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강사일기

K팝의 공연무대 정치: 보이는 것과 보여야 하는 것

글로벌 시장에서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by 로리

벌써 몇 달 전 일이지만, 2024년은 에스파의 해라고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K팝그룹 에스파가 미국 음악 방송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한순간에 여론이 등을 돌리는 일이 있었다.


상당히 폭발적이었던 인기가 한순간에 뒤집어진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한국에서 주로 무대를 함께 꾸리는 댄서들, 카메라 움직임, 조명 연출 없이 진행된 방송은 어떠한, 부족한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버렸다는 허전함을 주었다.


K팝의 글로벌 진출에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다른 그룹들의 미국 음악방송 사례와 비교되며 이 사건은 어떠한 속임수로 인기를 얻었다는 식의, 에스파를 향한 조롱과 비난, 혐오성 발언으로 이어졌다.


무대가 아쉬웠을 수는 있지만, 나는 꽤 열광적이었던 에스파의 인기가 이렇게 단박에 씹던 껌 뱉듯 버려지는 현상이 조금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기저에 미국 방송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가 있다고도 느꼈다. 한국에서 이들의 공연이 어떤 존중과 감동을 주었든지, 미국 무대의 평가가 그 경험을 다 압도하는 어떠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국 방송에서의 허전한 모습이 마치 에스파의 사회 속 계급을 정해주기라도 하듯 다소 비하적이고 가학적인 발언들이 때를 기다린 듯 서슴없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는 건 마음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2024년 이후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리한 활동을 이어가던 에스파가 강제로라도 쉬면서 재정비할 틈이 생긴 것 같아 차라리 잘된 일 같기도 했다.




공연예술을 전공하면서 K팝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내가 미국에서 지내는 지난 8년간은 "K-" 접두사를 붙인, 성공적 문화수출에 대한 열망이 유독 강해진 시기였다. 그랬기 때문에 미국에서 K팝이 어떻게 읽히고 받아들여지는지 보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서양에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논의하는 K팝의 성질, 언어, 특성 등이 내가 알고 있는 K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그런데도 그런 해석들이 의심의 여지없는 주류 의견이자 객관적 분석으로 여겨지고 있어서, 신기했다.


주로 이미 존재하는 그들의 대중문화 담론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초자본주의 산업의 결정체로서의 K팝 시장과 수익 구조, 그 과정에서의 노동력과 문화 착취의 문제를 논의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K팝이 가지는 다양성의 가치를 조명한다. K팝 남자그룹의 퍼포먼스 영상을 보여주는 순간 서양 관객의 눈에 가장 처음 보이는 건 퀴어함이다. 마초가 아닌 부드럽고 장식적인 외형을 어필하는 모습은, 그런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 관객에게 너무 당연히도 어떠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선택하는 행위로 읽힌다. 마치 사회가 정해준 엄격한 성별 구분을 해체하고 그에 도전하는 듯한 모습은 퀴어 커뮤니티에게 지지의 표상이 되기도 하고, 그런 새로움이 불편한 관객에게는 케이팝이 아닌 게이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사례가 보여주듯 문화 콘텐츠가 '글로벌'이 되는 순간, 그 콘텐츠는 도착 지점을 침투하거나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착지에 존재하는 환경 속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재정의되고 재해석된다. 그곳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는 어떠한 논의의 장을 제공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만들어지던 시점에서의 의도나 의미와는 무관해진다.


미국과 한국의 대중문화 문법은 너무나 다르다. 애초에 K팝이 하나의 장르로 주목받게 된 건, 지금의 국제 문화 시장에는 없는 특색이 있어서가 아닐까? K팝의 특수성이라고 한다면 혹독한 훈련을 통해 얻는 단체 퍼포먼스의 우수성과 비주얼적 어필이 있다. 보이는 것과 역동성이 중요한 만큼, 카메라와 조명, 메이크업이 이 장르를 완성하는 중요한 협업의 요소이다. 한국의 문화 속에 가수라는 존재는 전부터 기술을 뽐내고 감탄하는 것보다는 끼를 발산하고 함께 흥이 오르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더 기대되는 자리였다. 모임의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방을 가고 여럿이 모이면 종종 누구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는 문화가 그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개인이 가진 끼가 충분히 대중을 사로잡고 기쁘게 하기 위해 대자본 회사가 움직인다. 유독 프로듀싱 회사의 이름이 중요한 K팝 산업은 솔로의 싱어송라이터 위주의 미국 가수와는 아예 다른 직업군이다. 미국 가수가 K팝 무대에서 충분히 능숙하게 카메라 무빙에 맞춰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에스파가 미국 무대에서 빛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능력이 그간 뻥튀기 되었다고, 내가 속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에스파의 비교 대상이 되는 블랙핑크의 미국 무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블랙핑크는 처음부터 다국적 멤버들로 이루어져 국제무대 문법에 대한 이해가 있는 그룹이었고, 그런 국제적 미학이 처음부터 그룹의 특성으로 어필되었다. 한국 멤버와 동아시아 감성 위주로 제작되고 활동했던 에스파와 서양무대에 대한 이해나 준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있지 않을까.




