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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Apr 13. 2022

우리는 지금도 고도를 기다린다

신은 죽었지만 매일은 흘러가는 부조리극

부조리극을 보러 간 적이 있으실까요?

저희 어머니는 대학 시절 <대머리 여가수>라는 흥미로운 제목에 이끌려 연극을 보러 갔다가 지나치게 지루하고 내용이 없어 당황스러웠다고 말씀하시는데요.

현대극으로 올 수록 표현이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객에게 요구되는 배경지식이나 공부가 점점 많아지는 느낌입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아직도 상연되지만 아직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름부터 어두운 '부조리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계대전 이후의 상실감과 허무함을 표현하다


부조리극은 다른 실험적 현대극들과는 다르게 특정 인물이 이끄는 예술운동이 아닌, 유럽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연극 형태입니다. 마틴 에슬린(1918-2002)이라는 헝가리 출신 영국 비평가가 이들 연극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를 모아 '부조리극'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생겨난 장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에게 분석된 극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부조리극이라는 인위적 사조로 정리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에슬린의 분석은 난해했던 당시 공연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지금까지도 많은 영감을 주는 극 형태로 자리하게 하였습니다.


에슬린은 책에서 아르튀르 아다모프(1908-1970), 사무엘 베케트(1906-1989), 장 주네(1910-1986), 외젠 이오네스코(1909-1994), 해럴드 핀터(1930-2008)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각기 작업했던 극작가들을 한 데 모아 분석합니다. 그만큼 각자의 작품세계가 뚜렷하게 다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행동의 무의미성, 운명의 우연성과 잔혹성, 그리고 지금 현재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는 게 공통점입니다. 기승전결로 이루어지는 스토리라인의 중요성과 행동의 인과관계를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 즉 서양 연극의 토대를 뿌리째 전복시킨다는 점에서 아주 충격적인 극이 아닐 수 없죠. 한 술 더 떠 부조리극에서는 언어가 해체되어 소통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모습이 특징적인데요. 이는 대사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던 서양 연극의 근본을 뒤집는 발상이었습니다.


이렇듯 특정 운동의 일환도 아니면서 기존 관습을 비슷한 방식으로 정면 공격하는 현상이 발생한 배경에는 세계대전이 있었습니다. 유럽을 위주로 진행되었던 세계대전은 과학과 문명의 지속적 발전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산산조각 냅니다. 산업혁명을 통해 인간 삶에 발전과 향상만을 가져올 것이란 믿음을 준 과학이 세계대전에서는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어 더 잔혹한 현실을 만든 것입니다. 세계대전은 절대적 가치와 기준, 끊임없는 발전, 그리고 과학으로 대표되는 이성과 합리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립니다. 끝이 없는 잔혹한 현실 속 인간의 외침에 신은 묵묵부답이었고, 신이 상징하는 초월적 가치와 삶의 방향성은 아무리 해도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처참한 전쟁 속에 바스라집니다. 부조리극이 사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죽이며 흘러가는 삶의 모습이 전후에 기존 가치관과 철학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상태를 가장 사실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지프 신화> 그림인데요. 허무가 뒤따르더라도 끈질기게 희망을 가지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society6.com/product/one-must-imagine-sisyphus-happy-illustration-albert-camus-quote_print?sku=s6-6012441p4a1v45&c_kid=s6-6012441p4a1v45&trafficsource=gpla&g_network=u&g_productchannel=online&g_adid=588179500731&g_keyword=&g_adtype=&g_keywordid=pla-768913061733&g_campaign=%5BNB%5D_1027_US_%5BPLA%5D_Wall_Art_Prints_SSC&g_ifcreative=&g_acctid=521-729-4540&g_productid=s6-6012441p4a1v45&g_merchantid=7992249&g_partition=768913061733&g_campaignid=16586238123&g_adgroupid=143129250628&g_ifproduct=product&gclid=Cj0KCQjwxtSSBhDYARIsAEn0thSbN3B4q4Ik2I7n2IkUYSN6uSwM2MHGo5IOb4hXkps5WOGwp7zSg1saAit7EALw_wcB&gclsrc=aw.ds)


