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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Oct 02. 2024

근대 미국 희곡과 아메리칸드림

이번 학기에는 근대 미국 희곡 수업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근대 미국 희곡이라고 하면 미국 연극에 있어서 가장 클래식한 장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만 접근하는 것보다는 주제를 통해 희곡을 탐구하면 좋을 것 같아 '아메리칸드림'이라는 틀을 잡게 되었습니다.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모두 근대 미국 희곡의 대표 극작가들이고, 또 미국 연극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인물들입니다. 혹시 이 이름이 익숙하지 않더라도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과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그 정도로 근대 미국 희곡은 미국 연극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근대 미국 희곡의 간단한 역사적 배경과 주요 주제들, 그리고 그들의 아메리칸드림과의 연결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기적으로 근대 미국 희곡은 20세기와 함께 시작합니다. 20세기 전후로 유럽과 미국 정세가 크게 바뀌게 되거든요.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은 유럽 열강들의 문화를 따라가는 상황이었는데, 1898년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에서의 승리와 함께 힘 있는 열강 제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20세기 초에 이어진 세계대전에서 수입을 벌어들이면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전쟁 속 급부상 중인 미국에 여러 이민자들과 난민들이 모여들게 되면서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만의 정체성이 서서히 생기게 됩니다. 전쟁을 직접 미국 땅에서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겪고 많은 가치들이 무너지면서 혁신적이고 새로운 방향의 문화와 예술이 탄생한 유럽과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름대로 치열하지만, 보다 정적이고 내면적이고 희망적인 톤을 띄게 되는 거죠. 


19세기는 멜로드라마의 시대였습니다. 다른 포스트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멜로드라마는 분명한 선악의 분리, 권선징악의 구조, 해피엔딩, 그리고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화려한 볼거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세계대전 이전의 장르인 만큼, 일관적이고 다소 일차원적인 도덕성의 추구와 그에 대한 믿음이 보이지요. 반면 20세기는 사실주의, 자연주의, 모더니즘으로 대표됩니다. 이 사조들도 유럽에서 출범한 것인데요. '사실주의'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현실에 대한 대면을 요구하는, 사회고발적인 어둡고 날카로운 장르입니다. 대중적이지 못하고 검열 문제도 있어서 무대 상연보다는 지식인들 위주로 독서 모임하듯 소비된 장르였어요. 대표적 작품으로는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이 있습니다. 결혼 제도가 가진 성차별적, 폭력적, 억압적 요소들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작품이지요. 


이 사실주의는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표현주의, 부조리라는 모더니즘의 요소들과 혼합하여 미국만의 장르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표현주의와 부조리는 여기서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만, 둘 다 건조한 사실관계의 나열보다는 인물의 심리적인 부분과 창의적인 표현 방법을 탐구하는 장르였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공감을 얻고 발전하게 된 장르는 이때 발생한 '심리적 사실주의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반적으로 사실주의적 기법을 매우 선호하되,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외부적인 사회의 상황보다는 그로 인해 촉발된 인물의 심리와 내면적 갈등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굳건한 미국의 선호 장르인데요. 할리우드나 넷플릭스의 전형적 형식을 보면 인물의 연기가 얼마나 '진짜 그 사람' 같은지, 컴퓨터 그래픽이 얼마나 실제와 가까워 보이는지, 그리고 주인공이 처음부터 완벽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미숙한 면이 강조되다가, 그 내면적 어려움을 어떻게 딛고 결국 극복하고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하지요. 


개인의 노력으로 외부적 상황을 극복한다는 희망적인 전개가 바로 아메리칸드림과 직결되는 부분입니다. 아메리칸드림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또 부서짐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밀러, 윌리엄스, 오닐과 같이 당시 유럽의 사회고발적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극작가들의 작품은 이 희망의 잔인성과 현실과의 간극을 탐구합니다. 근대 미국 희곡의 주요 주제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가족의 역설: 구축자와 파괴자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환멸  

보이는 것과 실제의 대비 

미국 내 정의의 추구 


'가족'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유는 20세기 기술발전과 함께 '교외의 중산층 백인 가정'이라는 탄탄한 모범적 미국 시민의 모습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유로운 도시 근교, 잔디가 있는 주택에서 가정주부인 어머니가 예쁜 가정을 꾸리고, 정장을 입고 일하는 아버지가 보호막을 주며, 아이 둘이 있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이들이 적절한 소비와 사교를 통해 우아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바로 나라 차원에서 추구하고 장려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러한 모습에 도달했을 때, 가정 내에서는 차마 밖에 보여줄 수 없는 오래된 내부 문제가 곪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외도와 유전병(성병), 불행과 알콜중독, 가정폭력과 부모-자식 간 소통의 좌절이 일어나고 있었죠. 모두들 알고는 있지만 자존심과 체면 문제로 쉬쉬하던 이 현실을 수면 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바로 근대 미국 희곡입니다.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도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고, 그의 또 다른 작품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에서는 좌절한 가장의 수간을 소재로 삼으며 상당히 충격적이고 잔인하게 가정의 붕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붕괴된 아메리칸드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메리칸드림은 1931년 출간된 제임스 아담스의 <미국의 서사시>라는 책에서 처음 등장하는데요. "모두에게 더 낫고 더 충만하고 더 풍부할 수 있는 삶이 있는 곳에 대한 꿈, 그리고 경제적 환경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각자의 능력과 성취에 따른 기회의 제공"이라고 정의됩니다. 평등, 개인성, 기회, 더 나은 삶이 키워드로 보입니다. 교육을 통해 가능한 사회적인 상승 이동, 이상에 대한 믿음, 노동과 노력이 또 다른 키워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에는 '교외의 중산층 백인 가정' 이미지로 대표되었던 것처럼 상당히 단순하고 명확했던 이 아메리칸드림은 시대를 거듭하며 점점 뚜렷한 형체가 없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어떤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포괄하는 개념이 됩니다. 


이번 미국 대선 토론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미국의 대선은 하나의 스포츠 경기처럼 구성되어 있지요. 애초에 '경주'(rac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전당대회를 통해 연설로 승부를 겨루는 것, 연설의 승패가 관객에게서 얼마큼의 광적인 열기를 이끌어내고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지에 따라 갈리는 것, 그리고 선거 인단이라는 것이 꾸려져서 실제 표의 수와는 상관없이 각 주가 하나의 팀이 되어 경기에 참여하는 것, 이 모든 구조가 그야말로 연극적입니다. 무엇보다 제 눈을 사로잡았던 건 전당대회에 모인 관객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나 당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미국!'이라고 외치며 이 경주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인데요. 실제로 트럼프와 카말라는 각자가 미국이 하나의 나라로서 추구하는 이미지를 두고 싸우고 있습니다. 딱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의식이나 가치로 겨룬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한국의 선거 분위기와 대비되었어요. 그만큼 '미국의 가치'는 아직도 계속 재정의하고 재정립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싸워 쟁취하는, 여러 버전으로 갈라진 아메리칸드림이 아직까지도 굳건히 가장 공감받는 미국의 정체성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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