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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랑 Dec 30. 2023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고부터 계속 새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새해가 된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매년 새해에는 새로운 내가 되길 다짐하고 기대한다. 그런데 새로운 일이나 결심도 새해 연초부터 하게 되니 크리스마스가 지난 이후에 얼마 남지 않은 그 해 연말의 시간들은 유야무야 흘러 보내게 되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사이의 기이한 일주일은 시간의 밖에 있는 괄호 속 같다. 지난해가 끝났지만 아직 새해는 시작되지 않았다.' - [외면 일기]


지금 시간들은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 카운트다운과 보신각 종이 울리기까지 6일의 시간. 성경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셨다던데, 천지를 창조한 이 시간이 이렇게 '연말'이라는 이유로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사라지고 있다. 하긴 360일을 얼렁뚱땅 살았는데 남은 며칠 더 그냥 지나가는 게 뭐 그리 큰일이겠어.





어차피 천지 창조는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못할 테니 남은 6일 하루에 한 공간씩 집이나 치우기로 했다. 오늘은 아이방의 책과 장난감을 정리했다. 아이방의 슬라임은 볼 때마다 버리고 싶은 내적갈등이 생긴다.

아이들은 왜 슬라임을 좋아할까? 아이에게 줄 크리스마스 산타의 이름으로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마트에 갔을 때 동병상련의 부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선물로 슬라임을 사달라는 아이와 슬라임 말고 다른 것을 말해보라는 부모.

매번 슬라임을 가지고 놀고 나면 옷이나 수건, 가구, 바닥 등에 흔적을 남겨놓는 바람에, 집에서는 슬라임 금지라고 했는데도 매번 어린이날이나 생일이 되면 가장 갖고 싶은 물건이 슬라임이란다. 그런 큰 딸에게 이번 크리스마스 산타의 선물은 슬라임이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 남편과 나는 선물을 보고 시치미를 떼고 탄식했다. '아니, 산타할아버지는 슬라임은 안된다고 했는데 슬라임을 사주시면 어떡해!!'

산타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는 4학년 큰 딸은 이 선물로 혼란스러운 것 같다. 엄마나 아빠가 절대로 슬라임을 사주었을 리는 없는데, 산타가 존재한다는 건 왠지 신빙성이 없지만 뭔가 엄마 아빠 외의 다른 존재가 있긴 있는 것 같단다.


문득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의 크리스마스가 생각났다. 크리스마스이브날 할아버지 댁에서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텔레비전에 키세스 초콜릿 광고가 나왔다. 당시의 나는 산타할아버지는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키세스 초콜릿이 너무 먹고 싶었던 나머지 올 크리스마스에는 산타할아버지한테 키세스 초콜릿을 사달라고 할 거라고 말했다. 이미 다른 선물을 사두셨을 할머니는 산타할아버지가 밤이 너무 늦어서 소원을 못 들어주실 거라고 내일 날 밝으면 같이 사러 나가보자고 하셨지만, 나는 산타할아버지는 꼭 들어주실 거라고 억지를 부리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정말로 산타할아버지로부터 키세스 초콜릿을 선물 받았다.

그 해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미리 사두셨던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보다 맛이 없었던 키세스 초콜릿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죄송함에 정말 맛있다면서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던 가식적인 내 모습도. 나는 할아버지가 추운 바람을 헤치고 다니며 늦게까지 문을 연 슈퍼마켓을 찾아 헤매셨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용했던 것이다. 단지 그 초콜릿을 당장 먹어보고 싶어서.


아마 우리 딸도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자기가 슬라임을 만지고 노는 것을 정말 싫어하지만 산타할아버지를 핑계로 결국 가장 갖고 싶다는 것을 사줄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산타의 존재를 믿는 척 엄마 아빠를 떠본 것일 수도 있다. 뭐 어쩌랴. 나 또한 그런 손녀였으니.





생각해 보면 크리스마스는 새해 첫날보다 더 새로운 결심을 하기 좋은 것 같다. 올 한 해 하지 못했던 일을 반성하기도 하면서, 내년에는 산타할아버지의 선물(혹은 스스로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약하기에 참 좋은 날.

만약 누군가가 이제 일찍 일어나서 매일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새해부터 그 결심을 실천하려면 작심삼일이니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다음날부터 그 결심을 실천하게 되면 새해까지만 실천해도 나는 이미 작년부터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간사한 뇌 속임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는 일이 당연한 일상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원래도 일찍 잘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날씨가 추워져서일까 요즘엔 일찍 일어나는 게 더 힘들다. 부끄럽지만 해 뜨는 것과 비슷하게 일어난다. 나이가 들수록 아침잠은 적어진다는데 나는 언제까지 아침잠이 많을는지.

예전에는 어떻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출근을 했을까? 출근이라는 강제성이 없어져서 그런가 요즘은 자기 전에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지' 생각을 하고 자는데도 정작 아침이 되면 따뜻한 이불속에서 꾸물거리게 된다.


올 연말을 보내면서 또 작게 다짐하고 시도해 본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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