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을 들썩이게 하는 뉴스는 아무래도 조지아 주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ICE 요원들이 급습하고 노동자를 구금한 사태에 대한 것일 것이다. 한국 사회는 상당히 놀란 분위기인 것 같고 그래서인지 현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 설명적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접한 콘텐츠에서는 주로 법적 정치적 관점에서 현 사태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정치경제학에도 법학에도 무지하지만, 두 달 전까지 미국에서 십 년 가까이 살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인문학 박사과정을 하면서 정치와 사회, 역사 문제에 깊숙이 발 담근 사람으로서, 이런 분석들이 내 경험이나 관점과는 상당히 괴리 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굳이 조금 다른 맥락의 첨언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가 보는 한국 사회는 과격했던 구금 과정과 시설 문제, 그리고 너무 명확한 불법적 군사적 체포 방식에 대한 놀람과 충격이 큰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분노는 당연히 따라야 할 피해 보상이나 수정 조치, 그리고 사과에 대한 요구/기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동시에 동네 불한당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미국의 태도를 마주했고, 과연 당연한 일들이 그만큼 당연하게 따라줄지 확신이 없어 더 분노를 가진 채 사태를 지켜보게 되는 것 같다.
한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갑작스러운 일이고, '전례 없는'이라는 뉴스 보도는 이런 시각을 부추긴다. 하지만 과연 이런 생각의 방향이 사태의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에 와서 느낀 건 한국은 너무 한국 위주로, 미국은 너무 미국 관점에서 국제 정세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맞고 틀리다는 게 아니라, 둘 이상의 나라가 엮였을 때 마치 같은 일에 대해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미국의 맥락은?'을 좀 이야기해보고 싶다.
우선 ICE라는 이름의 이민세관단속국(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이 미국에서 통용되는 이미지 자체가 일방적이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체포 방식이다. ICE가 떴다고 하면 유색인과 이민자는 일단 긴장한다. 갑자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단 건 당연히 생각한다. 동일하게 비교하긴 어렵지만, 중국 공안이 가지는 이미지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 열악한 구금 시설에서 시간을 보내고 언제 석방될지도 모르는 막막한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웬만한 미국 시민을 놀라게 할 수 없다. 그만큼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엘에이 거리를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실종된 가족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볼 수 있다. 전부 ICE에 의해 이유 없이 끌려간 뒤 연락 두절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ICE만 그러한가? 미국인들이 경찰만 보면 본능적으로 극도로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가장 최근에 직접 옆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건 대학 캠퍼스 내 가자지구 학살 반대 시위에서였다.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평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들은 무기 하나 없이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키는 학생들 가운데로 장갑차를 몰고 들어와 완전군장을 하고 학생들을 무작정 수갑 채워 끌고 가 구금했다. 그날은 헬기가 하루 종일 도시 위를 돌며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고, 그렇게 끌려간 나의 친구는 손목 신경에 손상이 와서 영구 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그런 사실을 열심히 호소했고 학생 단체도 그 이야기를 크게 만드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당연히도 묻히고 지나갔다. (이 친구가 백인이 아닌 한국계 교포라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디테일이다.) 이미 느끼겠지만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어서 누구도 딱히 주목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이유로, 또는 정치 성향이 시오니즘과 맞지 않아 보인다는 이유로, 경찰 또는 ICE요원이 막무가내로 가택을 침입하거나 퇴근하는 시민을 마구잡이로 붙잡아가는 영상이 심심치 않게 돈 지는 이미 오래됐다. 옆에 있던 가족이나 친구가 촬영한 영상이고, 가끔은 CCTV영상도 공개되지만, 물론... 아무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로는 입국 심사 과정에서 랜덤으로 불려 가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는 방에 갇혀서 아무 이유 없이 몇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일도 생겼다. 역시 분위기는 삼엄하고, 구금 시설을 방불케 하는 죄인 취급을 당한다. 미국 입국할 때는 그렇게 불려 갈까 봐 늘 긴장한다. 지금 공장 직원들이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것처럼, 이미 생겨버린 공포의 기억은 지울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떻게 정부에 의한 불법적 일이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문제없이 지나갈까. 지금 미국을 바라보는 혼란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는(특히 냉전 체제에서 확실히 자리매김한,) 미국의 그 자기 PR 속 이미지와 지금의 권위주의적 행보 사이의 괴리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미국에서 인문학자/예술학자들이 트럼프의 정책을 두고 흑마법으로 지칭할 때, 청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논리로 설명되거나 대화로 소통이 되지 않는, 권위와 카리스마만을 내세운 무논리 무맥락의 이야기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흑마법이 지칭하는 지금의 정책이다. 그냥 마법이 아닌 흑마법인 이유는 미움, 증오, 공포, 폭력성 등 인간 안에 있는 안 좋은 감정들을 동력으로 삼고, 따라서 이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이미 파시즘의 물결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학자들 사이에선 논의의 여지도 없이 공공연하게 전제되는 사실이다.
