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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좋은 엄마

by 미누

재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비가 와서인지 교문 앞에 대여섯 명의 학부모가 서 있었다. 마중 나온 부모들 사이를 눈여겨보던 재이가 소리를 질렀다.


"엄마"


"어, 카페 아저씨네?"


후다닥 엄마에게 뛰어오던 재이가 수호를 보고 말했다.


"안녕, 재이야."


"뭐야. 엄마 남자친구 생겼어?"


"하, 이 녀석이... 엄마 남자 친구는 너잖아."


"나는 여자친구 따로 있어, 라니."


셋은 차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차가 고장 나서 아저씨가 고쳐주었다는 소리, 그런데 갑자기 비가 왔다는 소리, 오늘 빵 굽는 형도 못 온다는 소리, 이제 차를 타고 데려다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럼 짜장면 먹자."


"짜장면, 갑자기?"


"아저씨도 짜장면 같이 먹고 가면 좋잖아."


학교 옆 골목길 안에 있는 낡은 짜장면 집은 대를 이어 내려온다는 유명한 곳이었다. 이 시골에서 3대째 짜장면을 이어한다면 말 다 했지 않냐며 라니 엄마가 소개해 준곳이었다. 재이가 학교에 입학하던 날, 함께 온 아빠, 엄마 손을 잡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던 친구들을 바라보던 재이 손을 꼭 잡고 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지갑에는 고작 몇천 원이 있었다. 하지만 재이 입학식이라고 마을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만원씩 이만 원씩 걷어서 봉투에 파란 지폐가 두둑했다. 십만 원도 안되었을 돈이지만 그 돈을 받고 안도했었다. 그만큼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재이를 데리고 몸 만 나왔던 결혼생활로 건진 것은 그야말로 재이뿐이었다. 열 달을 배 아파 나았던 재이를 기르고 먹인 것도 이현이었다. 그리고 끝내 결혼의 종지부를 지어야겠다던 남편은 재이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분노와 원망만 가득 찬 이야기 속에서 재이 이야기가 한 톨도 나오지 안 않기에, 재이뿐이었던 결혼생활에 대한 미련을 남지기 않고 떠나올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어쩌면 결정이 쉬웠던 이유가 그 사람의 생각은 끝까지 자신에 대한 것일거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재이 때문에 머뭇거리던 마음의 날이 세워졌다. 둘은 이토록 달랐다.


"안녕하세요."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손님들이 다행히 많지는 않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짜장면에 군만두 한 접시를 시키고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재이도 웬일인지 별말이 없었다. 카페에서는 수호와 꽤 친해진 듯 보이더니 막상 같이 식사를 한 건 처음이라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삼촌도 없는 재이가 남자 어른과 엄마, 자신이 함께 식당에 온 것이 처음일 거라는 생각이 이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머, 가만 보자.... 너..."

아까부터 이현이 앉은 테이블 쪽을 유심히 쳐다보던 여자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너 수호지?"

삼십 대 중반에서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예전에 몇 번 보았던 가게 홀을 지키며 서빙도 돕던 사장님이었다.


"너.... 너는..."


"나, 미현이."


수호는 당황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너 어쩐 일이야. 한번 들르지를 않더니. 여전히 잘 나가는 거야? 동창 중에서 너만큼 잘 나가는 사람이 없다던데..."


"나야 뭐... 너는 잘 지냈니? 네가 이어받았다는 건 몰랐네. 설마 네가 요리하는 건 아니지?"


"뭐야. 나 얼마나 요리 잘하는데. 짜장면은... 적어도..."


그때 다른 테이블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다. 그때 이현의 테이블에도 음식이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그런데 여기는 누구셔?"


이현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궁금했던 속내를 전혀 숨기지 않는 사장님은 시원시원하게 수호에게 물었다.


"응, 우리 엄마 친구."


수호의 말에 이현이 고개를 들어 살짝 웃어 보이고는 짜장면으로 눈을 떨구고 얼른 젓가락을 들었다. 재이는 이미 젓가락을 들고 먹기를 시작했다.


"응응... 맛있게 먹어.."


수호도 얼른 눈인사를 하고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기름기가 흐르는 흑갈색 짜장면이 맛깔스러웠다.


"엄마, 진짜 맛있었어."


식사를 마치자 미현이라는 수호 동창은 주방에 들어간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서빙을 돕던 외국인 종업원이 계산을 도왔다. 셋은 가게를 나와 차로 향했다. 비가 와서 땅이 질퍽질퍽했다. 하지만 공기는 비를 머금어서 그런지 촉촉했다.


수호가 운전대를 잡고 에어컨을 틀었다.


"냄새도 안 나고 잘 나오죠?"


수호는 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이현은 재이와 함께 뒷 좌석에 타고 있었기에 수호는 말을 할 때 고개를 살짝 돌리거나 백미러를 바라보아야 했다. 이현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이는 졸리는지 이현의 무르팍을 파고들었다.


"불편한 데 짜장면 먹으러 가자고 한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수호 씨에게는 여기가 살던 동네라는 걸 깜빡했어요. 떠난 이유가 있었을 텐데... 미안해요."


이현은 수호의 얼굴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아 보여서 사실 신경이 쓰였다.


"티 났나요? 뭐. 괜찮아요. 미현이가 워낙 발이 넓고 말이 많긴 하지만, 뭐. 짜장면 맛은 변함이 없더군요."


"썩 편해 보이지는 않던데요."


이현이 날까로운 표정으로 수호를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수호는 무표정의 얼굴이었다.


"내가 아빠가 없다고 놀렸던 애가 바로 아까 그 애였거든요. 나 걔 싫어했어요."


수호가 웃으며 말했다.


'장난인 건가? 대체 저 사람은 속을 잘 모르겠어.'


수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사실이 아닐 리도 없었다. 재이처럼 수호도 오랜 시간 아빠 없이 엄마와 둘이었다는 건 사진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사랑이 많은 엄마와 함께여서 괜찮았어요. 재이처럼요."


뒤척이던 재이가 차가 달리자마자 잠이 들었다는 건 알았다. 그런 재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이현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작은 꽃집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사진 속에 있던 그 인물은 왜 오지 않는 걸까?


이현은 궁금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정작 자신도 몰랐을까.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는... 가끔 재이의 얼굴을 보며 울었다.


재이가 가엾은 만큼 나, 정이현이라는 사람의 삶도 가여워서, 원망은 아닌 한탄을 했었다. 벌겋게 부운 눈으로 밤을 보내고 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재이는 일어나 이현의 품을 파고들었다.


때로는 자신에게 무작정 파고드는 한 생명에 대한 무서운 책임감이 너무나 크게만 느껴졌다. 나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였다. 아직은 세상이 두렵고 막막한 어린 여자였다.





쌕쌕 거리며 잠든 재이를 바라보며 이현은 거문바다로 가는 내내 같은 생각을 했다.



'나는 작은 꽃집 할머니처럼 그렇게 좋은 엄마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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