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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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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속 Feb 02. 2016

그만 하라는 몸의 신호

정말 멈춰 서기까지


매 달 고정 지출분으로 월급이 스치 운다는 30대 중(후)반의 나이에 흙수저 주제에 일을 멈춘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래야만 하는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거듭했다. 일을 쉬어도 호전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가장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내가 찾은 대답은 이렇다. 일단 쉬어보는 .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재활 투병기 라던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나 후원금 ARS 번호 같은 건 없으니 이점 깊은 양해를 부탁드리며. 치료 관련 세부 내용 역시 전문의의.영역이므로 배제하려 한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니까.


다만 질병에 가까운 아픔이나 피로감으로 인해 본업의 궤도에서 잠시 벗어나기를 계획하는 분들이 있다면 약간이나마 가상 체험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혹시 놓치고 있는 몸의 신호가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시기를.


건선은 생명이 위독한 류의 질병이 아니며, 자가 면역 질환으로 전염성도 없다. 일상생활이 큰 무리 없이 가능하기 때문에 현업을 잘 이어가며 병을 다스리고 있는 분들이 훨씬 많다.




그 때 사실 아팠던 곳은 피부가 아니라 허리였다. 디자인은 머리도, 가슴도 아니라 허리로 하는거였군. 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2012년 10월

어느 날 퇴근후 씻고 나와 보니 종아리 근처에 동전만 한 크기로 붉은 것이 생겨있었다. 언제 생긴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처음 보는 류의 무언가다.


상처도, 벌레에 물린 것도, 데인 것도 아닌데 그냥 빨갛다. 딱히 아프거나, 가렵거나 하진 않는다. 일시적으로 생긴 것이려니 하고 일단 추이를 살폈다. 눈에 잘 뜨이는 부분도 아니고, 특별히 신경 쓰이는 자각 증상도 없으니 그렇게 두고 보게 된 것이다.


이러다 말겠지

하지만 그 작은 녀석은 크기를 더해 갔고, 한 두개 씩 추가로 더 나타났다. 한쪽 다리에 있던 것이 어느 날인가 보니 다른 쪽 다리에도 생기고. 그다음은 팔에, 몸에, 얼굴에. 그런 식으로 아주 천천히 나를 잠식해왔다.


그냥 놔둘 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엄습. 이라는 단어가 이런 것이구나. 무언가 제대로 일이 났구나. 증상이 조금씩 심해지면서 가려움증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회사 주변인 강남역 인근 피부과 서너 군데를 번갈아 다녔다. 여러 의견을 들어보려는 차원에서 몇 군데 다녔는데 대동소이한 소견. 이때만 해도 습진이라고 했다. 건조한 환경에서 오래 앉아있는 사무직군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며. 이걸 먹고 이걸 바르면 된다고.


ARS처럼 담백하게 설명하는 그 말을 1-2분 정도 듣고 약국 처방을 받아 오는 일을 하면 또 한동안  그럭저럭 지냈다. 가장 처음 갔던 병원에서의 첫 진찰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의사 본인이 걷어 올린 팔을 벅벅 긁으며 이렇게 말했다. "건조하고 피곤하면 나도 이래 가려워요"


처방해준 연고를 바르고 보습제를 자주 바를 것. 한 번 생기면 잘 없어지지 않으니 꾸준히 관리할 것. 그렇게 간헐적으로 병원을 다녔고 병세는 계속해서 심해졌다. 수년에 걸쳐 아주 서서히 젖어오는 지하 골방 벽지처럼 아주 천천히.


2013년 여름.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절친한 한의사 T형에게 내 다리를 보여줬다. 뭔가 믿을 만한 소견을 듣고 싶었다. 형은 그간 늘 보여주던 막역한 술친구의 뉘앙스를 싹 걷어낸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 이러다 죽어


"괜찮아, 나아질거야"를 기대했던 난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았다. 진지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잘 돌이켜보고 내 삶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단다. 일, 가족, 욕심, 혹은 금욕, 그게 뭐든. 약을 바르고 먹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무슨 소리야? 너무 이상적이고 이상한 얘기잖아. 당장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고 말이지. 나쁜 기운이 피부로 표출이 되었으니 이렇게 난 것이지만, 이게 내장 기관에 어디 다른 식으로 나타나면 그게 암이 될 수도 있는 거라는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진한 친분에 근거한 걱정 어린 충고로 실제 의학 사실과 다를 수 있다)

2015년 5월

그 후 2년이 지난 작년. 정말 T형 말처럼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병세가 악화됐다. 무릎 아래쪽은 거의 뒤덮다시피 했고 전신에 걸쳐 산발적으로 병변이 퍼져 몸을 물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에는 얼굴에까지 붉은 멍울이 올라왔다. 옷으로 가릴 수 없는 곳이 그렇게 되어버리니 말 그대로 정면 돌파를 해야 했다. 결혼식도 많은데.


모른 척 그냥 대해주는 유형, 얼굴 왜 그래? 곧바로 묻는 유형, 힐끔힐끔 동공이 흔들리는 유형. 뭐가 됐건 모두 결국 다 불편하다. 아픈 건 정말 곤란한 일이구나.


작년 1년 내내 종합병원과 건선 전문 한의원을 병행하여 집중 치료를 받았고, 음식 조절, 금주, 금연, 점심시간 중 규칙적인 운동 등, 회사원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몸은 묵묵부답.


공부를 아무리 해도 성적이 전혀 안 오르는 학생이 되어버린 것 같은 심정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밖으로 큰 내색 없이 무심히 이 일련의 과정을 헤쳐 나가려 스스로를 계속 단속했지만 하루하루 점차 뭔가 신경이 예민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샤워 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견뎌 내기가 조금씩 힘들어지고, 만성이 되어버린 불면증 때문에 아침마다 머리채를 쥐어뜯어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 좋아했던 술도 이제 안 마시는데 숙취 같은 아침에 시달려야 하다니. 누군가 매일 아침 내게 누명을 씌우는 기분이었다.


아픈 부위가 넓어지면서 약이나 보습제를 바르는데 필요한 시간도 점차 늘어나 어느새 최소한 하루 두 시간은 족히 넘어갈 정도가 됐다. 중간중간 화장실 드나드느라 업무 집중력도 의욕도 자연히 사라져갔다.


이제와 곰곰 생각해보니 결국 먼저 동력을 잃고 멈춰 서기 시작한 쪽은 몸 보다는 마음인 것 같다.


End of the road.

그렇게 막다른 길에 도착했고 휴직을 냈다.

상처를 돌보고 어디부터 잘못 온 건지 살펴볼 시간이다.


몸이 완전히 망가진 뒤에 멈추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고, 잘 한일이다. 이렇게 멀쩡히 앉아 생각할 시간이 그간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몸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나타날 때 그랬듯 아주 천천히.


숙취 같던 아침은 평일 알람을 모두 꺼버리니 완벽히 자취를 감췄다. 그것만 해도 일단 충분히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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