잠시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을 인용해 보겠다. 파시즘이란 - "본래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정치주의를 지칭한 데서 유래한 말로,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처럼 국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전체주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파시스트는 파시즘을 신봉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 대중사회이론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강권적·독재적·비민주적 성격을 띠는 정치운동이나 이념을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파시즘이 트럼프 대에 와서 갑자기 급부상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파시즘은 암류처럼 처음부터 미국이라는 나라를 움직이는 근본 동력으로 존재해 왔고, 자유주의적 가치는 언제나 스스로를 포장하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정부에 따라 이 민낯이 더 잘 보이거나 잘 안 보이거나를 반복할 뿐이다.
일례로 검열 문제가 있다. 미국의 검열이 어찌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하게 존재하고 있는지, 극장에 가면 늘 느낀다. 한국에 와서 관극을 다니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솔직함을 담은 공연이 주류이고, 그 솔직함에서 나오는 진정성이 예술에 큰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의식 중에 당연하게 앉아있던 미국 극장이 얼마나 답답한 공기를 주고 있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렇게 솔직해도 괜찮나?'라는 자기 검열이 몸에 배어 바로 작동하는 걸 느꼈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 교포 친구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미국 영화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어서라고 했고, 나는 한국이 미국이 표방하는 열림과 다양성의 가치를 대신 증명해 줄 정치적으로 안전한 대상이라서라고 했다.
미국 역사와 전쟁 영화와 연극을 가르치면서, 미국 내 검열이 살벌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학도, 영화계도, 군의 깊은 영향력 안에 있고, 군대는 세세한 내용을 치밀하게 검열한다. 단순한 내용 삭제 요구를 넘어서 미군의 미화적 이미지 연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렇듯 군대적 체제의 정부가 곳곳에 가진 영향력들 속에, ICE의 쇠사슬 체포는 예외가 아닌 일관이다.
지난 학기 <연극과 전쟁> 수업을 가르치면서 마지막 시간에는 가자지구 학살 반대 캠퍼스 시위를 다루었다. 많은 자료를 참고했지만 안전을 위해 누구의 이름도 인용할 수 없었다. 스스로 국외 추방이나 불시 체포, 아주 적은 가능성이지만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 사태도 생각해 보고, 감수하겠단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내 이민서류는 언제든 ICE에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 사태에서 자꾸만 사람들은 합법/불법을 구분하면서 그걸 중요한 구분점으로 보는데, 미국 이민 서류에서 합법/불법은 명확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민 서류 작성이나 등록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어있지 않아서(황당하지만 과장 없는 사실이다), 필요한 절차를 아무리 다 밟으려도 해도 밟을 수가 없는 처참한 수준이다. 물론 그 많은 비자 종류들 가운데 조금 더 통상적인 경우는 더 말끔하게 처리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엄연히 나라에서 지정한 공식 OPT(박사 후 취업 기간 동안 미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비자) 대상이었지만 통상적인 이공계가 아닌 조금 다른 체계의 인문학, 그것도 예술계였고,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줄글로는 나와있지만 시스템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런 경우 내 이민 상태가 문제가 되면, 소속한 단체가 나를 위해 많이 싸워줘야 하고, 모호한 영역이어서 결과를 장담하지 못한다.
