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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인생 음식은 무엇인가요?

by 하루담은

OTT 플랫폼 N에서 화제였던 '흑백 요리사'를 보았다. 맛으로 인정받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 셰프 80명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 셰프 '백수저' 20명이 오직 맛 하나로 승부를 겨루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라운드마다 요리 대결로 계속 탈락자가 발생했고, 최후의 1인이 누가 될지 흥미진진했다.
세미파이널에서 인생 음식을 요리하라는 대결 과제가 나왔다. 여덟 명의 요리사는 각자 인생 음식을 만든 후 거기에 담긴 의미를 말했다. 가족과의 행복하거나 슬픈 기억 혹은 실의에 빠진 자신과 식당을 일으켰다는 저마다의 사연이 얽혀 있었다.


1위는 '나폴리 맛피아'라는 닉네임의 요리사였다. 그는 게국지(충청남도 향토 음식. 일명 게국이라고도 함)를 끓였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돌본 할머니가 해준 음식이라고 했다. 내겐 이름도 맛도 생소했지만,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들어있다는 건 충분히 알 것 같았다.

2위는 최현석 셰프였다. 그는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었다. 어린 시절 요리를 배울 때 선배들이 몰래 만들어 준 파스타를 먹고 힘을 냈다고 한다.
싫어하던 어머니의 국수를 이어서 하면서 무너진 집안을 일으켰다는 '이모카세 1호' 요리사의 사연에는 가슴이 뭉클했다.




나에게 인생 음식은 미역국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4년 전 첫아이를 가졌을 때 먹었던 미역국이다.
임신 2개월쯤 되었을까. 입덧으로 밥 냄새가 역겨웠다. 남편이 출근하면 집 앞 바지락칼국수 집에서 매콤한 국물로 메스꺼운 속을 다스리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허기는 지는데 뭘 먹고 싶지도 않고, 뭘 먹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빈속에 헛구역질을 해대며 친정으로 갔다. 엄마가 미역국과 반찬 몇 가지로 상을 차려주었다. 미역국 한 숟가락을 떠서 마셨다. 눈이 번쩍 뜨였다. 국물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메슥거리던 속이 개운해지고 입맛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원래 민감하게 느꼈던 고기 누린내도, 미역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훌훌 털어 마시고 또 한 그릇을 청했다. 두 그릇째 먹고 나니 기운이 나면서 기분까지 좋아졌다. 엄마의 미역국이 마치 특효약처럼 입덧을 가라앉혔다.

자라면서 엄마가 끓인 미역국을 많이 먹어 봤을 텐데. 내 기억 속엔 오로지 그날 먹었던 미역국만 남아 있다. 임신한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염려가 담겨서였을까. 아무리 비싼 한우 양지로 국물을 내어도, 맛에 마법을 부리는 조미료를 넣어도 그날의 미역국 맛과는 달랐다.



우리 아이들에게 인생 음식은 과연 무엇이 될까?
내가 엄마의 미역국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이들에게도 내가 만든 게 인생 음식으로 남으면 좋을 테지만. 나는 솜씨가 없어서 음식을 맛있게 만들지도 못하고 요리하는 것도 싫어한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배달시키거나 외식한다. 방학 한 아이들과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할 때는 더 자주 그렇다.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만든 것보다 사서 먹는 음식을 더 맛있게 먹는 걸 보면서 누가 만들었건 맛있게 먹는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 음식에는 부디 행복한 기억이 담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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