최근에는 W코리아에서 개최한 유방암 인식개선 행사가, 이름난 연예인들과 특히 K팝 가수들 위주의 술파티 형태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중반응은 이번에도 즉각 참여한 연예인들을 향했다. 사과문을 올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름난 연예인들의 얼굴과 이름과 그들의 파티 영상은 사람들을 금방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K팝의 구조를 생각해 본다. 이 산업에서 가수 개인의 의지가 그들의 스케줄에 얼마나 반영이 되는가? 그들이 몇날며칠 잠을 못 자고 무대에서 탈진으로 쓰러지는 일이 잦을 정도로 무리한 행사 일정을 소화한다는 것은 이제 너무 당연시된 것 같다. 결국 돈 버니까 됐지,라고 하기엔 연습생 기간의 모든 교육 비용을 개인에게 빚으로 달아두고 활동 이후엔 지출을 채워야 한다며 차에 타면 잠에 들고 눈뜨면 나와 정해진 일정을 수행하는 강도 속에 개인이 그렇게 의식 있게 자신의 스케줄을 관리한다는 게 얼마나 말이 될까.


상황이 이렇다고 그래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가장 화려하게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는 사이 정말로 책임을 져야 하는 행사 기획과 자금처, 기업과 회사의 문제가 훨씬 더 조명을 받아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공연예술을 전공하면서 반복적으로 맞닥뜨린 점이 있다. 굳이 이쪽 업계에 종사하지 않으면 공연이라는 장르의 보이는 것들 뒤에 얼마나 수많은 사람과 시간들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치 초가공식품처럼, 화려하고 자극적인 최종본 아래에는 엄청난 재료와 공정이 섞어 들어가 있고, 가장 큰 책임은 기획과 회사에 있다. 더구나 대기업과 중소로 구분될 정도로 대자본에 거의 완전히 종속된 K팝이 얼마나 주체성 창의성 예술성 담론 속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까.


이렇듯 자본주의의 기계처럼 기능하는 산업으로서 K팝을 비판하는 건 꽤나 명확하고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착취와 완벽주의 위주로 정의되는 지금의 글로벌 K팝 담론에 불편함을 느낀다. 눈에 당장 보이는 K팝의 어필이 아이돌, 즉 우상으로서 결함 없는 완벽한 모습이라면, 나는 실질적으로 이 산업을 끌고 가는 문화적 동력은 그 혹독한 훈련과 구조를 뛰어넘는 열정과 노력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한계에의 도전, 극한의 상황에서 견딤을 선택할 때, 꿈을 향한 개인의 주체적 버팀은 진정성을 이끌어내고, 희망과 감동이라는 실질적 힘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는 이 힘이 K팝이 거리 시위에 자연스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사용된 이유라고 본다.) 오디션 프로가 자아내는 열광과 지지의 힘과 유사하다. 그래서 K팝은 온전히 수동적이지도, 온전히 주체적이지도 않은 미학을 가진다. 어쩌면 양극단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지금, 미국을 위주로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학살 반대 운동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bts의 침묵에 대한 국제 팬덤의 실망과 불만의 목소리가 크다. 나는 또다시 정치와 문화의 문법 차이를 생각한다. 발화 위주의 미국 정치 문법에선 발화가 쉽고도 중요한 일이다. 국제 팬덤의 요구 속엔 K팝 스타의 위치를 서양권 스타와 같은 문화의 구조 속에 당연하게 배치하고 미국 위주의 사고를 강요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자신의 나라가 나서서 민족 학살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수행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공인이 가지는 발화의 위급성 인지와, 한국의 공인의 감성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하고 이야기할 필요를 느낀다. 한국이 당연하게 K-컬처의 글로벌화를 열망하는 순간, 그 비전이 어떤 자본구조에 편승해 있는지, 기대되는 이득에는 어떤 책임이 함께 존재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의 대자본 구조는 미국을 중심으로 깊이 얽혀있고, 학살지원금과 K팝의 수익구조 또한 연결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작은 나라로서 휘말리는 국제 정세에 무지하게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다음 팔레스타인은 우리일 수도 있다.


K팝의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외부의 평가에 의존하지 않고, 외부와 마주함으로써 생기는 새로운 경험과 시선들을 스스로 이미 가지고 있는 특성과 힘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는 것이다. 버리고 고칠 점보다는 어떤 강점을 더 살릴 수 있는지, 그것을 위해서 어떤 보완이 도움이 될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래야 어딘가를 막연히 쫓아가거나 따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주체적인 시선으로 다음 단계와 목적성과 가지고 갈 의식을 다질 수 있다. 그때는 정확하게 어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볼 수 있게 된다.


이미 "K-"문화의 힘을 스스로 알고 있다면, 불안할 것도 외부의 인정도, 꼭 '글로벌화'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문화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도 뺏기지도 않는다. 노력하는 매일, 더 잘하려는 마음, 버티려는 의지로 이미 가장 중요한 것은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로벌화되는 것이 중요하다면 이러한 힘들이 또 다른 문화권의 어딘가에 버티는 힘과 연대를 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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