이민자 정책을 이 맥락에서 생각해 보자. '불법 이민자 척결'이 그토록 위급하게 당면한 문제라면, 왜 이민 서류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고,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도 않고, 그저 수량을 할당한 다음 미친 듯이 체포만 할까? 답은 이제 명확하다. 이민자 정책은 정말로 나라의 안전과 발전을 위한 것도, 진짜 문제가 있어서 펼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부를 운영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주장/이야기라서다. 이민 서류는 복잡하고 엉성하고 구멍이 많이 뚫려있을수록 유리하고, 그 체제를 정비하는 데에 자원이 들지 않을수록 좋다. 이미 그걸 잘 알고 있어서 ICE는 체포할 때 합법/불법을 따질 필요가 없다. 적법을 우길 구멍은 늘 존재한다. 중요한 건 서로 우겼을 때 누가 이기느냐인데, 정부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은 ICE에게 무엇이 두려울까.
할당량을 못 채우는 게 두렵지 잘못 채우는 게 문제가 아니다. 조금 튀는 이야기이지만, 이 또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베트남전을 생각해 보자. 미국은 '이기고 있다'는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파병 군사들에게 할당량을 주었고, 그래서 참여한 미군은 진영을 따지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에 몰두했으며, 그 때문에 베트남전이 그만큼 처참한 역사로 남았다. 성공적 진압의 증거로 피해 수치를 이용하고, 그를 위해 막무가내로 피해를 일으키는 건 미국이 가진 익숙하고도 노련한 기술이다. 언제나 효과적이었으니까 반복적으로 쓰이는 것이다. 학살과 갈취로 점유하고 있는 자본이 워낙 많아서 머리 아프게 치밀한 계산 같은 건 필요 없다.
지금도 미국 정부는 나날이 새로운 이민자 압박 정책을 내놓는다. 내가 사용했던 OPT 비자의 세부 사항을 더 빠듯하게 바꾼다고 한다. 그런 보도를 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누가 언제 그걸 관리나 했나? 마치 그걸 바꾸면 무슨 행정 변화가 있을 듯 엄포를 놓지만 아무 실질적 효용 없는 압박의 말일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주 공격의 대상이 이민자인가. 파시즘이 추구하는 권위주의 정부는 국가의 위기를 필요로 한다. 제국 체제에서 전쟁은 내란이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다. <Wag the Dog>(1997)이라는 영화에서 이 부분을 적나라하게 꼬집었는데(원작은 American Hero라는 소설이다) 표심 움직이기 전략으로 미디어와 정권이 결합해 없는 전쟁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영화 개봉 이듬해 클린턴 스캔들이 터지고, 여론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테러 사태가 여럿 등장하며 클린턴이 해외에 공격을 가하면서 영화가 실제를 예지 했다는 말도 나왔었다.
국가 안보에 위기감을 주는 주체는 언제나 외지인, 외부인이다. 그래서 이민자라는 두루뭉술한 카테고리를 두고 '외지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선제공격하는 게 미국의 정책이다. 일종의 공포정치인데,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여 국민을 통제하는 것이다. 역시 트럼프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지탱해 온 다이내믹이다. 어느샌가 테러리스트, 테러리즘이라는 이름이 공포의 감정을 담고 퍼지지 않았는가. 9.11 이전과 이후 공항 보안검색문화도 완전히 바뀌었다. 테러리즘은 확증 없이도 선제적인 위협이나 인권 침해를 할 수 있는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효과적인 프레임이다.
