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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너구리 Feb 28. 2021

차가운 군만두를 씹으며...

오래간만에 정장을 꺼내 입었다.

묘하게 다른 아래, 위의 정장 색깔이 마음에 살짝 걸리지만 어쨌든 같은 검은색이니까 괜찮다. 서울에 면접을 보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된’ 사람같이 우쭐한 기분이 든다. 면접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서울 사는 이모 집에도 들렸다. 굳이 이모 집까지 갈 필요는 없었지만 오랜만의 면접은 뭔가 ‘된’ 사람 같아 자랑하고 싶어 졌다.


이모는 곱게 다린 손수건까지 챙겨주며 나를 응원했고 현관문을 나서는 내게 점심값까지 손에 지어주셨다.

기가 막히게 잘 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던 면접이라 생각했는데 나의 ‘된’ 사람 놀이는 거기서 끝났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 것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여기저기 떠벌린 덕택에 결과를 궁금해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연락이 빗발쳤다.


좋은 소식을 어떻게라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왕복 4시간 30분 거리에 버스 1번, 지하철을 2번 갈아타도 한참 걸어야 하는 곳을 지원했다. 즉시 합격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곳, 하는 일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샴푸와 린스를 파는 것. 마트 한편에서 신상 샴푸를 홍보하는 일이었다.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판매 멘트를 내뱉은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샴푸는 팔렸다. 물건을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이 팔아야 되는 타이쿤 게임처럼 나도 게임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 재밌었다. 대하기 어려운 고객에게 스트레스받지 않는 나를 보며 이 일은 천직이구나 싶은 적도 있다.


문제는 타 브랜드 샴푸를 파는 언니였다. 내가 파는 샴푸는 대기업의 제품이라 파는 물건만큼 마트에 홍보 사원도 많았다. 샴푸는 유명하지만 회사 인지도는 낮아 아군이 없어 서 일까? 언니는 텃세로 외로움을 달래려고 했다.

같은 브랜드의 기저귀 파는 언니, 치약 파는 언니들이 신입인 나를 응원해 주고 자리로 돌아가면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다가온다.


서비스 매니저님도 허용해 준 귀걸이를 지적했고 어떤 날은 내 머리가 지저분한데 어떤 고객이 샴푸를 사겠냐고 했다. 곱슬머리가 심한 나는 단정해 보이려고 앞머리 가발을 썼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멋을 부린다 오히려 욕을 먹었다.


언니가 외로움을 극복할수록 내 아군들과 멀어졌다. 아군들과 붙어 있는 게 눈이 띄면 언니는 더 많이 나를 찾아왔다. 점점 점심을 거르거나 혼자 먹는 일이 많아졌다.


매일 밤 만두를 6알씩 구웠다.

출근하는 길이 멀어 무거운 도시락은 힘들고 부피도 작아 안성맞춤이다. 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맛도 나쁘지 않았다. 언니를 피해 쉴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좋았다.


“ 샴푸와 린스의 차이는 뭐야? 컨디셔너와 트리트먼트의 차이는 뭐지? ”

갑자기 다가온 언니의 질문에 완벽하게 답했다. 어젯밤 피곤함을 무릅쓰고 한번 더 정리하고 잔 것이 맞아떨어졌다. 야호! 당연히 자기 구역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홍보 멘트를 대뜸 해보라고 한다. 예상 밖의 두 번째 꼬투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늘, 매일 매시간 외치던 멘트인데 이렇게까지 버벅댈 줄이야... 언니는 그렇게 말도 제대로 못하고 멍청한데 누가 샴푸를 사겠어라고 했다.

한 번의 무너짐은 도미노처럼 연속적으로 겨우 참고 있던 것들과 맨몸으로 마주하게 한다.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4시간 30분의 출, 퇴근 시간은 더없이 길고 힘들게 느껴졌다. 매일 매시간 잘만 외쳤던 멘트는 누군가 흉을 보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 버벅대며 눈치를 본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고객의 아픈 소리는 이제 스펀지 마냥 쭉쭉 빨아들인다. 내가 작아지니 고객의 폭언은 다 맞는 말이 되었으며 결국 내가 제일 문제였다고 되뇌는 버릇이 생겼다.

낮아진 자존감으로 고객과 만나는 순간이 몹시 고통스럽다.


억지로 4시간을 버텨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만두를 데우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입에 넣었다. 차가운 만두의 촉감에 놀라 도시락 통을 보니 만두들이 엉켜 붙어 있다. 만두 피는 퉁퉁 불다 못해 하얗게 떠 있었다.


다시 만두를 데우는 행위는 사치다. 나는 그렇게 먹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부터 차가운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언니의 텃세, 고객의 폭언, 일의 고단함 속에 차가운 만두를 씹는 것은 그중 가장 문제인 나를 스스로 벌하는 행동이며 동시에 그 속에서 버티는 행동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텃세로 그만둔다면 나약하고 배부른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나의 상황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한다면 그 들이 더 많이 아파할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여겼다.

만두를 씹으며 되뇌는 버릇은 똑같은데 멘트는 바뀌었다. 버티자... 어떻게든 버텨보자.


이 이야기는 지금의 내 아군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차가운 만두를 먹는 이야기에 웃는 아군도 있고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자기 일처럼 슬퍼하는 아군도 있다.


지금의 내 아군들이 궁금하다고?

내 아군들은 바로 서비스 현장의 담당자들이다.

고객에게 스트레스받지 않았던 것은 나만의 노하우로

불만 고객 관리는 경험에서 배운 것에 공부를 더해 단계별 대응을 이야기한다. 물론, 텃세 부리는 언니들을 제압하는 방법도 필수 코스다. 지난날의 버팀은 현재 내게 피와 살이 되었다.


내 업을 시작할 때

아군들을 만나는 날이면 나는 항상 이렇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실무 경험이 많은 서비스 강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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