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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Oct 16. 2019

자녀의 세대 이론 : <권위적인>부모는 싫습니다.

자녀 세대는 <권위>를 싫어한다. 그래서 <권위>를 만나면 입을 다문다.

몇 달 전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반말>과 관련한 주제로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그 방송에서 내 눈을 의심하게 했던 건 바로 선생님이었다. 방송에서 보이는 선생님은 학교에서 수학 과목을 가르치면서 교내 방송반 학생들을 지도하는 동아리 담임 선생님. 그런데 이렇게 평범한 선생님이 나를 놀라게 했던 건 바로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일상 대화>가 <반말>이었기 때문이다. 납득하기 쉽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모니터를 가리고 음성만 들었다면 선생님이 아닌 그냥 남녀 학생들끼리 흔히 나눌 수 있는 대화의 내용으로 들렸다. 이 상황을 본 기자가 학생들과 같이 <반말>을 사용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선생님은 학생들이 나이 많은 자신에게 대화의 <벽>을 느끼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권위적이지 않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다 같이 <반말>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을 만큼 TV에서 보이는 학생과 선생님의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게다가 <반말>은 학생들과의 SNS 메신저 창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 현상을 부모 입장에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

방송에서는 한 학생이 학교 적응을 못했는 데 반말을 허락한 선생님의 태도 때문에 지금 학교를 너무 잘 다니고 있다는 부모의 인터뷰 장면도 있었다. <반말>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우리에게 예의가 없다 라는 <전통적 편견>이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방송이 무척 재밌는 사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여느 학교 선생님들이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또 지금 이 글을 읽는 부모의 반응은 어떨지 말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경험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만난 청소년들과의 대화에서 느낀 것을 감안하면, 나는 이 선생님이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매우 효과적인 <소통의 방법>을 선택했다고 본다. 또 이 선생님은 지금까지 보여준 여러 교육자의 모습에서 지금 <현대 자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이 정도까지 해야 할 만큼 지금 자녀들은 정말 <권위>를 싫어하는 것일까?  


사실이다.

지금 자녀 세대는 <권위>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아니 <권위적인> 모습이 아니라 <권위 있는> 모습이라도 보였다가는 '뭐지?' 하며 부모나 선생님을 빤히 쳐다볼지도 모른다. 아니, 쳐다보던지 아니면 '아 네~'하고 순응하는 척 무시하던지 학년에 따라 둘 중에 하나다.


부모라면 자녀 교육을 위해 <권위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여러 매체를 통해 배웠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권위적인> 부모가 아닌  <권위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부모 교육 강연장에서 임상심리학자인 바움린드(Diana Blumberg Baumrind)가 주장한 <부모의 4가지 양육스타일 - *허용하는 부모 / *권위적인 부모 / *권위있는 부모 / *무관심한 부모>을 설명하면서 강연자들이 자주 거론했던 단골 메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살짝 <부드러운 시비>를 걸어볼까 한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선생님과 부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비> 자체가 <논쟁>이 되고 결국 그러한 과정을 통해 부모가 자기 리듬에 맞는 올바른 <부모의 유형>을 찾는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싶다.


일단 <권위적인> 부모와 <권위 있는> 부모의 차이는 무엇일까?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우리는 <권위>라는 단어의 정확한 이해부터 필요할 것 같다. 늘 말하지만 <개념>만 정확하게 이해해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는 쉽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먼저 <권위>다.