그러나 이민자든 외지인이든, 무엇도 미국에 합법적 통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유럽에서 건너온 외지인들이 거주 중이던 원주민을 학살하고 우겨 세운 나라라는 역사도 이미 문제지만, 그렇게 남의 땅을 폭력적으로 갈취한 뒤 자신들이 하고 싶진 않지만 필요한 일을 늘 그 '외지인'의 힘을 빌려 처리해 왔기 때문이다. 노예무역부터 시작해서, 멕시코 땅 갈취 이후 그 노동력의 부당한 착취, 대륙횡단 철도 건설 노동력에 동원하고자 동양인 이주 지원 등, 전부 자원을 가진 백인이 손대기 싫은 일에, 여의치 않은 처지에 놓인 타지 사람들을 이용해 착취해 왔다. 그러니 그들의 존재를 불법이라고 정밀하게 따지거나 정의하려 들면 그 원인이 된 미국 정부의 불법도 같이 건드려지기 때문에 세세한 법리는 두루뭉술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이민자와, 인종과, 노동력 문제가 함께 간다는 것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칼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그냥 사회 구조를 설명하는 여러 개념 중 하나일 뿐인 계급론이 미국에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진리로 품고 살아간다는 걸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미국은 계급 사회다. 아메리칸드림은 마치 미국이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가진 나라인 것처럼 그리지만, 실제로 누구보다 경직된 계급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실, 엄격하고 착취적인 계급 없이 운영되는 제국을 난 아직 본 적이 없다. 미국의 계급은 시각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노예제부터 시작하여 인종에 기반한다. 워낙 가시적이어서 더 계급 이동이 어렵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처럼 말투와 행동을 바꾼다고 다른 계급이 될 수가 없다.
이 계급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회에서 한국의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공연이 그 장소에 어떤 에너지를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그게 왜 중요한지 등을 발표하고 나면 청중에게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관객은 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이 정말 내가 말한 대로 이해했는지이다. 나는 이 질문이 이해가 안 갔다. 관객은 어차피 전부 다 다른 것을 공연에서 얻어가게 되어 있으며, 그건 시간을 두고 숙성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공연은 '어떤 효과를 이끌어냈는지'를 무슨 과학 실험 결과처럼 기록할 수 없다(참고로 질문자들도 연극 전공이다). 어느 순간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 질문을 더 설명해 달라고 하자, "공연자들은 노동자 계급일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말한 그런 공연이 정말 상류층일 관객들에게 가 닿았는지, 정말 당신이 말한 대로 '어우러지는' 환경이 있었는지, 상상이 잘 안 가서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 질문은 미국 연극의 관객이 상당히 획일적이기 때문에 나왔을 거라 생각한다. 노년의 중산층 백인. 대개 보수적, 국수적 관점을 지닌 그들의 시혜적 기부로 극장이 운영되기 때문에, 지속과 생존을 위해 공연은 그들의 입맛에 맞춰 검열한다.
