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좀비로 만드는 것은 <불안>과 <상실> 그리고 <사건>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새벽시간에 메신저를 받는 기분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상대가 청소년이라면 예능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다큐'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기대할 건 '호러 다큐'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대장님, 주무셨어요?"
"그럴 리가. 대장님은 이 시간에 안자..."
"가만히 있자니 못 참겠고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자니 마땅히 하고 싶은 말은 없는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기분이 더 별로해져서요.."
"그럴 수 있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그냥 부호라도 하나만 달아도 괜찮아..."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개 다 고맙다.."
그렇게 그 친구는 점 하나 남기고 30분이 흘렀다.
"괜찮아졌어?"
"네... 나아진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네..."
"그래... 그럼 다행이다..."
더 이상은 메신저는 없었다. 혹시나 자고 있을 때 연락 올까 싶어 스마트폰을 가슴에 품고 자는 건 배려로 보이지만 실은 습관이고 습관이 만들어 준 절차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다. 그 무렵 또 다른 청소년이 새벽의 길목에서 메신저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대장님, 우울해요.."
"음악을 듣는 건 어떨까? 요즘 어떤 곡이 인기지?"
"죄송해요 음악 듣는 거 안 좋아해요..."
"별개 다 죄송하다..ㅠ"
"잠이 안 와서 연락드렸어요...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도 잠이 안 와서 책 읽고 있는 중이었어... 미안할 건 아니다...^^"
"무슨 책인데요?"
"좀비의 사회학"
"제가 요즘 좀비 같아요..."
"내 눈에는 생각보다 좀비 같은 청소년들이 많아..."
"다른 친구들도 저처럼 이 시간에 이런 메신저를 보내는 사람 있어요..?"
"생각보다 많아... 그러니까 네가 이상할 건 아니지?"
"그러네요... 이제 졸리기 시작했어요.."
"답이 없으면 자는 줄 알고 있을게... 대장님 신경 쓰지 말거라...^^"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둘에게 연락을 했다. 걱정이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고 그렇다고 심한 증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소한 현장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의 사례는 결코 심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청소년들 중에는 이러한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혹시나 부모님들께서 예민하게 반응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지극히 평범한 요즘 청소년들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갈수록 또 청소년들과의 대화를 거듭할수록 대화에도 청소년들의 다른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중에 유독 관심이 가는 현상은 바로 청소년들이 <좀비>가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들에게서 유독 자주 느낀다. 결코 문제 있는 청소년들과의 대화에서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생각을 나눠보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부모님 중에 우리 자녀가 <무의식> 같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는지?
"맞아요. 도통 말도 안 하고 표정을 보면 표정 자체가 없어요. 그렇다고 말이라도 걸면 굳이 필요 이상의 말은 안 하죠... 그렇다고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아요... 하기야 그러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예상치 못한 웃음을 보기도 하죠... 모르겠어요 내 자식인데도..."
어느 순간 이렇게 무의식 같아 보이는 청소년들의 행동을 나는 <청소년 좀비 현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물론 어감이 심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청소년 관련 어감이 센 것들이 어디 한두 개라야 말이지. 어쨌든 아이들의 <좀비 현상>은 경계를 넘었을 때 나타나는 경향이 높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영역에서 가정으로의 영역으로 넘어왔을 때 또 지친 공부를 마치고 학원에서 가정으로 그 경계를 넘어왔을 때. 그뿐인가 학교에서 마치고 혼자 걸어오다 집으로 들어왔을 때. 대체로 영역이 바뀌었을 때 <좀비 현상>은 더 뚜렷하다.
