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했겠다'라고 말해주세요.
어렸을 적 나는 작고 귀여운 것들을 모으는 걸 좋아했다. 판박이를 모으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풍선껌을 잔뜩 사기도 했고, 하굣길에 띠부띠부씰이 들어있는 빵을 사서 스티커를 뜯는 게 하루의 행복이었다. 영롱한 색조합의 학종이와 별 접기 등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그저 쌓여가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그렇게 서랍 속에 차곡차곡 나의 행복들을 모았다.
기억 속에 창문으로 햇빛이 들었던 걸 보니 아마 날씨가 좋은 날이었던 듯하다. 학교를 마치고 신나게 실내화가방을 흔들며 들어간 방에서 그때의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처참함을 맞이하였다. 책상유리와 서랍에 덕지덕지 붙은 판박이와 스티커, 가위로 난도질당한 학종이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내 것'들에게 일어난 대참사를 믿을 수가 없었다. 사촌동생이 한 일이었다.
처참했던 내 마음에 포근한 위로를 하는 어른은 없었다. '너보다 어리니까 이해해야지~', '모르고 한 거잖아.', '그거 얼마 한다고 또 사면되지'라는 말 사이에서 열 살 남짓의 나는 아마도 '속상하겠다'와 같은 종류의 위안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고작 두 살 차이가 이리도 큰지, 어른들이 내미는 모든 말들이 싫고 미웠다. 그날 이후로도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많은 행동들은 이해받았고, 그 행동들로 꽁꽁 싸맨 내 마음은 이해받지 못했다.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간극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가정사로 인해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어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두해 앞섰다는 이유로 어린 마음에 난 생채기를 덮은 채 이해를 강요해서는 안 됐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로 멈춰있다. 그래도 엄마는 내편이 되어달라는 말조차도 하지 못했고, 여전히 그 아이는 불쌍히 여겨지는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사촌동생을 마주하면 그때의 나로 돌아간 듯 미운 마음부터 솟구친다.
내가 그 아이를 왜 미워하는지 조차도 몰랐다던 어른들은 서른이 넘은 지금의 내게 '이제 다 큰 어른이니까 잊어버려~'라는 말을 묶어 미움을 저 바다 아래로 던지라 한다. 2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날카로운 기억인걸 보니 언제 무뎌질지 모르는 마음이다.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영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