난 그래도 그 질문이 이해가 안 가서 계속 곱씹고 있었다. 그러다 연극학과에 교수직 방문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자인 동료 교수들이 나한테 "그래서 당신이 계급이 유동적인 상태를 전제하고 얘기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요. 그 상태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 계급 간 간극을 어떻게 이을 건지 그걸 말해달라고요"라며 이야기했을 땐 절로 멍한 표정이 나왔다. 분리를 전제하는 게 이상해서 내 출발점은 분리 이전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늘 그렇듯 이번엔 그들이 멍해지면서 아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나는 서로 이해가 안 되는 그 간극의 이유를 한국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오자마자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진 건, 거리를 걸을 때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 존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지내면서 존엄하지 않은 인간을 익숙하게 마주하며 살았다. 거리의 노동자들, 노숙자들, 버려진 사람들... 교수들이 말한 그 '분리'는 미국 도시라면 조성되는 삶의 환경이다. 한 거리 걸러 한 거리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자본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공간은 작든 크든 완결하게 서있고, 바로 옆, 자본이 들어가지 않은 곳은 마치 그 부산물처럼, 뒷문의 쓰레기통처럼 슬럼화되어 있다. 슬럼 사람들의 시간은 다르게 간다. 존엄함을 잃은 인간의 느낌은 희망의 부재로 다가오는데, 그건 몸으로 느껴지는 존재의 결과 시간성의 차이이다. 그래서 서울에 오고 난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공간이 완결하지도 버려지지도 않은 채 섞여있었다. 미국에서라면 한눈에 슬럼이라고 생각될 모습의 거리가 충분히 건전하고 깨어있는 에너지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도 계급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고, 계급 간 이동도 원활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서양의 계급 사상은 마치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처럼 소개되곤 한다. 실제로 한국 또한 이민자나 인종 차별에서 유사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본질적 결의 차이가 매우 크다고 느꼈다. 그 차이를 모르고 하는 대화는 각자가 인간의 본성, 세상의 원리, 사회의 구조에서 보편적 진리라고 전제하는 내용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대화를 하고 있지만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인종으로 돌아오면, 그간 미국에선 반복된 흑인 인권운동의 결과로 인종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지며 마치 인종으로 찢어진 계급이 조금은 완화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견고한 그 계급 구조는, 같은 착취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언어만 경제로 틀었다. 이미 역사적으로 인종을 근거로 자원의 배급을 차등한 것은 문서로 다 남아있다. 그래서 지금 와서 인종이 아니라 경제적 지표에 의한 환경의 차이라고, 마치 객관적인 과학적 분석인 듯 미국 내 불평등의 원인이 설명되곤 하지만, 실은 인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애초에 미국에 자생이라는 것이 어디 있나. 역사도 문화도 경제도, 모든 자원은 빌린 것, 뺏은 것에서 나오기 때문에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래서 이민자 배척의 이유가 '미국인들에게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어불성설이란 거다. 이민자는 실제로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지도,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특히 동양인을 상대로 -- 철도 건설을 위해 동원된 중국 인력이 미국에서 세탁소를 하며 자리를 잡아갈 때나, 미국 자체 내 경제 문제로 대량 해고가 발생하는 상황일 때 -- 동양인을 대상으로 보복적인 정책이나 사건들이 누누이 있어왔다. 세탁소 운영 같은 건 천한 일이라고 미국인들이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중국인의 세탁소 운영이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국가가 혐오를 부추기며 1882년에는 전무후무하게 나라(중국)를 특정하여 노동자 입국 금지 명령이 시행돼 십 년간 유지된 적이 있다. 100년 뒤, 1982년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된 백인 노동자들이 일본 자동차 산업의 강세를 자신들의 해고 원인으로 보고 보복 감정으로 바에서 친구와 시간을 보내던 중국계 미국인을 때려죽인 뒤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애초에 빼앗긴다는 게 무슨 말인가? 이민자들은 본국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환경 속에서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도, 삶의 여건이 안 돼서 그런 대우를 감수하기 때문에 고용되는 거지, 미국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이득을 취할 정도의 힘도 없는 위치다. 다만, 오히려 더 그래서 화풀이하기 좋고, 만만하다는 건 맞다.
그래서 나는 조지아 사태를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된다. 지금 한국의 분노에는 모욕과 자존심의 감정이 들어가 있어 보인다. 어느 나라라고 자기네 나라 사람들이 미국에서 부당한 인권침해를 당하는데 모욕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번에 드러나는 우리 기술자들, 우리의 고급인력을 감히,라고 하는 정서에서 국력의 차이를 느꼈다.
우리가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우린 그런 히스패닉 불법 이민자가 아닌데, 하는 말이 들린다. 그게 나는 존엄성을 주장하는 말로, 존엄하지 않은 '그들'과는 다른 처우를 기대하는 말로 들린다. 이 긴 포스트를 쓰면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이러한 구분이 위험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중동인-테러리스트, 히스패닉-불법이민자라는 프레임 뒤에는, 막상 원인제공을 하고도 모른 척 아닌 척 착취의 구조를 유지하는 미국이 있다. 또 실질적 면과는 무관한, 인종을 기반한 혐오적, 배척적 고정관념의 영속을 본다. 이 구조를 답습하는 순간 한국 또한 배척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모두 같은 구조 속에 같은 침해를 당하고 있는 것인데, 누가 누가 더 나은지, 나만은 예외라고 따지는 순간 착취 대상끼리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는 건 판을 짠 백인이다.