'부조리'라는 용어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차용되었습니다. <시지프 신화>는 실존주의적 고민을 담은 카뮈의 에세이집인데요. 책에서 카뮈는 인간이 삶의 목적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조차 하지 못하고 계속 살아가는 모습을,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돌을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 시지프에 비유합니다. 카뮈는 예정된 실패를 앞에 두고도 계속 살아나가고 생존하는 그 의지에 찬사를 보내며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는데요. 사실 부조리극은 전쟁 이전에 등장한 실존주의의 희망적이고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경향과는 조금 결이 달라서, 아무 해답도 찾을 수 없는 현상태에 집중하여 더 부정적이고 음울한 톤을 띱니다. 돌을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모습이 아무 도움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의 삶과 같음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더 깊이 파고들어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 것이 부조리극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1막과 2막이 매우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죠. 앞뒤 문맥도 없이 문득 에스트라곤(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라는 두 인물이 등장하여 지루한 표정으로 말장난을 하며 시간을 열심히 흘려보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황무지와도 같은 황량한 배경에 앙상한 나무 하나가 서 있는 풍경이 지루함을 더합니다. 두 사람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지만 아무도 정확히 고도가 누군지 모르는 듯합니다. 중간에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다 떠나지만, 이들은 친구 관계인 고고와 디디와는 다르게 철저한 위계를 보여줍니다. 포조는 노끈을 이용하여 럭키를 폭력적으로 부리고 럭키는 이에 완전히 복종하죠. 두 사람의 모습은 불편함을 자아내기만 하여 고고 디디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두 막 모두 한 소년이 등장하여 고도 씨가 오늘은 못 오니 내일 만나자라고 했다고 전하며 끝납니다.


2018년 뉴욕에서 상연된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입니다. 무채색의 색감과 배경의 황량함을 느껴보세요.

(이미지 출처: https://dcmetrotheaterarts.com/2018/11/05/review-waiting-for-godot-at-the-gerald-w-lynch-theater/)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시간입니다. 극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유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1막에서 벌거숭이였던 나무에, 그다음 날로 보이는 2막에는 하룻밤 새 날 수 없을 크기의 잎사귀가 나 있습니다. 하루의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되면 갑자기 무대가 어두워지며 달이 쑥 솟아오르는 급작스런 변화가 보이고요. 1막에서 멀쩡했던 포조와 럭키는 2막에서 포조는 장님으로, 럭키는 벙어리로 등장합니다. 이에 더해 고고, 포조, 럭키는 서로를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관객과 함께 시간을 직선적으로 파악하는 디디는 이러한 황당한 전개에 답답해하며 계속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고자 하지만 실패합니다. 인과관계가 중요했던 기성극과는 달리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과관계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도 끝내 보상받지 못합니다. 언제부터 장님이었냐는 디디의 질문에 포조가 호통치며 그냥 어느 날부터 장님인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은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이러한 주제를 보여줍니다.


전후 상황 속에서 희망의 부재를 그려낸 부조리극, 그리고 황무지를 배경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모두 굉장히 암울하고 어두울 것 같죠.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의 부제는 <2막으로 구성된 희비극>입니다. 부조리극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무대에 옮겨놓은 것과 같은데요. 인생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을 제공하면서 비극적인 상황들이 사실은 헛웃음을 유발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고고와 디디가 시간을 보내며 의미 없는 다양한 몸짓들을 하는 것은 슬랩스틱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언어유희도 상당히 유머러스합니다. 긴장감 있는 사건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면 느긋이 앉아 문득문득 헛웃음을 터뜨리며 즐기고 올 수 있는 극인 것이죠.




깐깐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베케트는 엄격한 극작가로 유명했습니다. 무대의 정밀성과 정확도를 매우 중시한 그는 언어의 가장 정수만을 사용하기 위해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극작을 하였고, 굉장히 구체적인 무대 지시문을 썼습니다.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지시할 정도였죠. 마치 한 편의 안무를 짜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심혈을 기울인 대본이 조금이라도 다르게 변형되어 연출되었을 때 베케트는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특히 1984년 하버드 대학교 소속의 유명 극단 아메리칸 레퍼토리 씨어터에서 베케트의 또 다른 부조리극 <엔드게임>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무대에 격하게 반대하며 극단을 고소한 사건이 유명한데요. 예산 부족으로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중간에 합의를 봐야 했던 베케트는 결국 공연 프로그램에 두 장 짜리 설명문을 끼워 넣도록 합니다. 이 설명문에는 해당 공연이 자신의 극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적혀있었고요. 특정할 수 없는 장소에 창문이 두 개 나 있는 배경의 원작을 아메리칸 레퍼토리 씨어터에서는 전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뉴욕의 지하철 역으로 바꾸어 연출했습니다. 배경에는 폭탄을 맞은 지하철이 폐허가 되어 놓여있었고, 원작에는 없던 효과음 등 음악도 사용되었습니다. 창의적으로 잘 해석했다는 평을 들은 연출이었지만, 난해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절대 부차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베케트에게 있어서 이렇듯 특정 시공간을 제시하는 것은 해석의 갈래를 닫아버리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베케트는 자신의 극을 스스로 연출하게 됩니다.


