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엄마의 투병일기
"푸하하하하!"
늦은 오후에야 처음으로 웃었다.
아이를 하원시켜 학원으로 라이드 시키던 중이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너네엄마 무슨일 하셔?"라고 물어보셨다고 아이가 말을 꺼낸게 발단이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서술하자면, 지난주에 부산에서 국제포럼이 있었던 엄마를 따라 아이랑 남편이 따라 온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부산에서 젊은나이에 암을 경험한 이들의 사회복귀와 일상회복을 위해 논의하는 학술대회 성격의 국제포럼이 있었다. 딱 1년여 전, 부산시의회 회의실에서 있었던 "젊은 유방암 경험자를 위한 일자리 정책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하고 다음 행사를 이야기 했었는데, 그때 내년에는 국제포럼으로 함께 하자 약속한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20대에 유방암을 경험한 미혼의 환우였다. 같이 사무국에서 일 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접한 소식은 간전이 였다. 간 전이 초기이고 다행스럽게도 약이 있다 하여, 잘 치료 받고 사무국에서 만나자는게 언제나 내가 남긴 인사의 마지막이었다.
첫 국제포럼을 마친 후, 너무 많은 소회와 추억들이 머리속을 휘감았다.
나는 분명 영유아 아동을 키우며 항암투병을 이어가는 젊은 환우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성별이 아닌 세대의 문제임을 강조했는데, 남편과의 "관계"는 괜찮으냐며 엄마가 아파서 아이가 저 어린 나이에도 얌전한 것 같다는 말을 들어야했던 그때에 비하면 정말 엄청난 발전 속에 있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불과 1년 사이에 이정도의 변화와 논의의 수준이 올라왔다는 사실에 감격을, 그리고 지난날의 약속이 실현됨에 놀라움을 느꼈다. 당연히 그럴만한 행사였지만 유난히도 그 잔상이 오래간다 했다.
이른 아침, 그 분의 부고를 접했다.
치료 마치고 다시 돌아와 같이 일 하자던 이의 사망소식이었다.
향년 31세.
치료 후에 일을 할 수 있었음에도 퇴사를 당해야 했고, 새로 추천받은 기업이 있었으나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취업계획이 무산되었고, 암이 전이 된 후에는 가족의 생계부양을 이유로 콜센터 업무과 암투병을 병행해야 했던 한 청춘이 결국 먼 길을 떠났다. 다른이의 세밀한 삶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부류의 인간인지라, 그 분의 나이가 그렇게나 어리고 젊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던 나는 온라인 부고장 화면에서 한참동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뭐라고 대답했는데?" 내 질문에 당당하게 아이가 말했다.
"핸드폰으로 찾아보라고 했어. 사단법인 쉼표. 박00. 국제행사."
순간 왠지 모르게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웃었다.
국제포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늘어져 앉아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가 이런 말을 했었다.
"엄마. 일 하느라 고생했어."
"엄마. 나도 나중에 커서 엄마처럼 큰 무대에서 마이크잡고 말 하는 사람이 될거야."
일곱살 꼬마가 봐야 뭘 봤을까 싶어, 너는 좀 더 커서 자원봉사부터 시작하는거라고 해주고 말았는데, 오늘의 저 대답에는 뭔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선생님이 정말 검색을 해보셨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관명과 이름 석자로 검색되는 내용들이 늘어나고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앉게 되었다. '정말 잘 살아야 되겠구나!' 라는 생각도 함께.
늦은 오후, 빈소 소식을 들었다.
상주는 남동생이고 가족은 홀어머니 까지 둘 뿐이라고 했다. 온라인 부고장에 조의금 보낼 계좌가 없었던 건, 그걸 생각할 경황이 없었던 것이었다고 했다.
장례는 고인이 생전에 준비해둔 결혼자금으로 치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다시 함께 일 할 날을 바랐다는 말에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암은 남녀노소 부자빈자를 불문하고 찾아온다.
우리는 의료보험시스템이 훌륭한 덕분에 발견만 일찍 한다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으며 비교적 훌륭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치료 이후의 삶은 남녀노소 특히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극명하다. 생활이 어려울수록 치료 이후의 관리가 어렵다. 당연히 이후의 경과 또한 나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재발의 상황도 상대적으로 늦게 알아차릴 수 밖에 없기에, 치료 이후의 건강과 삶을 관리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조건에 경제력을 꼽는 것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일에서의 자기만족과 자기효능감을 맨 앞에 두는건 사실 줄어드는 월 소득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생활이 유지되는 이에게나 해당하는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의 경우는 달랐다.
유방암 중에서도 예후가 가장 안좋다는 삼중음성이었다지만, 그녀는 치료기간 내내 자신의 건강을 위해 요양을 할 여유가 되지 못했다. 분명 암이 많이 사라졌다는 좋은 소식을 들려줬었는데, 왜 그 마지막은 이래야 하는 걸까. 당장의 소득은 줄어들더라도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희망이 그녀에게 있었다면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그런 사회를 위해 함께 자리를 만들어냈던 그 날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
"어머니가 우리한테 고맙다고 하셨어요."
딸이 생전에 우리 기관과 함께 한 토론회 등의 자리에서 의미있는 목소리를 더하고 높이며 기뻐하고 뿌듯해 했다는 말씀을 전하시며, 고마워 하셨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며 포럼 관련 피드와 기관의 행보에 늘 좋아해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함께하고 싶었을까.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단 한번도 나의 오늘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절실한 하루였다는 말에 공감한 적이 없었다. 나의 하루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시간일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으로 조의금 계좌를 포함한 부고를 알리며 생각했다.
내가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가, 정말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하루였기에 그 삶의 가치만큼 살아내야겠다고 말이다.
잘 살아야겠다.
남겨진 마음이 무안하고 쓸쓸하지 않도록, 더욱 잘 살아내야겠다는 부담이 가슴 한켠에 자리를 틀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