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알이 톡톡 터지는 추억의 맛
나에게 옥수수란 여름 제철에 가끔 쪄서 먹는 기호식품 같은 거였다. 하지만 인도에 살면서 매일 장을 보다 보니, 우리나라에는 통조림 옥수수로 더 알려진 노오란 스위트콘이 사계절 내내 신선하게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맛도 좋은데 아주 저렴하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살림을 하는 주부에겐 이런 식재료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내가 스위트콘을 처음 맛본 건 2009년에 어학연수 겸 인턴십을 하러 미국에 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초당 옥수수라는 게 없어서 샛노란 옥수수는 통조림 아니면 시골 큰 이모네서 소먹이려고 키우는 뻣뻣한 사료용 옥수수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홈스테이맘은 옥수수를 사왔다며 껍질을 북북 벗겨서 끓는 물에 퐁당 빠트려 익혀주었다. “맛있게 생겼다”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쪄먹는 방식이 익숙했던 나는 속으로 맛이 밍밍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실하고 탐스럽게 생긴 옥수수를 하나 집어 개인 접시로 옮겼다. 펄펄 김이 나는 옥수수를 간신히 들어 한 입 먹었는데 처음 맛보는 옥수수의 단맛에 깜짝 놀랐다. ‘옥수수가 이런 맛이 난다고?’ 홈스테이맘에게 설탕을 넣었냐고 물어보니 “노! 올 내츄럴!”이라고 했다. 집에서 엄마가 최소한의 소금과 설탕만 넣고 찐 담백한 찰옥수수만 먹던 나에겐 센세이셔널한 경험이었다. 뉴슈가든 설탕이든 때려 넣어도 이런 맛은 안 나겠다 싶은 상큼한 단맛이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옥수수를 많이 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맛을 잊고 산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기 시작했던 답답한 시기의 어느 날이었다. 친구가 너무 맛있다며 꼭 먹어보라고 보내준 초당 옥수수 한 박스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바로 현관으로 달려가 박스를 번쩍 들어 주방으로 옮겼다.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퇴근을 하고 컴퓨터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옥수수 박스부터 뜯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친구가 알려준 대로 껍질만 벗기고 대충 물로 씻어 전자레인지에 2분을 덥히고 먹었다. 아삭아삭 달콤한 맛이 십수 년 전 LA에 있던 추억 속의 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는 맛이었다. 그 때 이후로 매년 여름엔 꼭 초당 옥수수를 사먹었다.
초당 옥수수는 수확 시기가 짧아 좀 아쉽다고 생각했었는데, 누가 나 옥수수 실컷 먹게 해달라고 빌었나? 인도에 오니 스위트 콘이 365일 나온다. 게다가 크고 실한 옥수수가 한 자루에 이, 삼백 원 정도밖에 안 한다. 하지만 사람은 참 간사하다. 이것도 너무 흔해지니 이제는 슴슴하고 쫀득한 강원도 찰옥수수가 그리워진다.
옥수수하면 우리 엄마를 빼놓을 수 없다. 완전 찰옥수수 킬러인 엄마는 매년 강원도와 괴산에서 옥수수를 킬로 단위로 사는 것도 모자라 매해 씨를 받아 주말농장에서도 농사를 지어오셨다. 양이 많진 않지만 직접 키운 옥수수가 20년 넘게 매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수확 시기가 되면 부모님은 싱싱한 옥수수들을 당일 손질하고 집에서 제일 큰 곰솥에 쪄서 냉동실로 차곡차곡 넣는다. 그러면 그 냉동된 옥수수 중 제일 실한 것들로 한 바구니는 딸내미 꺼, 또 다른 바구니는 아들내미 꺼 챙겨주시고 주변 지인분들에게도 정이라며 늘 한 보따리씩 나누어 주신다. 인도에 온 지금은 그 정성 가득한 보따리를 받을 수 는 없지만 무슨 옥수수를 보든 엄마가 떠오른다.
한국에서는 옥수수 레시피라 하면 쪄먹는 방법 외에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이 식재료를 가지고 아주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다. ‘부타 마살라’라는 구운 콘 요리부터 콘 피자, 콘 사모사, 콘 수프, 콘 샌드위치, 콘 강정 등등 셀 수도 없이 많다. 이 단맛 나는 채소 하나가 쓰임새가 얼마나 많은지 감자만큼이나 가성비가 정말 최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중에 내가 제일 애정하는 요리는 ‘크리스피 콘’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특히 맥주를 마실 때 시키면 최고의 안주가 된다.
이 메뉴를 알게 된 건 작년 초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브루잉 펍을 갔을 때였다. 메인 메뉴들을 실컷 먹어 배가 불렀지만 맥주는 좀 더 먹고 싶어 가벼운 술안주를 시키자 했다. 누군가는 배부르면 술만 먹으면 되지 않냐 하겠지만 우리는 늘 안주가 있어야 섭섭하지 않다.
애피타이저 쪽에서 메뉴를 보고 있었는데 “콘으로 만든 요리가 있다고?” 신기해하며 생소한 이 메뉴를 시켜보았다. 어떤 형태로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알이 노릇하게 잘 튀겨진 이 메뉴가 서브됨과 동시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요건 맛이 없을 수 없겠다!”
숟가락으로 한 스푼 가득 떠먹었는데 이븐하게 익은 튀김의 온도, 은은한 향신료들의 향, 씹는 순간 기름에 팽창된 옥수수가 톡 터지면서 쫀득한 식감이 느껴졌다. 옥수수의 구수한 단맛에 플러스알파로 짠맛 그리고 다진 고추와 양파, 인도 향신료의 맛들이 합쳐져 복합적인 맛이 났다. 정말 맛있는 (인도 버전의) 맵단짠 조합이었다. 맛있는 걸 튀겼으니 끝난 거지 뭐. 이후론 펍에 가면 반드시 시키는 우선순위 메뉴가 되었다.
지금도 따끈하게 배달된 크리스피 콘과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맥주를 함께 한바탕 들이키고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참고로 지금은 밤 11시… 이 시리즈를 시작한 이후로 유일한 단점이라면 자꾸 음식의 맛을 디테일하게 상상하며 쓰다 보니 군침이 돌고 식욕이 왕성하게 돋는다는 점이다. 자고로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