게 올라붙은 살들을 보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물에 대한 공포까지 생각이 닿으면, 결론은 같았다. “그냥 구명조끼 입고 살자.”
바뀐 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부터였다. 호캉스를 가고 해외여행을 가도 아이들은 수영장을 찾았다. 아니 수영장에 가기 위해 호캉스를 가고 여행을 갔다. 수영을 할 줄 모르니 노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물에 누워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 그 시간이 꿈같았다. 좀 더 길게 호흡하며 물속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아이들이 먼저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귀여운 새끼 고래처럼 물속으로 미끄러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뿌듯한 동시에 부러웠다. ‘너희들은 좋겠다. 어렸을 때부터 즐겁게 수영을 배워서…’ 부러워하는 마음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아 결국 나도 같은 곳에 강습을 등록했다. 경제적인 부담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배우고 시작하고, 어떤 기술을 가진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수영은 힘 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도 힘 빼기의 기술이라는 표현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힘을 빼니 물에는 금방 떴다. 그런데 힘을 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녔다. 중심이 흐물거리면 팔과 목이 대신 긴장하기 때문에 코어에 힘이 있어야 했다. 배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길게 정렬될 때, 그제야 팔이 부드러워지고 다리가 물을 ‘차는’ 대신 물을 ‘밀어주는’ 느낌이 된다. 그러니까 수영은 근육을 키우는 운동이라기보다, 몸을 이해하는 연습 같았다.
손을 휘두르는 방법, 글라이딩의 시원한 미끄러짐, 물살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나아가기, 발차기의 리듬 같은 걸 동시에 생각하면서도 편안하게 떠 있는 게 핵심이었다. 내쉬고, 기다리고, 들이마시고. 수영을 배운다는 건 기술을 쌓는 일이면서, 동시에 호흡을 길들이는 일이었다.
나는 튜브나 구명조끼 없이도 물결을 이불 삼아 포근하게 안겨있고 싶었고, 자유롭게 물 위를 유영하고 싶었다. 바로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 늦은 나이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수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수영을 하며 알게 된 건, ‘자유’는 팔다리를 움직이는 기술로 얻는 게 아니라 호흡이 잘 이루어지면 저절로 누리게 되는 것이었다. 물과 싸우지 않고 물을 이해하는 것. 타이밍을 맞추고, 내쉬는 길이를 조절하고, 중심을 세우는 것. 그러고 나면 비로소 자유롭게 떠 있다는 감각이 온다. (그러니까 이런 게 기술이라면 기술이겠지.)
아직 물과 완전히 하나가 되진 못했다. 조금만 흐트러지면 물을 먹고 25미터 왕복에도 풀 마라톤을 뛴 것처럼 헥헥거린다. 나는 아직 자유롭게 헤엄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반복 속에서 아주 잠깐씩 자유를 경험한다. 정복한 기술이 아니라, 이해된 호흡이 만들어내는 자유. 물이 더이상 나를 압도하는 적이 아니라, 나를 부드럽게 받쳐주는 세계가 되는 순간 말이다. 정복이 아니라 호흡, 속도가 아니라 이해. 어쩌면 그게 자유의 형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