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을 많이 쬐고 좀 쉬려는 목적 외에 별다른 의지가 없었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안일하고 게으른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사전 조사도,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갑작스레 여행이 시작됐다.
하루하루 마음 가는 대로 스스로를 방목시키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 믿었다. 회사에서 일하던 관성으로 시간 맞춰 놀기가 싫었던 것 같다. 타이트하게 짜인 일정이 반드시 즐거운 여행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은 자기 합리화도 한 몫 거들었다.
다시 이런 식으로 가겠냐고 묻는 다면
기꺼이 YES.
4월까지가 우기라고 하는데, 꾸준히 흐리고 비가 반복되는 우리나라 장마와는 조금 다르다.
비가 짧은 시간 강하게 오고 이내 햇볕이 날 때가 많다. 오전에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한 하늘이었다가 오후에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도 한다. 일정을 길게 가져가면 우기라도 햇볕을 즐길 수 있는 셈.
그날의 날씨는 그날 알 수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Is it going to be raining today, or not?
현지인에게 물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Who knows?
날씨 어플에 나타나는 예보 역시 우기에는 예보가 아니라 중계에 가깝다.
가장 정확한 예보는 쇠약한 내 몸 관절 곳곳에서 오는 메시지였다. 거의 적중
새벽에 빗소리에 잠이 깼는데
그 날 아침엔 이런 하늘 아래에서 서핑을 한다.
일단 왔다 하면 후련하게 다 씻겨낸다.
길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다. 물에서 어떤 냄새가 날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참고로 이 동네에서 저 정도 차량 컬렉션이면 청담동 발렛파킹 된 슈퍼카급.
미화 100달러 지폐를 주면 130만 루피아 정도를 내어줬다. 우리나라 화폐 단위보다 10배나 더 큰 숫자를 쓰는 셈이다.
원화에 0을 하나씩 더 붙였다고 생각하면 루피아 값과 비슷해서 환산은 쉬운데 문제는 영어다. thousand 단위로 끊어 말하다 보면 뇌가 다운된다.
한국돈으로 얼마인지 따지는 일을 멈추고 그냥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올바르게 돈을 낼 수 있었다.
여태껏 살면서 10만, 100만 단위 숫자를 영어로 말할 일이 과연 있었던가. 그런 큰 숫자는 뉴스나 신문 같은데서 보고 듣는 단어지 내가 쓰는 류가 아니었는데.
여기 화폐 단위로는 밀리언 million이 어쩜 이리도 쉽다. 일상 생활에 밀리언이 이렇게 자주 입에 붙다니. 백만장자 되는거 별거 아니네.
메뉴판을 보면 우리나라에서와 비슷한 식의 축약 표기가 흔히 발견된다.
가격을 묻고 답하는 경우에도 thousand는 보통 생략하고 말을 한다. two hundread라고 하면 마땅히 200,000(=2만 원)이지, 정말 200(=20원) 일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온 가족이 리조트에서 며칠간 사육당할 계획이 아니라면 너무 비싼 숙소는 결국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감옥과 같다.
본전 심리 때문에 쉽사리 나가 있질 못하는 것이다. 바다를 코앞에 둔 지역에서 혼자 머무르는데 숙소에 딸린 풀이 있고 없고는 크게 중요치 않아 보였다.
해변 곳곳에 깔린 파라솔 딸린 베드는 시간당 5천 원 선이다. 거기서 보통 맥주를 비롯한 기본 음료를 편의점 가격 수준으로 갖다 준다.
럭셔리한 리조트 썬베드에 눕는 휴식이 당길 땐 곳곳에 있는 비치클럽 beach club에 가면 된다. 이 나라엔 해변을 즐기는 모든 방법이 다 있다.
이번 여행에서 2, 3, 5만원대 숙소를 경험했다.
2만원대 : 싱글룸 게스트하우스
3만원대 : 공동 수영장이 있는 호텔
5만원대 : 공동 수영장이 있는 빌라(침실,거실,주방, 마당+테이블)
에어컨이 구비된 싱글룸의 최저 가격을 검색해보면 1만원 후반부터 나타난다. 사진상으로는 국내 어지간한 여행지 6-7만원 하는 모텔보다 훨씬 평화롭다. 꽃무늬 핑크 벽지나 인조가죽 소파 같은 게 없으니까.
발리 도착하는 항공편이 새벽 1시가 넘기에 호텔 하루 날리는 게 좀 아까워서 염가의 숙소에서 잠시 눈만 붙이려고 간 곳.
장기간 체류하는 서퍼들이 많이 묵는다 한다. 2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간단한 조식까지 포함되어있었는데 다시 갈 마음은 없다.
좋은 경험이긴 하지만 어쩐지 다시 하긴 싫은 그런 것 있잖아.
3만원의 축복 수준의 호텔이었다. 처음 3일, 그리고 마지막 2일을 이곳에서 보냈다. 다시 간다 해도 여기 묵으면서 이곳저곳 다닐 것 같다.
가격, 청결, 서비스, 위치가 모두 좋다. 조식은 포함된 룸을 예약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그때 그때 사 먹는 게 쌌다.(5-6천 원선)
해변을 벗어나 섬 중심부에 위치한 우붓 Ubud으로 넘어와서는 전통 가옥 구조의 현지 게스트하우스를 경험하고 싶어 도시 중심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이 곳을 잡았다.
Pondok = House라고 한다. 대나무집이라는 뜻. 울창한 숲 속 같은 분위기가 이제 정말 좀 나를 치유하는 여행을 온 기분이다.
2만원도 안 되는 값에 이런 독채를 준다고 되어 있기에 속는 셈 치고 예약을 했는데 와보니 정말 그랬다. 원래 예약했던 곳은 오른쪽 사진의 집이다. 코코넛 나뭇잎을 잘 엮어 만든 벽채로 되어 있다.
복층으로 되어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방 안이 많이 어둡고 혼자 지내기엔 어쩐지 황량한 기분이라 맞은편의 새 건물 객실이 비어있다기에 현장에서 바꿨다.
조식을 테라스 테이블까지 매일 가져다준다. 나무가 풍족한 나라라 그런지 저렴한 방이라 해도 안에 비치된 가구는 통 원목이다. 돌처럼 무겁다;
이번 발리 여행에서 가장 좋은 기억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싼 이곳에 머무른 날들이었다. 이틀만 있다가 다시 해변 쪽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하루를 더 머물렀다.
가격을 떠나서 맘씨 좋은 호스트 께뚜 Ketut가 기억에 남아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스미냑 Seminyak에서는 5만원에 거의 별장을 한 채 받았다.
새 집은 아니지만 지을 때 좋은 안목으로 잘 설계해서 지금도 그 매력이 돋보인다. 오너 혹은 건축가가 일본 계열이 아니었을까.
공간마다 은은한 목소리로, 문득문득씩 지루할 틈마다 '괜찮아'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귀신 아니고
가만 앉아 생각을 하거나 책을 읽고 휴식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았다.
다만 혼자 있기엔 너무 컸다. 골수까지 외로웠다.
이쯤 보면 눈치챘을지 모르겠는데, 실내 바닥은 욕실, 방, 거실, 로비 할 것 없이 전부 타일이나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위의 사진을 다시 보면 여기 말고도 모든 숙소가 다 그렇다.
현지인들은 건물에 들어가는 계단에서부터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발바닥 쩍쩍 붙는 소리를 내며 생활을 하고 하루 종일 바닥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방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첫 편은 여기까지로 줄인다.
추가)
다음편은 아래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https://brunch.co.kr/@mintyblu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