 <권위 -權威>란 무엇일까? <권위 - 權威>란 사전적 의미로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을 말한다. 여기서 <남>이란 <자녀>가 해당될 것이다. 또 <권위>란 이러한 지휘와 통솔을 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추는 걸 전제로 한다. 만일 <정당성>이 없다면 그냥 <권력>에 불과하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권위>라는 표현 자체에는 이미 <정당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권력>은 이러한 <정당성>이 결여된 <강제>만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부모의 <권위>에는 어떤 <정당성>이 있다는 것일까? 그것은 부모의 <권위>는 바로 <전통적 권위>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전통적 관습과 역사가 그 <정당성>이며, 더 세심하게는 자녀를 보호하고 올바른 성인으로 양육할 책임의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이제 <권위>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게다가 <권력>의 의미와도 조금은 구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제 말장난처럼 보이는 <권위적인> 부모와 <권위 있는> 부모의 차이까지 마저 알아보자. <권위적이다>와 <권위 있다>는 엄연히 다른 뜻이다. <권위 있다>는 <정당성> 즉, 책임과 보호의 태도가 명백히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권위적이다>라는 뜻은 <권위>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해석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즉, 자녀가 봤을 때 부모의 <권위적인> 태도는 가식적이고 불합리한 태도로 보이고 <권위 있는 태도>는 합리적이고 위엄 있는 태도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 부모가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태도가 일단 <권위적인 태도>가 맞는 건 분명하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부모의 머리속에 <권위적인>이라는 단어는 삭제해버리자.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 <권위 있는 태도>도 자녀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중심이었던 옛 사회 구조와는 달리 지금 자녀를 둘러싼 변화무쌍한 환경이 부모의 <권위>를 위협하고 그 의미를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위를 거부하는 현상>은 어디서 발현되었을까?

우선 변화된 <가족 문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세대와는 다른 부모 세대의 높은 학력과 맞벌이 경제활동은 우리 자녀가 아동기 때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도록 가능하게 했고, 여기에 전통적인 관습과 윤리 준수보다는 내 자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내 새끼 먼저 챙기기>라는 가족 이기주의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런 가족 이기주의가 가족별로 생기다 보니 부모가 아니면 어른을 굳이 공경할 필요가 있는지 또 선생님께도 공손한 예절이 필요한 지를 알지 못한다. 그냥 가족 외에는 그냥 합리적인 관계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  <방송 매체>가 제공하는 <콘텐츠>도 한몫을 했다. 대부분의 요즘 자녀 계층을 겨냥한 프로그램들을 보면 결국 주제는 항상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하고 옳지 않은 것에는 언제든지 자기 의견을 밝혀야 한다는 지극히 민주적인 자세를 제시하는 방송물이 주류라는 것도 한 몫한다. 또 무엇보다 자녀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스마트폰 속 <사이버 공간>의 역할이 우리 자녀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 지를 연장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자녀들이 거주하는 <사이버 공간>은 그 자체가 <수평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익명성>이라는 이유로 상대가 몇 살인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모두 <존댓말>을 한다. 또 <권위>라는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이버 공간>에서 나이나 학벌, 직업, 계급 등을 내세웠다가는 뭇매를 맞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40대 변호사도 50대 교수도 10대, 20대 젊은이들로 보이는 <텍스트>를 보면서도 결코 <반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언제 봤다고? 식이다. 게다가 <사이버 공간>은 자녀들이 인터넷 SNS나 유튜브,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올라오는 권위형  게시물에 대해서도 일단 비난하고 보자는 공격적인 댓글 문화 또한 자녀가 <권위>를 거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초등학교 자녀의 경우 나이 한 살 차이에 민감함을 보이는 것을 보면 그건 또 의외다. 특히 중. 고등학교 자녀의 경우 빠른 05년생..., 늦은 04년생... 하는 것처럼 몇 개월 차이를 굳이 따지고 서열을 구분하는 걸 보면 다소 엉뚱하고 꽤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걸 보면, 지금 자녀 세대는 또래 세대에서는 나이의 정당성을 갖춘 <전통적 권위>를 받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윗세대가 보이는 <전통적 권위>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띄기도 한다.


