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강사일기

무대 밖의 공기가 더 예술 같을 때

외계어가 된 예술 언어를 지나서

by 로리

주말 동안 공연 두 편을 보고 왔다. 하나는 국제적으로 명망이 있는 일본 예술가들의 협업 작품, 하나는 해남에서 올라온 풍물굿 공연이었다.


토요일에 본 그 유명하다는 공연은 나를 너무 갑갑하고 화나게 했는데 그 꽉 막힌 가슴은 여기저기 실수가 있었던 일요일의 공연이 다 풀어주었다.


한국에 와서 이런저런 예술현장에 가면서 느끼는 바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다채롭고 수준 높은 작품들이 다 따라잡지도 못할 정도로 풍부하게 제공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현장이 이른바 '고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 이쪽에서 뼈가 굵은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꾸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중요한 워크숍을 알게 되어 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인터넷에 나오지 않아서 (알만한 사람들만 아는 곳에 정보가 있다) 여기저기 발품 팔아서 정보를 구걸해야 하는 적도 있었고 공연 보고 나올 때 들리는 관객 간 대화에는 전공자들의 논리적 분석적 토론들 뿐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장벽으로 느껴졌던 건 언어였다. 공연/전시에 대해 소개하거나 설명하는 글들은 분명 한국어로 적혀있는데 내겐 아무리 읽어봐도 외계어를 보는 듯 무슨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특히 좀 더 정적인 예술, 즉 전시나 미술관 같은 공간에서 두드러졌다. 국제적 예술가들을 초청한 야심 찬 전시들도, 국내 창작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전시들도 너무 많은데, 그들을 소개하는 언어는 너무나 현학적이고 고상하고 위대해서 글만 읽어서는 공연이 가지고 오는 그 질감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의도만 잔뜩 쓰여있는데 의도와 작품의 공연성은 늘 너무나 다르다.


그 빈틈없이 고상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작가들과 작품들 앞에 서면 나는 왠지 몸이 배배 꼬이고 어딘가 불편하고 가슴이 갑갑한 게, 밖으로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며 한껏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은 심정이 든다. 내게 그것들은 죽은 예술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불만의 말은 정적 예술에겐 부당할 수 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우리의 언어가 달라서일 뿐이니까. 나를 포함한 공연예술 쪽 사람들은 늘 살아있는 것, 생명력에 반응하는 사람들이고, 영화나 미술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로 더 안정적이고 깔끔한 형태의 표현을 가깝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쩐지 늘 어떠한 고정관념이나 사회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그 절실한 예술들이 그저 생명력도 몸도 제거하고 머리로만 자꾸 표현하고 이야기될 때 내 안에선 어딘가 윤리적인 부분이 건드려진다. 아마도 누군가에겐 이런 식의 이성적 접근이 훌륭한 배움 효과를 가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좀 그렇다. 특히 관람의 자유도가 떨어지는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다소 러닝타임이 길다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일방적인 훈계적 태도를 띠는 예술은 날 치를 떨게 만든다. 강압적이고 폐쇄 공포를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난 판놀이 형태를 띠는 공연장에서, 마침내 숨을 쉬는, 뭔가가 속이 풀린다는 경험을 한다. 판놀이에선 무대가 어떤 모양이든 객석과 공연자의 구분이 유연해진다. 공연장 안의 사람들이 작품을 평가하거나 소비하기는커녕 함께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단 걸, 그것으로 온전히 기쁠 수 있단 걸 느낄 수 있게 한다.




나의 관점이다. 왜냐하면 반대로, 그런 어려워진 언어들이 싫어서 일부러 쉽게 쓰려 노력하는 내 글을 오히려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배웠고 공부했다는 학자들이 내 말과 글을 유독 어려워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조금 신기한 일이다. 같은 이야기를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대학생들이나 내 가까운 직장인 친구들에게 했을 땐 아무 문제 없이 잘 따라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내가 너무 수준 낮은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학계의 언어 안에 내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체계가 없어서 발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마도 학자들만의 언어가 일단 몸에 배면 그 밖의 언어가 잘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제 그런 외계어를 통하지 않으면 사고라는 걸 못하게 된 사람들 같다. 공부라는 건 사고의 확장이 아니라 단절이었나.)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나, 그냥 결이 다른 지식들이 존재하고 그게 학문을 더 다채롭고 깊이 있게 만드는 거 아닌가 싶은데 학계에서 난 늘 혼이 난다. 좀 이상하다. 사람들이 자꾸 어디 어디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데 지적하는 부분들이 전부 제각각이다. 다만 공통적인 건 자신이 잘 모르겠다거나 원래 어떻다고 알던 내용을 내가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을 때 예민하게 반응한다. 지적하는 부분들을 보면 다 각자의 불안이 담긴 부분들이어서, 결국 이게 얼마나 실제 내 글에 대한 건지 싶다. 나름 이름 있는 사람들인데 해준다는 피드백이 자기의 화를 내게 풀고 있는 걸로 느껴질 때가 많아서 좀 황당할 때가 많다. 어쩌라는 걸까? 이걸 고친다고 그들의 불안이 사라지긴 하는 걸까? 이건 끝이 없는 의미 없는 수정이라고 느낄 때가 너무 많다.


학자들이 가진 불안을 제대로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가르치고 주장하는 직업이다 보니 자의식을 자꾸 키우게 되는 것 같고, 자기 능력 증명이 중요해지는 것 같고, 그게 객관적 자료로 증명이 어려운 인문계가 되면 단단하지 않은 땅을 딛고선 자신의 권위가 한순간에 흔들릴까 봐, 자기가 알던 게 부족하단 게 드러날까 봐, 늘 덜덜 떨고 있는 것 같다. 모르는 부분을 발견할 때 더 눈이 빛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게 가장 두려워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이 학계 큰 자리들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학문도 나름의 학문이겠지, 한다. 내가 죽은 예술의 일방적 외침들을 불편해하고 싫어하듯 또 그쪽 입장에선 늘 미완성의 살아있는 언어들이 얼마나 성에 안 찰까. 다만 서로 여유 있게 봐주면 좋겠는데 나만해도 소중한 주말 세 시간을 맞지 않는 공연에 사용하게 된 게 너무나 화가 났다. 어쩌면 작품소개가 제대로 됐다면 난 이 비싸고 오만한 공연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 오만이려니 한다. 어떤 언어가 공연을 제대로 담겠으며 또 이 경험이 데이터베이스로 쌓여 언제 내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매일 펼쳐지는 전시와 공연으로 어지러운 서울 풍경 속에서 예산을 짜고 겹치는 행사들 중 하나를 겨우 고르면서 일종의 예술 답사를 다니는 중이다. 내게도 이 외계어들이 술술 읽히는 날이 올까? 언젠가 나도 고인물이 돼서 예술계 밖의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이게 될 날이 올까? 지금 마주치는 풍경들은 너무 낯설고 이상한데 이럴 수밖에 없는 구조를 이해할 날이 올지. 또 궁금하다고 눈을 빛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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