자본과 국력의 정도가 무시할만하지 않아서(그렇다고 위협은 아니다) 동양은 미국에서 계급적으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한다. 존엄성을 맘 편히 무시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인정하자니 백인 자원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에 통합되지 못한 외지인의 애매한 위치에 가둬둔다. 역시 가시적으로 상용되는 외지인의 구분이다. 이 담론에 휘말린 동양인의 '너(다른 이민자들)완 달라' 태도는 '모델 마이너리티 신화'라는 이름으로 비판받아왔다. '신화'가 의미하듯 그런 현실인식이 환상이고 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 귀한 인력은 원래의 이민자 정책이 타게팅한 진짜 문제 인구가 아니니까, 오해니까, 이번만큼은 불법이니까, 는 어필해도 소용없는 논리라고 본다. 그 원래의 이민자 정책이 정확한 대상을 찾아 정확한 집행을 한 거니까. 잘못도 오해도 없었고 늘 하던 일을 잘 한 것이다. 우방은 무슨 우방, 미국 입장에서 그 많은 이민자와 인종과 동양인을 보면서 무슨 구분을 한다는 건가. 그냥 다들 뭉뚱그려서, 그나마 신경 쓰는 사람들에겐 불쌍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불쾌한 외국인일 뿐이다. 더구나 고급 기술자고 뭐고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면 더 볼 것도 없다. 떠나려는 한국 인력을 갑자기 붙잡으며, 그냥 머무를래?라는 트럼프의 제안은, 약한 나라 노동자들 당연히 미국에 있으라는 허락을 받으면 좋아하겠지, 귀한 기회를 주는 거니까,라는 믿음 없인 나올 수 없다. 계급적 사고방식이 깊어서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존엄해도 그들은 그렇게 볼 줄 모른다.
물론 이번에 한국이 외교력과 국력을 잘 사용하여 '우리는 왜 무시하면 미국에게도 손해인지'를 잘 전달하면 국면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켜보는 입장에서 나는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이번 사건으로 한국이 배우는 것이 '우린 역시 진정 달랐다'라면 이건 앞으로 미국을 대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오류를 지속시키고, 현명한 대처를 하기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건 수많은 이민자들이 겪어왔던 아픔과 억울함을 진정 이해하고 공감할 줄 알게 되고, 그래서 연대할 줄 아는 것이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서로가 남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미 교포들이 한국의 사례를 다른 이민자 집단과 연계하여 동력으로 전환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한국의 국력이 지금 다른 집단보다는 좀 더 목소리를 내고 강하게 나갈 수 있는 상태라면, 그리고 그럴 의지가 있다면, 연대 의식을 만났을 때 정말 많은 지지와 힘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아주 장기적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살짝의 disclaimer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나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을 한국계 이민자나 유학생이 많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굳이 인문학 박사나 예술을 하지 않는다면, 이민자 문제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고 남의 일로 치부하기 쉬워진다. 미국이 세팅해 놓은 포장된 자아상과 인종에 따른 계급의식은 미국 교수들 스스로도 잘 모를 정도로 정말로 강력하고, <기생충>에 상을 주는 등 자유주의적 이상을 주장할 증거를 의식적으로 계속 만들어두기 때문에, 한 번에 파시즘이라는 더 큰 틀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무방비로 있다가 자기 일이 되는 순간에야 놀라고 억울해지고 대처가 어려워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에 트럼프가 미국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고, 환상-신화에 찬물을 끼얹어 미국을 대하는 한국의 생각이 깨어날 기회를 주나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차피 상황이 이런데 그거라도 가져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