청소년을 좀비화 시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몫의 대부분은 <무기력>이다. 무기력은 결국 <무의지>와 연결되고 이는 지금 청소년이 처한 환경과 문명이 관련이 있다. 영향이 아주 세게 미치고 있는 것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일부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연구결과에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볼 수는 없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사이버 공간>만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의 생각에도 일부 찬성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결정적인 영향은 결국 <작용조차 없다>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상호 작용>을 하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고, 그 중심에 우리 청소년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화를 하는 것도 이제는 마주하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서로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기능도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저 우리는 반응만 할 뿐 작용을 하지 않는 세상에 청소년들을 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운 것이 결국 우리가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인데 과연 <좀비 현상>이 놀라운 현상일까? <좀비 현상>이란 일종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상실감에서 기인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이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요소에는 청소년들이 가장 애착을 갖는 친구들의 모임인 '또래 집단'과 '스마트폰'의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둘의 공통점은 한 동안의 '지속성'을 띤다는 것이다. 맞다. 핵심은 붙잡고 있는 생각의 몰입이 다른 사고로의 전환을 허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남은 의지를 다 소진해서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해도 이상하게 더 밀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의 <좀비 현상>을 유발하는 몇 가지 요인들을 한번 짚어보자. 그 첫 번째로 <불안>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굳어버린 결과다. <불안>의 대표적인 원인은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마음에서도 시작한다. 그렇다면 자녀는 무엇을 잃기 싫은 걸까? 무슨 생각을 오랫동안 해오던 것일까? 그 내용을 알아내는 것이 부모의 역할일 것이다. 예를 들면 성적을 잃을까 봐 걱정일까? 친구를 잃을까가 걱정일까? 아니면 부모의 신뢰? 선생님의 신뢰?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다행히도 이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상실>이다. 상실은 외면적인 부분과 내면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말 그대로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불안의 완료형이다. 이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본을 송두리째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적인 상실을 대표하는 건 <이별>이다. 사람에 대한 이별과 사물 혹은 장소에 대한 이별이 대표적이다. 전학도 해당될 수 있고 이사도 자녀들에게는 상실로 다가올 수 있다. 내부적인 상실을 대표하는 건 <배신>이다. 누구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자녀들은 상실감을 느낀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은 자녀에게 <배신>이 가장 충격적일 수 있다. 또 <외면>이다. 자기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과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걸 의지를 통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사건>이다. 즉, 자녀에게 대처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수사적 개념이 아니라 일상적 변화를 돌려놓은 전혀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자녀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답을 구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수록 의식은 점점 사라지는 현상을 보인다.
대부분의 자녀는 <좀비 현상>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리가요?라고 하겠지만 일부러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청소년들과의 만남에서도 대화에서도 또 결정적인 내 눈에 비치는 세상 위 움직이는 청소년들의 모습에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아주 쉽게 이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길거리를 혼자 걸어가는 청소년을 봐달라. 그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표정은 없고, 가방 때문에 몸은 짓눌러져 있고 다리에는 힘이 없다. 누구라도 길을 물으면 순간 친절한 표정이 나오지만 끝나면 다시 무표정이다. 다시 힘이 없는 몸이다.
이제 대안을 찾아보자. 어떻게 해야 자녀의 <좀비 현상>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애착>이다. 대부분의 부모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학교를 보내기 전에 또 문명을 대하기 전에 우리 자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그 시간에는 관심도 밀착되어 있었고 관찰도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다. 더구나 무엇을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 또한 했었다. 여행을 간 것은 부모보다는 자녀를 위해서가 컸었고, 책을 보여주었던 것은 내가 읽기보다는 자녀에게 콘텐츠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먼저였다. 야구장도 미술관도 자녀를 위한 것이었고 결국 그때까지는 우리는 함께였다.
맞다.
<좀비 현상>을 이겨내기 위해 탁월한 방법은 <애착>이다. 이것은 이제 다 큰 자녀에게 <애착>이라는 개념보다는 <신뢰>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자녀의 나이에 맞는 수준에서 다시 과거로의 복귀를 준비하자. 그리고 가족의 힘을 보여주고 부모의 힘을 보여주자. 나는 부모님들께 서슴없이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함께 해보는 노력을 권한다. 즉, 이럴 때는 자녀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으면 한다. 모처럼 자녀와 같이 잠을 자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모처럼 이불속 대화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또 저녁 시간을 활용한 자녀와의 데이트는 어떨까? 주말이 아닌 주중의 극장가를 보러 간 적이 있을까? 학원을 안 가는 어느 날 가족끼리 서점으로 미술관으로 또는 열광하는 야구장으로 한동안 가보지 못했던 공간을 쫒아가는 건 어떨까?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들로 꾸며보자. 그리고 자녀에게 오래전에 가졌었던 부모와 가족에 대한 <애착>을 다시 느끼게 해 보자.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