아메리칸 레퍼토리 씨어터에서 연출한 <엔드게임>입니다. 백인 남자를 염두에 두고 극작을 했던 베케트는 흑인 배우가 배역을 연기하는 것에도 크게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americanrepertorytheater.org/shows-events/endgame/)




베케트의 짧은 단막극을 통해 부조리극을 느껴보실까요?


<Act Without Words (말 없는 행동)>은 언어를 없애고 마치 눈으로 보는 시와 같은 한 편의 비유적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사막 한가운데에 갑자기 내던져진 인간은 갈증을 느끼지만 눈앞의 물은 손을 뻗으면 멀리 달아나고, 나무에 목을 매려고 하면 가지가 축 처지면서 끈을 매달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더 이상 탈출 시도를 하지 않고 고통을 그저 버티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b_eMMqUjTA




조금 더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부조리극도 있습니다.


톰 스토파드(1937-)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영국 극작가인데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시나리오를 쓴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부조리극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1967)로, 1990년에 개리 올드만과 팀 로스를 주연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2014년에는 영국 국립극장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을 맡아 한 번 더 알려지기도 했죠. 여느 부조리극과 다름없이 상당히 난해하지만, 말장난과 슬랩스틱이 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편이라 좋은 관객 반응을 얻으며 꾸준히 상연되는 극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단역으로 등장하는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클로디어스와 햄릿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엔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조차도 연극에서 제대로 조명해주지 않고 지나간다는 점에 착안하여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의 시선에서 <햄릿>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맡겨진 임무는 그들에게 있어 무의미하며 아무 이유조차 설명받지 못했기 때문에, 극 내내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마주합니다. 내막을 알기 위해 애써 보지만, 단두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주변인으로서 진실에 조금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을까요? 극은 이에 대한 답이 무의미하고 인생은 그저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연속임을 이야기합니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동전 던지기를 할 때 앞면만 꾸준히 나올 확률이 희박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막상 앞면만 꾸준히 나오더라도 그것은 그저 우연의 하나이며 우리는 그 이유를 절대 알 수가 없는데요. 여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여러 가지 의미를 도출해보아도 그건 모두 인간이 임의로 부여한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을 이루는 매일의 특별하고 또 평범한 일들은 필연이자 우연이고,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은 평생 알 수 없는 우주 너머의 어떠한 원리로 돌아갑니다. 장면을 함께 보실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gOwLEVQGbrM&t=9s




지난 2년은 여러 가지로 답답하고 절망적인 기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팬데믹 속에서 우리는 계속 끝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공간적 제약이 커지면서 시간의 흐름이 이전과는 다르다고 느낀 경우도 많았을 거예요. 저는 동료들과 2020년과 2021년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흘러 지나가 버렸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만큼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매일이 같아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느 하루를 다른 날과 더는 구분하기 어려운 때가 오기도 했죠. 온라인 상에서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현실감도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팬데믹 속에서, 그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와 늘어나는 사망자 수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현상에 설명을 붙이고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해도 명확한 답도 해답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매일을 보내며 기다릴 뿐이죠. 부조리극이 전후의 허무함을 표현하여 당시 관객의 공감을 얻었다면, 지금 우리도 부조리극을 보면서 위안을 얻고, 또 잠깐이나마 헛웃음과 함께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고도는 누구인가요? 어쩌면 우리는 고도가 오지 않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오느냐 오지 않느냐보다는, 지평선 너머 아른거리는 그 존재 덕에 삶을 지탱하고 연장해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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