어찌 됐든 이러한 원인을 가지고 지난 수년간 경험했던 청소년들의 <비행 구조>와 연결해보면,

자녀가 변하기 시작한 시점 이전에는 대부분 <권력적인 부모>와 <권위적인 부모>가 있었다. 또 물론 최근의 현상이고 소수이긴 하지만 <권위 있는 부모>가 있는 자녀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모가 교사>인 자녀와 <부모가 경찰관>인 자녀들이다. 대부분 교사나 경찰관을 직업으로 둔 부모는 자녀에게 지극히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다. 교육학과 법학을 전공했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그리고 보호와 책임이라는 <정당성> 마저도 탄탄하다. 그런데 어찌해서 비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러한 자녀의 특징은 초. 중학교 때까지 징후가 없다가 중3이나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예고도 없이 짠~ 하고 커튼 뒤에서 놀라게 하듯 나타난다. 그럴 리가 없던  자녀가 어느새 <담배>를 피우고 있고 그것도 7mm 가장 독한 일본산 담배를, 또 어느새 <술>을 마시고 있으며 대부분 평균 주량이 소주 2병 이상이란다. 그중에서도 특이할 점은 대부분 <단기 가출>을 경험해서 결국 밖으로 겉도는 경로를 밟는다는 것이다. 또 최근에는 수 천만 원대 <사이버 도박>을 한 청소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학생 부모 또한 두 분 모두가 교사였다. 특히 이들의 <단기 가출>은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으며, 굳이 캐물었더니 <벗어나고 싶었습니다>가 전부였다. 아이러니한 건 이러한 자녀 대부분이 또 학업성적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예의는 없는 걸까? 아니다. 다른 평범한 자녀들처럼 기본적인 도덕성과 예의는 갖추고 있다. 맞다. 일종의 <아노미 현상>의 <청소년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제 <해법>으로 넘어가 보자.

결국, 앞서 소개한 선생님처럼 집에서도 자녀와 <반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혹시라도 <반말>을 생각하고 있으시다면 미리 말씀드리겠다. <반말>은 아닙니다.


<해법>은 <권위>의 개념에서 찾아야 한다. 즉, <권위 - 權威>란 자녀를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을 말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핵심은 바로 <힘>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모가 이 <힘>을 어떻게 길러야 하고 또 어떻게 부려야 하는지를 고민하면 된다.


그래서 제안한다면 <힘>은 <정당성>으로 꽉 차 있는 찐빵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자녀가 부모의 힘이 정당하다고 납득할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힘>은 부모의 태도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부모는 자녀에게 <힘>을 부릴만한 자격이 있는 지를 지금까지의 과정을 먼저 측정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부모는 일과 가정을 모두를 소화하느라 바쁘고 고달프다. 그런 상황을 자녀도 모르는 것이 아니며, 설령 나이가 어려 모른다 하더라도 이제는 알게 해야 한다. 어리다고 몰라도 돼라는 구시대적 방식은 오히려 자녀를 오해하게 만든다. 이러한 입장에서 최대한 자녀에게 애틋한 노력을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자녀에게는 <힘>으로 전달된다. 이것이 바로 <정당성>이다. 그래서 <힘>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렇게 길러진 <힘>은 이제 <민주적>인 모습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힘>을 부리는 데 있어서 상대의 특성과 여건을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자녀에게도 자녀의 특성과 여건에 맞는 <민주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자녀의 개인차가 너무 크고 부모의 양육방식 또한 너무 다양해서 자녀들의 내면화된 특성과 기질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딱 이 것이다>라고 제안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자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부모가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신, 아무리 개인차가 크다 하더라도 반드시 빠져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상식>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세대가 태어나자마자 <사이버 문명>을 만났고, <사이버 공간>에서 거주하면서 우리 자녀는 그만큼 민주적이고 상식적인 자녀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녀는 지금 지극히 민주적이고 상식적인 시민이다.


이제 마무리를 하기 전에 다시 앞서 이야기했던 선생님으로 돌아가 보자.

선생님이 학생들과의 소통을 위해 대화의 벽을 허문건 <반말>이었다. 우리는 <반말>에 집중하지 말고 <벽을 허문건>이라는 문장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부모라면 자녀와 소통을 힘들게 하고 있거나, 소통을 아예 안 하고 있거나 운이 좋게도 아니면 노력의 결실로 불만 없는 소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녀는 소통이 없었다가도 벽을 허물면 소통을 할 수 있는 대상이고, 또 반대로 소통을 잘하고 있다가도 갑작스러운 벽을 만나면 입을 단번에 입을 다무는 대상이다.


이전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자녀 안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녀가 입을 다물면 모든 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차라리 벽을 허물고 그렇게 말이 없던 자녀가 <수다쟁이>가 되어서 귀찮을 정도가 되어도 말 없는 자녀보다는 말 많은 자녀가 훨씬 다행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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