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배우기 정말 잘했다,라고 생각하는 것 두 가지를 꼽자면 단연코 자전거 타기와 운전하기를 고르겠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마음이 답답하거나 하면 이곳저곳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하굣길에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서 걸어왔던 건 기본이고, 주말에는 독서실에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새벽 기차를 타고 무턱대고 다른 도시로 가서 한참이고 걸어 다니다가 오기도 했습니다.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기였으니 당시에는 마음에 드는 읽을 책 한 권, 노트북 한 권과 펜 하나면 충분했지요.
딱히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여행인 까닭에 다시 기차역으로만 돌아올 수 있다면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어서 지도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국을 나오고 영국에서 살게 되면서도 이 역마살은 딱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저는 혼자 뚜벅거리며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고, 하루에 평균 한 시간 이상은 늘 걸었던 것 같습니다.
한 달간 유럽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대부분의 유럽 도시는 구시가를 중심으로 딱히 크지 않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 정도를 꼬박 투자해 걸어 다니다 보면 웬만한 곳은 다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치면 공원에 멍하게 앉아 사람이 지나다니는 걸 구경하곤 했습니다. 돈이 궁한 유학생 시절이라 남은 건 체력과 시간 밖에 없으니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그 후 자전거에 도전하게 된 뒤로 저는 조금 더 먼 곳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럼 나는 프랑스 파리에 가보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으니까요.
아이들이 태어난 뒤 혼자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데 한계를 느낀 저는 이제 차를 끌고 떠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필요한 건 그냥 차에 다 싣고 떠나면 그만이니까요.
대학에서 일할 때나 공무원으로 일할 때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휴가 기간이 길거나, 아이들 방학과 맞물려 쉴 수 있는 기회가 조금 더 많았던 저는 여름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일주일 정도 혼자 여행을 떠났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대충 지도를 보고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고릅니다. 보통 당일치기로 가기 힘든, 최소 3시간에서 6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곳을 최종 목적지로 고른 다음 그 중간 여정을 작게 쪼갭니다.
예를 들면 6시간 되는 거리를 1박 2일 일정으로 만드는 거죠. 숙소는 대체로 깔끔하고 저렵한 곳으로 잡은 뒤, 또 일정을 잘게 쪼갭니다. 이왕이면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곳으로 중간 목적지를 잡아서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를 달린 뒤 멈춰서 아이들을 놀게 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1시간 정도를 달려서 다음 목적지로 가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또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갔던 길로 되돌아오는 대신 다른 방향을 잡아서 또 일정을 쪼개고..
그렇게 일주일 동안 3-4군데 다른 숙소에 머물면서 여행을 하고 돌아옵니다. 여름이나 늦봄에는 아예 캠핑을 하고 오기도 하죠.
영국뿐 아니라 스페인에 머물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아이들과 여행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독일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원래는 네덜란드 남부, 북동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계획한 여행이었는데, 네덜란드와 벨기에, 독일이 워낙 근접하고, 거기다 네덜란드 자체가 딱히 크지 않아서 조금 욕심을 내서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국경을 넘나드는 게 정말 신기한데 남편과 아이들은 의외로 덤덤하더군요.
남편이야 스페인 사람으로 근접하게 붙어있는 유럽의 생태에 익숙하다지만, 아이들 마저 이토록 무덤덤하다니!
마음먹고 나라를 떠나겠다는 계획이 없으면 다른 나라 땅을 밟기 힘든 한국인인 저만 지도를 보면서 오오, 하고 감탄하는 중입니다.
강 하나를 두고 국경이 갈라지고,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다른 나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이토록 신기한데 말이죠.
이렇게 로드여행을 하다 보면 좋은 점은 짐에 대한 부담이 적다는 거고, 기동성이 좋다는 겁니다. 그리고 관광객으로 가기 힘든 곳을 가볼 수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
나쁜 점이라면 운전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각 나라마다 바뀌는 운전 규칙에 적응하는 것과 주차 문제가 될 수 있겠네요. 특히 네덜란드처럼 대중교통수단이 발달되어 있고 자전거가 보편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주차비가 만만치 않으니까요. 네덜란드 뿐 아니라 런던이나 파리 같은 곳은 운전에 웬만큼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혼돈의 도가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운나쁘면 따라오는 온갖 종류의 벌금까지 있고 말이죠.
그래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운전하고 있으면 어쩐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설렘과,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의욕까지 샘솟기도 합니다. (물론 휴가가 아니라 장기간 운전해야 하는 출장이라든가 극심한 교통정체로 시달리는 도로 위에 갇혀 있으면 운전이고 뭐고 간에 때려치우고 차에서 날개가 솟아나 날아가는 상상 따위를 하지만요.)
한편으로는 그렇게 다양한 곳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싶어 묘한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어디로 떠나간들 이상적인 도피처라는 건 존재하지 않겠구나.
12월 31일.
네덜란드의 도시는 커피숍에 앉을자리 하나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리고 1월 1일 아침.
벨기에의 작은 마을은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이들도 보이지 않을 만큼 늦게까지 고요했고, 네덜란드의 도시에는 아직도 전날 폭죽과 파티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고, 바람은 스산했습니다.
다들 한해를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어디에서 한 해를 시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 자리만의 색깔이 빛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